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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삼포왜란(三浦倭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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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왜란(三浦倭亂)

시대 : 조선
시기 : 1510년(중종 5) 4월 4일~19일
전투지역 : 경상도 웅천·동래·울산 일원
전쟁상대국 : 일본
상세내용

1510년(중종 5) 웅천(제포)·동래(부산포)·울산(염포) 등 세 포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삼포일대를 점령하였다가 정부군에 의해 진압된 사건.

조선은 건국 후부터 왜구 통제와 관계 안정을 위해 동래의 부산포와 제포·염포를 개방하고 왜관(倭館)을 두어 제한적인 교역을 허용하고 소수 인원의 상주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상주인구가 늘면서 조선 관원들과 충돌이 자주 생겼으며 조선측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삼포의 일본인들이 대마도의 일본인들을 끌어들여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1510년 4월 4일 새벽에 일본인들은 먼저 제포와 부산포를 공격하였다. 이들은 성 밖의 민가를 모두 불사르고 성에 돌입하였는데, 이 결과 제포 첨사는 포로가 되었으며 부산포 첨사는 참살당하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두 성의 주민들을 살해하고 이어서 웅천과 동래를 포위하였다. 경상우도 병사 김석철(金錫哲)은 포위당한 웅천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접근하여 웅천현 북쪽 웅신산(熊神山)에 진을 쳤으나 일본인들의 야습을 받아 후퇴하였다. 웅천현감 한륜(韓倫)은 방어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우선 가족들을 피신시키려고 성문을 열었으며 이 바람에 민심이 동요하여 4월 6일에 성이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동래는 포위한 일본인의 수가 적었으므로 함락당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변란 소식을 접한 정부에서는 황형(黃衡)을 좌도방어사(左道防禦使)로, 유담년(柳聃年)을 우도방어사로 삼아 진압케 하였다. 4월 19일 새벽 조선군은 육군은 삼로로 나누어 웅천을 공격하고 경상우수사 이의종(李義宗)이 수군을 동원하여 협공을 시작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웅천을 버리고 제포성 밖의 세 봉우리를 점거하여 농성하려 하였다.

일본인들을 포위한 조선군은 녹각목(鹿角木)을 세워 공격에 대비하면서 압박하였으며 투석군을 내세워 공격하니 일본인들의 방패가 부숴져 조선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동쪽 봉우리가 먼저 함몰되고 이어서 서쪽과 남쪽 봉우리가 궤멸되자 견디지 못한 일본인들은 모두 배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마도주의 아들인 소우 모리히로(宗盛弘)가 피살되고 삼포의 일본인들은 모두 쓰시마로 도주하였으며 조선군은 전과를 확대하여 292명의 수급을 베었다.

변란을 진압한 조선은 일본과 통교를 단절하였으나 2년 후 1512년(중종 8) 윤 5월에 일본국왕의 명에 따라 대마도주가 책임자를 베어 바치고 화친을 청하자 비로소 임신약조(壬申約條)를 맺고 통교를 허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