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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벽제관(碧蹄館)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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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碧蹄館)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593년(선조 26) 1월 25일~27일
전투지역 : 경기도 고양시 벽제관
전쟁상대국 : 일본
상세내용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1월 25일에서 27일까지 경기도 고양시 벽제관 부근에서 후퇴하던 일본군과 추격하던 명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이 해 1월 9일 평양을 탈환한 명군이 남진하자 일본군은 급속히 후퇴하였으며 개성과 황해도 배천(白川)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이동시켜 서울 부근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일본군은 총 5만여의 병력으로 서울을 방어할 계획이었다.

저항을 받지 않고 개성까지 장악한 명군은 1월 25일에 수색대를 보내 적정을 탐지하였으며 이들은 임진강을 건너 서울 근교까지 진군하다가 역시 명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출동하였던 일본군 수색대와 충돌하였다. 이 조우전에서 명군은 일본군 60여급의 목을 베는 낙승을 거두었다. 명군은 이에 일본군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서울까지 완전히 수복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한편 수색대의 보고로 명군의 진출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은 먼저 선봉부대를 보내 여석령 일대에 진을 치고 전투태세 준비를 갖추었다. 1월 26일 개성을 출발한 명군은 서울을 향해 행군하다 선봉 3천기의 기병부대가 임진강을 건너 오산리(烏山里) 부근에서 숙영하였다. 앞서 진지를 구축한 일본군은 한 밤중에도 계속 정보수집활동을 전개하여 명군의 진로를 파악하였으며, 병력규모를 파악한 후 서울에 있는 주력을 이동시켜 명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피아의 전투는 1월 27일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명군 기·보병 3천명이 먼저 여석령에 진을 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보병들이 먼저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고 돌격하여 도검과 단창을 이용한 백병전을 감행하였으므로 명군이 밀리게 되었다. 명군은 좁은 진흙땅에서 포수와 기병이 뒤엉켜 기병의 기동력이 저하되면서 기병의 돌파, 충격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초전에서 밀리기 시작한 명군이 망객현을 넘어 후퇴하자 일본군은 이를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하려 하였는데 7천여의 명 주력군이 남하하여 전장에 합류하자 전세가 역전되어 일본군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일본군 역시 8천여 병력을 출동시켜 이를 구원하게 하는 등 난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명군 사령관 이여송은 수백 기의 기병을 이끌고 고양 벽제관을 지나 전장으로 이동하여 직접 독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동 중 주막리 일대에서 매복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부대가 궤멸되고 말았으며 이여송도 포로가 될 지경이었으나 구사일생으로 포위망을 탈출할 수 있었다.

명군은 자신들과 맞서 싸우는 일본군의 병력수가 2만여에 달하고 후방에 추가 병력이 이동 중임을 파악하고 돌출한 부대를 후퇴시켜 전선을 정리하려 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승세를 굳히기 위하여 4천여 병력을 동원하여 명군의 중앙부를 공격하였다. 명군은 창곤수와 대봉수를 풀고 불랑기포를 사격하여 이들의 돌격을 저지하였다. 혼전이 계속되는 중 일본군 본대 2만 1천명이 주막리 서남쪽에 포위를 시도하였으나 명군 역시 일부 병력을 다시 우회·병력을 진출시켜 포위망 형성을 저지하고 호준포와 불랑기포 사격을 가하면서 기병대를 돌격시켜 일본군의 공격시도를 좌절시켰다.

명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린 일본군이 혜음령을 넘어 후퇴하기 시작하자 명군도 추격을 포기하고 파주의 본대로 귀환하였으며, 일본군 역시 서울로 철수하였다. 명군은 167급의 일본군 목을 베었으나 80명 이상의 인명손실을 입는 등 피해가 컸다.

이 전투는 명군과 일본군이 승패를 완전히 가리지 못한 싸움이었으나 평양성 전투 승리 후 일본군을 경시하던 명군은 남진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평양성 공략시 명군은 대구경 화포를 이용한 화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공성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나 단병접전이 중심이 된 이 전투에서는 이미 포진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쉽게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