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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남한산성전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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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전투(1)

시대 : 조선
시기 : 1636년(인조 14) 12월 15일~1637년 1월 30일
전투지역 :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전쟁상대국 : 청나라
관련유적 : 남한산성
상세내용

병자호란 중인 1636년(인조 14) 12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남한산성에서 조선군이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다 결국 실패한 전투.

1636년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한 청군은 산성 중심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던 조선군의 주요 방어거점을 피하면서 신속히 남진하여 12월 14일에는 선봉부대가 한양 부근에 도달하였다. 조선은 청의 침공이 있을 경우 국왕이 강화도에 옮겨가서 이곳을 거점으로 장기항전을 꾀하려 하였다. 이 때문에 청군의 침공소식이 알려지자 조선 조정은 한성판윤 김경징을 강도검찰사로 삼아 왕실과 대신의 가족을 강화도에 우선 피난시켰으며 국왕 일행도 뒤를 이어 강화로 향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군 선견대가 양화진 및 개화진에 진출하여 한강 하구를 봉쇄하였으므로 국왕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 일행이 성에 들어갔을 때 남한산성에는 미곡 14,300여석, 피·잡곡 9,500석, 장 220여독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는 1만여 병력이 2개월 이상 버티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이었으나 이때는 군사뿐 아니라 왕실과 종친, 문무관료, 서리, 노비 등 14,300여명이 들어와 장기 농성시 양곡 부족이 우려되었다. 산성방어를 맡은 조선군 병력은 광주진관 소속군병들과 경군인 어영청 총융청, 훈련도감 군인 등 모두 13,800여명이었다.

12월 15일 2천여명의 청군 병력은 강화도와 통하는 한강 수로를 차단하였으며 다시 4천여명을 이동시켜 신천나루를 장악하고 삼전나루에 도달하였다. 이들은 남한산성 서쪽까지 진출하여 통로를 봉쇄하고 본군 도달시까지 대기하였다. 이어서 12월 19일에 청 좌익군 24,000명이 모두 당도하자 이들은 남한산성의 동편과 남쪽에 분산 배치되어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12월 15일부터 청군은 기병 100여기를 서문에 접근시켜 형세를 정탐하였고 조선군은 12월 18일에 원두표가 이끄는 50여 명이 북문을 통해 나가 청군을 공격하여 6명을 사살하는 등 같은 달 21일까지 몇 차례 출성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같이 몇 차례 탐색전이 있었으나 양군이 정면 대결한 것은 아니었다. 청군은 견제공격을 통해 출성 및 연락을 방해하고 본대가 포위망을 완전히 굳히는 동안 지연전을 폈다. 그러나 조선군은 청군의 정세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출성 공격이나 어가의 이동을 도모할 수 없었다.

12월 22일 청군의 대공세가 있었다. 청군은 아침나절부터 5천여 병력을 동원하여 각 문에 1천여 명씩 배치하고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화포를 동시에 사격하여 돌격부대를 엄호하고 운제와 당차 등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조선군도 화포 사격을 가하고 화살과 돌을 날려 청군을 공격하였으며 정오 무렵 청군은 성과 없이 후퇴하였다. 이튿날에도 청군은 1만여 명을 동원하여 공세를 폈다. 아침 일찍부터 청군이 성벽에 접근하자 조선군은 전날과 달리 청군이 공격진영을 갖추기 전에 병력을 내보내어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출성한 조선군과 청군은 성 아래에서 백병전을 벌였고 다시 성벽을 두고 양측의 군대는 정오까지 공방전을 벌였다. 이날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80여명이 전사하고 청군 200여명을 사살하였다.

두 차례의 집중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군은 남한산성을 단기간에 함락하여 항복을 받아내기는 곤란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작전을 바꾸어 성을 외부와 완전히 고립시키려 하였다. 청군은 성 외곽의 주요 통로에 수십 군데의 목책을 설치하여 통로를 차단하고 복병을 두었는데 이 때문에 남한산성의 방어군과 외부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되고 말았다.

12월 29일 한양에 입성한 청 태종이 4만여 병력을 이끌고 남한산성 부근으로 진군하여 청군의 군세가 더욱 강해졌다. 청군의 포위망이 강화되는 반면 남한산성 안의 조선군은 외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여 점차 군량이 부족해져갔다. 각 도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근왕군들은 청군에게 각개 격파되거나 진격이 저지되어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11일에 그때까지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던 청군은 병력을 재배치하여 산성에 대한 외부의 지원을 보다 확고히 차단하였다. 아울러 서문과 북문 앞에 병력을 집중시켜 무력시위를 벌였다. 오랫동안 고립된 조선측의 항복을 촉구하는 행동이었다.

1월 24일 양군은 하루 종일 포격전을 전개하였다. 새벽에 청군은 미라동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검복리 일대로 이동시켜 산성 동문 일대에 대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청군의 포격으로 동문 문루 일각과 성벽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조선군 역시 천자포를 이용하여 청군 포대를 공격하였고 조선군의 대응포격을 견디지 못한 청군은 병력을 철수시켰다. 저녁이 되자 청군은 다시 동문 밖에 진출하여 홍이포 7,8문을 거치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홍이포는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강하여 동문과 남문 일대의 성벽 여러 곳이 파손되었고 성내의 사창과 행궁까지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도 이에 대응하여 화포 사격을 개시하였다. 특히 청군 포대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청군 화약더미에 명중탄을 작렬시키자 청군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접근전이나 포격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1월 26일에 청군은 자신들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그곳에 피난한 비빈과 왕자, 종실, 신료의 가족 등을 포로로 잡았음을 조선측에 알리고 출성항복을 촉구하였다. 출성항복 여부를 두고 성안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청군은 포위망을 강화하고 공성기구를 배치한 채 28일까지 여전히 포격만을 가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악화되어 가자 조선의 조정은 최후까지 항전하려던 방침을 포기하고 국왕의 출성항복을 결정하였으며 이를 청군 진영에 통고하였다.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45일간에 걸친 남한산성의 전투는 종식되었다.

남한산성 전투는 방어전에 유리한 지형을 택하였으나 외부의 성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고립된 처지에 내외 연계작전을 펼 수가 없었고 식량부족과 전의 상실로 말미암아 끝까지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못한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