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한민족 전투원형손돌목포격전(孫乭頁砲擊戰)

연관목차보기

손돌목포격전(孫乭頁砲擊戰)

시대 : 조선
시기 : 1871년(고종 8) 6월 1일
전투지역 : 인천 강화군 손돌목
전쟁상대국 : 미국
관련유적 : 광성보, 손돌목 포대
상세내용

1871년 강화해협 손돌목에서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벌어진 포격전.

1871년 미국은 1866년에 발생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격침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통상조약을 강요할 목적으로 함대를 파견하였다. 군함 5척과 병력 1,230명으로 구성된 미국 함대는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5월 21일 인천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5월 30일 강화해역으로 진출한 미국 아시아함대의 블레이크 중령은 30일과 31일 양일간에 걸쳐 조선 관원과 회담을 마친 후, 6월 1일부터 강화해협에서 한강 수로에 이르는 해역을 탐사할 준비를 갖추었다. 포함 2척과 소형 함정 4척으로 편성된 블레이크 중령의 탐사대는 6월 1일 강화해협 입구에 이르렀다.

이때 강화해협의 조선군은 초지진으로부터 갑곶나루에 이르는 해안선에 포대를 설치하여 총 70여문의 대포를 배치하였다. 조선군은 강화해협의 중간 지점이며 물살이 빠르고 굴곡이 심한 손돌목 어귀의 광성보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탐사대를 예의 주시하였다. 그리고 탐사대의 선두가 손돌목에 접어들자, 광성보 지휘소에서 울리는 포성을 신호로 하여 대포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탐사대도 즉각 응사함으로써 쌍방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아시아함대의 8인치 대포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폭발탄을 연속적으로 발사하여 조선군의 포진지를 삽시간에 파괴하였다. 반면 조선군의 대포는 소구경에 발사거리가 짧은 재래식으로 성능이 훨씬 뒤떨어졌다. 개인 화기도 미군의 레밍턴 소총은 조선군의 화승총보다 발사거리와 발사속도에서 훨씬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측 탐사대의 월등한 화력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조선군이 진지에서 철수함으로써 양군의 교전 상황은 일단 종식되었다. 조선군 수비대의 자위적인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교전으로, 조선군은 광성보의 진지와 시설물들을 파괴당하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고, 미군 탐사대는 부상자가 2명에 불과하여 피해가 경미하자, 계속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가 한강으로 북상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탐사대의 주력 전함인 포함 모노카시호가 손돌목에서 좌초를 당함에 따라 미군측은 당초 계획을 포기하고 모선이 정박해 있는 작약도 근해로 귀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