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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광성진(廣城鎭)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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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진(廣城鎭)전투

시대 : 조선
시기 : 1871년(고종 8) 6월 11일
전투지역 : 강화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전쟁상대국 : 미국
관련유적 : 광성보
상세내용

1871년(고종 8) 6월 11일 조선군과 미군이 강화군 광성진에서 벌인 전투.

이 해 미국은 1866년에 발생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격침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통상조약을 강요할 목적으로 조선에 함대를 파견하였다. 6월 1일 손돌목에서 조선군과 포격전을 벌인 미군은 조선측이 계속 통상조약을 거부하면서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상륙부대에 의한 직접 공격을 결정하였다.

1871년 6월 10일 미국 아시아함대는 강화해협에 다시 진입하여 초지진을 맹포격하고 450여명의 병력을 상륙시켜 포대를 점령하였다. 이 날 밤 조선군은 초지진을 야습하였으나 우세한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였고, 미군은 6월 11일 초지진을 출발하여 덕진진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함포사격과 육전부대의 공격 앞에 덕진진도 쉽사리 붕괴되었으며 미군은 다시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광성진은 강화해협의 손돌목을 지키는 최대의 요새지로 병인양요 이후 포대와 병력이 상주하였으며, 당시 이곳에는 순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지휘하는 600여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어재연은 병력을 3개 돈대에 조정 배치하고 각종 대포 143문을 총동원하여 항전태세를 강화하였다.
한편, 킴벌리(L. A. Kimberley) 중령의 미군 상륙부대는 광성진 후방 봉화곡에 집결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공격 준비를 서둘렀다. 이 무렵 블레이크 중령이 지휘하는 미군의 해상 지원부대도 덕진진 앞바다에서 광성진 앞바다로 북상하여 상륙부대를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미군의 해상 지원부대는 11일 오후 1시경 어재연의 주력부대가 방어하고 있는 광성돈대를 비롯하여 광성진 일대에 함포사격을 개시하였다. 그러자 이와 때를 맞추어 봉화곡에서 대기하고 있던 킴벌리 중령의 상륙군 부대도 4문의 곡사포를 집중 발사하였다. 이에 따라 광성돈대 일대의 어재연군은 전방으로부터는 미군 해상 지원부대의 강력한 8인치 함포사격을 받게 되었으며, 후방의 상륙부대로부터는 곡사포 공격을 받게 됨으로써 전후방 양면에서 협공을 당하는 진퇴양난의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포격이 시작된 지 두 시간이 못되어 광성진의 조선군 포대는 완전히 제압당하였고 광성진 보루도 거의 파괴되었다. 보루가 파괴되자 미군은 함포사격을 중지하고 돌격을 개시하여 파괴된 보루벽을 넘어 진내로 돌입하였다. 선두에서 공격하던 매키 중위가 조선군의 사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으나, 미군은 계속 돌진하여 양군 사이에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조선군은 탄약이 고갈되고 병기가 모자라자 돌과 심지어는 흙덩이까지 던지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전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마침내 중군 어재연과 천총 김현경(金鉉暻) 등 350여명의 장병들이 장렬한 최후를 마치자 광성진은 미군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살아남은 일부 장병들은 미군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거나 부상당한 몸으로 강화해협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어버렸다. 다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는 중상자 20여명만이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미군측은 3명의 전사자와 10여명의 부상자를 내는 가벼운 손실을 입는 데 그쳤다.

미군은 전투에서 승리는 하였으나 조선군의 결사적인 저항을 보고 서울까지 무력침공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광성진을 점령한 당일 밤 미군은 초지진으로 철수하였으며, 이튿날 상륙부대 전원은 초지진마저 포기하고 승선하여 강화도를 떠났다. 미군은 조선군 부상 포로를 인질 삼아 부평 앞바다에서 재차 조선측과 협상을 기도하였으나 조선의 강경한 거부로 실패하였다. 모든 방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군은 조선군 포로를 석방하고 7월 3일 회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