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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금산(錦山)전투(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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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錦山)전투(2차)

시대 : 조선
시기 : 1592년(선조 25) 8월 17일~18일
전투지역 : 충남 금산군
전쟁상대국 : 일본
관련유적 : 칠백의총
상세내용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8월 17일부터 18일까지 조헌이 지휘한 의병이 왜군과 금산에서 싸운 전투.

승병장 영규가 거느린 승군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의 의병은 이 해 8월 1일 임금을 가까이에서 돕기로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라 아산에 이르렀을 때 때마침 왜군이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지방을 침범하려는 정보를 듣고 이를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충청도순찰사는 조헌의 전공을 시기해 직권으로 의병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가두는 등 갖은 수단으로 방해하여, 의병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만 700명가량의 의사만이 끝까지 남아 생사를 같이하기를 결의했다. 8월 16일 조헌은 남은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마침 별장 이산겸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에서 패퇴해오면서 “왜군은 정예대군이라 오합지중으로는 대적할 수 없다.”고 했으나, “국왕이 당하는 판에 신하가 어찌 목숨을 아끼랴.” 하면서 그의 만류를 거절하였다. 또, 전라도관찰사 권율과 공주목사 허욱도 조헌의 위험을 무릅쓴 공격을 말리면서 기일을 정해 함께 협공하자고 제의해왔으나, 조헌은 이를 거절하고 진군을 계속하였다.

조헌은 승병장 영규에게 글을 보내 다시 승군과 합진해서 8월 18일 새벽 진군하여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치고 관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한편, 성내의 왜군은 우리 군사의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전군을 나누어 교대로 공격해왔다. 조헌의 의병은 분전하여 왜군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물리쳤으나, 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이때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하여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의병은 육박전을 벌여 한명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순절하였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다. 한편,

이 싸움에서 왜군도 죽은 자가 많아 3일간 그 시체를 거두어 불태우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해버렸다. 이로써 호남·호서지방이 안전하게 되었으며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해 9월 왜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박정량이 의사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니 후세에 이를 칠백의총이라 불렀다. 선비들이 매년 이에 시향을 받들어왔으며, 1971년 정부에서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