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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妙淸)의 난

시대 : 고려
시기 : 1135년(인종 13) 1월~1136년 2월
전투지역 : 서경(평양)
관련유적 : 대화궁터(평양)
상세내용

고려 인종 13년(1135) 묘청 등이 서경(평양)을 근거지로 일으킨 반란.

이자겸(李資謙)의 난 이후 개경의 궁궐이 불타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지자, 묘청 등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퇴했다는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천도를 주장하였다. 인종은 묘청의 건의에 따라 서경에 대화궁(大花宮)을 건립하는 등 서경천도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부식 등의 반대로 서경천도가 좌절되자 묘청 일파는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은 자비령 이북의 길을 차단하고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시키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하였다. 고려 조정은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삼군(三軍)을 편성케 하여 서경을 토벌하게 하였다.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묘청의 일파로서 개경에 있던 정지상·백수한 등을 처형하고 군대를 이끌고 안북부(안주)에 이르렀다. 김부식은 7, 8차례에 걸쳐 서경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서경의 실권자 조광(趙匡)은 형세가 불리한 것을 깨닫고 묘청·유담·유호 3인의 목을 베어 윤첨에게 개경으로 보내 항복하게 하였다. 하지만 개경정부가 윤첨을 하옥시키자, 항복하여도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끝까지 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김부식은 전군을 다섯으로 나누어 서경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게 하였으나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개경 조정에서는 전함 190척의 수군을 보내 김부식의 육군을 돕게 하였으나, 서경군의 공격을 받아 전함이 모두 불탔다. 그러나 김부식은 전투가 지구전으로 전개될 것으로 판단하고, 공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10월에 이르러 서경 성내의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김부식은 서경성 주변에 흙으로 산을 쌓아 서경을 압박하였다. 서경군은 토산(土山)을 점령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가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김부식은 승세를 틈타 5군을 모아 성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였다.


1136년 2월 9일 토벌군의 맹공격이 개시되었다. 토벌군은 토산 위에 석포를 설치하여 수백 근의 돌을 날려 보내니 서경성의 누각이 이에 맞아 부서지고 뒤를 이어 화구(火毬)를 던져 불을 질렀다. 며칠간의 공방 끝에 19일 토벌군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서경성으로 돌입하였다. 서경군은 마침내 무너져 패하였고, 조광의 시체를 거두어 항복하였다.

묘청의 난은 평정되었으나, 그 사건이 고려사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이전 개경과 대등할 정도였던 서경의 지위가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개경 문신세력을 견제하던 서경세력이 몰락함으로써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문신세력의 독주가 가능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