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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石門)전투

시대 : 통일신라
시기 : 672년(문무왕 12) 8월
전투지역 : 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전쟁상대국 : 당나라
관련유적 : 서흥 운마산(雲磨山) 석문사
상세내용

672년 8월 황해도 서흥에서 신라 중앙군 부대들이 당의 장수 고간의 유인작전에 의해 패배한 전투.

신라는 668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고구려의 백성들을 받아들이고, 당나라 지배하에 있던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세력 확장을 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당나라 고종은 크게 노하여 군대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였다.

672년 8월 평양에서 황해도 배천까지 남하한 당군은 신라군의 반격을 받아 다시 석문으로 북상했다. 석문은 황해도 서흥에 있는 들판으로 이곳은 임진강을 건너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신라군은 석문 들판의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진을 쳤다. 의복, 원술 등이 지휘하는 신라군은 최선두에 대기병 방어부대 장창당(長槍幢)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라중앙군단의 여러 부대를 적의 기병공격으로부터 막아주기 위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고간이 이끄는 당 기병단이 신라군 진영쪽으로 돌격해왔다. 먼저 신라 장창당의 최선두에 섰던 궁수들이 화망을 구성하여 화살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당의 기병이 가까이 접근하자 선두의 궁수들은 창을 땅에 고정시킨 장창보병의 대열 뒤로 숨었다. 이때 장창보병이 겨냥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말이었다.

당 기병의 선두대열이 장창보병에 걸려 낙마하자, 기병대의 흐름이 정체되기 시작했고, 신라의 장창보병이 기동력이 사라진 당 기병을 포위하여 대파하였다. 이때 장창당이 당병 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한다. 그러나 이후 신라군은 장창당을 너무나 과신하게 되었고 다른 여러 부대들의 포진에 있어 긴장감이 떨어졌다.

당 기병이 이 허점을 노리고 다시 진격해왔다. 역습을 받은 신라군은 장군 의복을 비롯하여 대아찬 효선, 사찬 의문·산세, 아찬 능선·두선, 일길찬 안나함·양신 등이 전사하는 등 전멸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화랑 원술(元述)이 참전하였다 대패하고 일생을 후회 속에 산 것도 이 전투였다.

이후 신라군은 당군에게 정면승부를 걸지 않고 지구전으로 전술을 선회하였다. 따라서 전투 그 자체가 소규모화 되고 동시에 그 횟수가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