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한민족 전투원형동래(東萊)전투

연관목차보기

동래(東萊)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전투지역 : 부산 동래성
전쟁상대국 : 일본
관련유적 : 동래성
상세내용

1592년 4월 15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에게 동래성이 함락당한 전투.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을 함락시킨 일본 침공군은 다음날 오전에 동래성에 도착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은 경상좌병사 휘하의 병력과 인근 군현 소속 군사들의 지원을 받아 성을 지키려 하였으나 일본군을 해상에서 막아야 할 경상좌수사 박홍은 장비와 병력을 포기하고 도주하고 말았으며 동래성 수비를 지원하기 위해 울산에서 이동한 경상좌병사 이각 역시 일본군의 군세를 확인하고 혼자 도망하여 도주하고 말았다. 동래성에는 송상현과 조방장 홍윤관, 수비지원을 위해 입성한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 등이 이끄는 3천여 병력이 있었으며 일본군은 약 2만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포위망을 구축한 일본군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조선군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거부당하자 전면공격을 가하였다. 이들은 앞서 부산진 전투에서 조선군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였었기 때문에 동서남 3면에 포진한 병력을 일시에 총동원하여 조총사격을 가하면서 성벽을 기어올랐다. 성벽 방어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곧 동북쪽 성벽이 먼저 무너지고 이를 통해 성 안에 돌입한 일본군과 시가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성안에서는 부녀자들까지 지붕 위에서 기와를 던져 일본군을 부상케 하는 등 전 군민이 힘을 다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막으려 하였으나 결국 부사 송상현 이하 대부분의 병력이 전멸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시간이 부족하고 지휘부의 도주에 따른 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여건에서는 최선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전하고 말았다. 개전 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부산진과 동래성을 장악한 일본군은 침공 작전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후의 작전을 순조롭게 전개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군은 방어태세를 갖추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지 못하고 초전의 패배에 따른 충격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