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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안주성(安州城)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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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성(安州城)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627년(인조 5) 1월 21일
전투지역 : 평안도 안주군 안주성
전쟁상대국 : 후금
관련유적 : 안주성
상세내용

1627년(인조 5) 1월 21일에 청천강 남쪽의 거점인 안주성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후금군의 전투.

이 해 1월 15일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한 후금군은 의주성과 곽산의 능한산성을 점령하고 청천강 이북지역을 석권한 후 평양으로 향하는 중요거점인 안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

안주성은 청천강 남쪽에 있으며 북방에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는 중요거점이었다. 성의 북면은 청천강에 인접하여 천연적인 해자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과 서쪽은 언덕에 의지하여 성을 쌓았고 평야지대에 인접한 동문에는 이중성을 쌓아 적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 남문에는 외옹성이 설치되어 방어에 만전을 기하였고 남문과 동문 사이에 있는 망경루와 북문 가까이 있는 백상루가 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중요 지휘소였다.

후금군 침공시 귀성에 진출해 있던 평안병사 남이흥은 의주와 용천 등 평안도 서북 지역이 유린당하자 주력을 안주성으로 이동시켰다. 이어 강계, 개천, 중산, 영유, 맹산, 박천 등 7읍의 군사 등을 동원하여 결전을 준비하였다. 아울러 평안감사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평안감사 윤훤은 별장 김완을 시켜 황해도 별승군 1,700을 인솔하고 안주성을 지원하도록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완은 길을 잘못 들었다는 이유로 안주성까지 가지 않고 평양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결국 평안병사 남이흥은 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안주성 공방전을 치러내야만 했다.

후금군은 1월 19일 얼어붙은 청천강을 도하하여 안주성 북방으로 진출하였다. 안주성의 북면은 청천강에 인접하여 강이 천연 해자 역할을 하였으나 겨울이어서 수량이 줄어들고 결빙되어 용이한 도섭을 허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어 후금군은 1월 20일에는 성의 4면에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두 차례 항복을 권유하였던 후금군은 1월 21일 새벽안개 속에서 공성전을 개시하였다. 총 병력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만 4천여 병력은 성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도보로 성벽에 접근하였다. 나머지 6천여 기병은 성벽 주위에서 성위의 방어군에게 사격을 가하여 보병을 엄호하였다.

오전 내내 후금군의 세 차례 파상공격을 가하였다. 조선군은 원거리의 후금군 기병은 대포로 공격하고 근거리에 접근하는 보병에게는 조총과 활로 사격을 가하여 후금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오경에 후금군은 일단 병력을 철수시켜 사상자를 수습하고 부대를 정비한 후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오후에도 역시 3차의 파상공격을 감행하였다. 조선군은 여전히 후금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으나 후금군의 수적 우위를 감당해내기는 어려웠다.

결국 오후 3-5시 무렵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운제를 거는데 성공한 후금군이 이를 타고 성안에 돌입하였다. 이 때문에 성의 남쪽 방어선이 먼저 무너졌는데 동시에 성의 서북방과 동북쪽 성벽에도 운제가 걸리고 후금군이 쇄도하면서 4대문이 모두 돌파되고 말았다. 성안 각지에서 백병전이 전개되자 조선군 지휘부는 남문 성루에서 전투를 지휘하였으나 결국 지휘소를 유지하지 못하고 안주 성 동편에 있는 관아에까지 밀리게 되었다.

성내에 돌입한 후금군은 성내를 수색하면서 조선 군병을 포로로 하는 한편 안주부 관아를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하였다. 조선군 지휘부가 이를 거부하자 다시 접전이 시작되었고 안주관아가 함몰될 지경이 되자 병사 남이흥은 화약고에 불을 붙여 관아에 방화하였으며 불 속에서 지휘부 전원이 몰사하고 말았다.

이 전투는 후금군에게 조선군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다는 굳은 정신자세와 결의를 보여준 전투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청천강 방어 거점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조선군은 평양방위와 수도권 방비를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없었고 후금군은 평양까지 순조롭게 진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