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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거창(居昌)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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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居昌)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728년(영조 4) 4월 2일
전투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일원
상세내용

1728년(영조 4) 4월 1일 이인좌(李麟佐)의 난 중 이웅좌가 지휘하는 반군이 거창일원에서 선산부사 박필건과 곤양군수 우하형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배한 전투.

이 해 3월 20일 이인좌의 동생 이웅좌(이웅보)와 정희량이 지휘하는 반군이 안음에서 기병하여 안음과 거창의 수령에게 합세할 것을 요구하자 안음현령 오수욱은 진주의 병영으로 도망하고, 거창 현감 신정모 역시 도주하였으며 거창좌수 이술원은 이웅좌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반군은 합천과 삼가지역도 내응세력의 도움을 받아 손쉽게 장악하였다.

변란 소식을 들은 경상감사 황선은 반란이 일어난 지역을 포위하기 위하여 성주목사 이보혁을 우방장으로 삼아 성주와 지례·고령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초계군수 정양빈을 좌방장으로 삼아 초계와 의령·함안·단성의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또 선산부사 박필건은 본진의 군사를 이끌고 북쪽 길을 차단하고 우병사 이시번과 진주영장 이석복에게 남쪽에서 반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외에도 상주영장 한속과 안동영장 김정상에게 속읍의 군사를 동원하여 예비대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동원명령을 받았음에도 진주의 우병사 이시번은 조정의 지휘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로 군사동원을 거부하였고 영장 이석복 역시 진군을 주저하므로 곤양군수 우하형이 진주 일원에서 동원된 군사를 지휘하였다.

거창과 합천 일원을 장악한 반군의 주력은 거창에 집결하여 북상 준비를 하였다. 대원수 이웅보는 자신이 동원한 병력 5초와 거창의 속오군 8초 등 13초의 병력을 이끌고 우두령을 넘어 지례 방면 길을 택하여 진군하여 안동방면의 반군과 합류하려 하였고, 소사에 주둔한 부원수 정희량은 함양에서 동원한 병력 7초와 안음의 금위군 3초 등 12초의 군사를 지휘하여 무주를 거쳐 전라도·충청도 지역에서 기병한 반군 세력과 합류하려 하였다. 두 진의 거리는 약 10리 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관군의 동원과 진군은 반군의 예상보다 신속하였다. 선산부사 박필건이 이끄는 군사들은 장곡역에 진을 치고 우두령을 먼저 점거하여 이웅보가 이끄는 반군의 북진을 막았고 금산과 개령, 지례의 군사들이 합류하여 방어망을 굳혔다. 무주 방면의 도로도 전라도의 군사들이 먼저 장악하여 정희량이 지휘하는 반군이 진군할 수 없었다. 함양군수와 전라도 운봉현감은 함께 팔량치를 방어하여 반군의 주력이 전라도 남쪽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였다. 합천에서도 초계군수 정양빈과 고령현감 유언철이 이끄는 관군이 반군의 거점에서 5리쯤 되는 금양역까지 이동하여 압박을 가하였다.

반군의 거점을 크게 에워싼 관군은 4월 2일에 먼저 합천의 반군을 공격하였다. 관군의 우방장인 성주목사 이보혁은 이미 금양역까지 진출한 관군을 합천 읍내에 돌입시켜 반군을 깨뜨리고 거창으로 잔당을 추격하면서 이동하였다. 합천 지역을 상실한 반군이 사기가 저하되어 대오를 갖추지 못하자 앞서 우두령을 장악하고 있던 선산부사 박필건은 아전 김진평을 시켜 반군 진영에서 기를 휘둘러 군중을 혼란케 하도록 하고 휘하 군사를 돌격시켜 고개 아래에 집결한 반군 주력을 격파하였다.

이때 반군 지휘관 이웅좌는 도망하여 성초역 부근에서 발이 묶여 있던 정희량의 진영에 합류하였는데 이곳에도 고성현감 우하형이 인솔하는 남부지역의 관군이 압박을 가하여 반군은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반군의 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자 강제로 반군에 예속되었던 군사들이 대부분 도주하여 처음에 약 3천명 가량이었던 반군 병력은 1천명 미만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이때 거창에 사는 장교로서 반군에 편입되어 있던 천총 정빈주는 다른 장교들과 모의하여 휘하 병력을 동원하여 반군 지휘부를 포위하고 이웅좌와 정희량을 비롯한 반군 지도자 21인을 체포하여 관군에게 항복하였다. 이들은 금위영과 어영청 소속 지방 장교들이었기 때문에 군사들을 손쉽게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군은 내응세력의 도움으로 초기에 안음·거창·합천·삼가 지역을 쉽게 장악하였으나 관군의 신속한 조치로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거나 근거지를 옮기지 못한 채 세력을 잃게 되었다. 특히 반란에 적극적이지 못한 지역의 군사들을 주력으로 삼은 결과 형세가 불리해졌을 때 배신을 당하여 주동자들이 모두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