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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백동산(栢洞山)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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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산(栢洞山)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637년(인조 15) 1월 28일
전투지역 : 강원도 김화군 백동산 일대
전쟁상대국 : 청나라
상세내용

병자호란 때인 1637년(인조 15) 1월 28일에 강원도 김화 백동산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청군의 전투.

1636년 12월 8일 조선을 침공한 청군은 산성을 거점으로 배치된 조선군 방어망을 피하여 수도권으로 직공하였으며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을 신속히 포위할 수 있었다. 이에 현지에서 적의 주력을 저지하지 못한 평안도의 조선군은 청의 주력을 추적하여 수도권으로 이동하였다. 1월 26일에 강원도 김화에 집결한 조선군이 남한산성으로 진출하려 하자 앞서 철원·연천·포천 일원에 배치되어 강원도방면에서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청군 우익군의 일부 병력은 조선군을 격파하기 위하여 김화로 진격하였다.

청군과 전투를 앞두고 조선군 내부에서는 진영배치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평안감사 홍명구는 평지에 진을 구축하고 제1선에 총수, 제 2선에 궁수, 제 3선에 창검병을 배치하여 청군과 대적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평안병사 유림은 기병이 중심인 청군과 싸우려면 고지에 진을 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고집하였다. 장시간 격론을 벌였으나 병력배치에 합의를 보지 못하자 두 지휘관은 자기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각기 평지와 고지에 진을 치고 말았다.

1월 28일 아침에 김화로 이동한 청군은 일부 병력을 조선군의 두 진영 사이에 배치하여 상호 협조를 차단하고 먼저 평야의 홍명구 진영을 먼저 공격하였다. 청군은 화포사격을 가하면서 선두에 기병 1천여 기를 앞세워 조선군 진영 주위를 맴돌면서 화살로 공격하여 전열을 흩뜨리면서 주로 장창으로 무장한 3천여 보병을 돌격시켰다. 그러나 홍명구 휘하의 조선군은 견고한 목책에 의지하여 3, 4차에 걸친 청군의 파상 공격을 막아냈다. 조선군의 집중사격으로 사상자가 늘어나자 청군은 건초와 장작을 실은 수레를 조선군의 목책에 밀어붙이고 불을 붙여 목책을 소각·제거하였다.

장애물을 제거한 청군은 일제히 조선군 진영으로 돌격하였으며 조선군은 전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청군과 백병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조선군은 지휘관 평안감사 홍명구 이하 대부분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한편, 백동산의 유림 진영은 제 1선에 창검병, 제 2선에 궁수, 제 3선에 총수를 배치하여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아울러 진영 주위에 큰 돌을 쌓아 두고 유사시 굴려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형상 이점을 최대한 살리려 한 것이다. 평지의 조선군을 섬멸한 청군은 당일 오후 백동산을 포위하고 전면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선군은 청군을 진지 가까이까지 접근시킨 후 미리 준비한 큰 돌들을 굴러내렸다. 이 때문에 청군 전열이 흐트러지자 제 1선의 창검병들이 일제히 돌격하여 청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청군이 다시 전열을 수습하여 재차 공격을 가하자 조선군은 청군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지휘관의 명에 따라 제 2선의 궁수대와 제 3선의 총수대가 교대로 사격을 가하였다. 청군은 기습적인 일제 사격에 많은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가 다시 일제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조선군은 이 역시 용이하게 물리칠 수 있었다. 이 두 차례 파상공격을 막아낸 것은 적절한 사격통제가 이루어진 결과였다.
오후 내내 지속된 청군의 공격이 소강상태를 보이게 되자 유림은 진영을 재정비하고 일부 병력을 진영 외곽에 은밀히 매복시켰다. 해질 무렵 청군이 다시 공격을 개시하자 조선군은 적을 사정거리 내에 끌어들인 후 본진과 외곽 매복조가 동시에 사격을 가하여 청군 전열을 와해시켰으며 후퇴하는 청군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전과를 확대하였다.
청군은 물러갔으나 조선군은 전투 중에 탄약과 화살을 모두 소모하여 거점을 계속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유림은 병력을 화천 방면으로 은밀히 이동시켜 적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게 하였다.
이 전투에서 평안병사 유림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후 철저한 사격통제를 유지하면서 매복조를 적절히 활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철수시에도 기만작전을 써서 주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