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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용골산성(龍骨山城)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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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골산성(龍骨山城)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627년(인조 5) 1월 13일~6월 14일
전투지역 : 평안도 용천군 용골산성
전쟁상대국 : 후금
관련유적 : 용골산성
상세내용

정묘호란 때인 1627년(인조 5) 1월 13일부터 6월 14일까지 5개월간 용골산성을 거점으로 한 유격부대가 후금군의 배후를 교란한 전투.

1627년 1월 13일에 의주를 침공한 후금군은 일부 병력을 용천과 철산 방향으로 진출시켜 연안지역을 확보하려 하였다. 용천은 평안도 서쪽 압록강 어구의 삼각주에 위치하였는데, 의주에서 안주 쪽으로 이어지는 주공축선에서는 벗어나 있었으나 압록강 하구를 통해 조선에 접근하는 해안선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당시 용천부사 이희건은 후금군이 의주와 창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용천부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동쪽 10리에 있는 용골산성으로 주력과 주민 일부를 이동시켰다. 용골산성의 북쪽과 동쪽은 중천(中川)이 휘감아 흐르고 서쪽과 남쪽은 험한 산지로 싸여 있으며 접근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희건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산성을 거점으로 농성하면서 동시에 유격전을 전개하여 후금군의 진격속도를 둔화시키고 배후를 위협할 계획이었다.

후금군은 용천부를 쉽게 점령하고 조선군 주력이 이미 용골산성으로 이동하였음을 확인하자 주력을 선천으로 진군시키고 일부 병력을 남겨 용골산성을 포위, 공략하려 하였다.

산성이 포위되자 성 안의 인심이 동요하여 항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희건은 선동자들을 처단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방어태세를 정비하였다. 그는 고립된 성에서 계속 농성하기보다 후금군의 진영이 갖추어지기 전에 출성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직접 100여명의 정예 기보병을 이끌고 성을 나섰으나 본격적인 유격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후금군 기병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이처럼 이희건 이하 장병들이 전멸당하자 성 안에서는 다시 혼란이 일어났으나 군민들은 스스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전 영산현감 정봉수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후금군에 대항하였다. 이때 후금군은 부사 이희건이 전사한 용골산성의 방어가 허술할 것으로 짐작하고 1천여의 병력을 동원하여 용골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 안의 군민들은 정봉수를 중심으로 이를 완강히 막아내어 후금군에게 막심한 타격을 가하였으며 전력을 상실한 후금군은 성 밖 10리 지점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조선과 후금간에 화의가 성립되어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용골산성의 의병부대는 끝까지 해산을 거부하고 완강히 저항하였고, 후금군 역시 안전한 퇴로 확보를 위해서는 용골산성을 점령하고 조선군을 격파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마침내 3월 17일 의주와 창성 일대의 후금군이 집결하여 산성을 공격하였다. 공방전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5차례나 전개되었다. 조선군은 화살과 포, 돌 등으로 한꺼번에 공격하여 후금군의 선봉을 궤멸시키고 방어에 성공하였다. 후금군은 4월 13일에도 공격을 가하여 왔다. 1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조선군은 후금군이 성벽에 접근할 때까지 사격통제와 침묵을 유지하다가 성의 사면에 밧줄과 사다리를 걸고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자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성아래와 성벽에 집중된 후금군 병력들은 집중사격을 받고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조선군은 발석차를 이용하여 후금군의 공성기구를 파괴하였다. 후금군은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후금군은 전면 공격과 함락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포위를 풀고 소규모의 유격기병대를 각지에 배치하여 산성을 견제하는 한편 주력을 의주방면으로 철수시켰다.

후금군의 봉쇄활동으로 산성의 조선군은 점차 성을 지키기 어려워졌고, 조정에서도 이미 화의가 성립되었고 고립된 성을 끝까지 지키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출성과 이동을 지시하였다. 의병장 정봉수는 5월 30일 계문을 올려 양곡이 떨어지고 전염병이 치성하여 노약자 1,370 여 명이 사망하고 도망자도 늘어나는 등 비전투 손실이 계속 증가하므로 성을 유지할 수 없음을 알리고, 6월 14일 잔여 인원을 이끌고 성을 나와 철산 앞바다의 대계도로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