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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탐라(耽羅)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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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耽羅)전투

시대 : 고려
시기 : 1273년(원종 14)
전투지역 : 제주도 북제주군
전쟁상대국 : 몽고
관련유적 : 항파두리고성, 환해장성
상세내용

고려 원종 14년(1273)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제주도에서 삼별초군을 격파한 전투.

삼별초군이 제주를 장악한 것은 이미 1270년 진도를 근거지로 하고 있을 때부터였다. 삼별초군은 진도가 위기에 처할 경우 차후 거점 설정을 제주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도에 들어간 얼마 되지 않은 11월부터 제주를 공략하였던 것이다. 당시 제주에는 전라도 안찰사 권단의 지휘로 영암부사 김수가 2백의 군사와 현지민으로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삼별초의 위협이 커지자 장군 고여림(高汝霖)과 관군을 더 파병하여 약 1천 명 정도가 방어를 하고 있었다.

11월 3일 이문경의 지휘하의 삼별초군은 제주 명일포에 상륙하여 제주 동쪽 동제원에 머물렀다. 그리고 송담천(松淡川)에서 제주도 방어군을 공격하여 격멸시킨 후 조천포에 웅거하며 거점을 확보하였다. 그 뒤 삼별초군은 진도에서 패배를 하게 되자 제주도로 1271년 5월 김통정의 지휘하에 입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항파두의 내·외성, 해변 애월리의 성곽, 제주해안의 3백여 리에 걸친 장성을 쌓아 장차 닥칠지도 모를 고려와 몽고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큰 섬으로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고 독립성이 강한 지역이다. 또한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고려·남송·일본 3국의 연결점이라는 데서 특별한 지리적 의미가 있다. 특히 몽고에 있어서는 일본정벌의 전진기지로서 의의가 큰 곳이다. 후일 몽고에서 이곳을 일본정벌을 위한 군마 양성을 위한 목마장으로 이용하였던 점을 보아도 그 지리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1272년(원종 12) 11월 몽고는 일본 정복에 앞서 정지작업으로 제주 삼별초 세력에 대한 군사작전을 결의하였다. 여기에는 고려 주둔 둔전군 2천, 한군 2천에 특별히 무위군 2천을 추가하기로 하고 여기에 고려군 6천을 더하여 1만 2천의 병력을 동원키로 하였다. 그리고 수수(水手) 3천도 더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전라도 병선 160척의 함선이 배당되었다. 고려군의 지휘는 김방경, 몽고군의 지휘는 흔도·사추·홍다구가 맡았다. 군량은 경상도에서 동원되었다. 부대는 중·좌·우군으로 편성되었다. 출발장소는 나주시 반남면에서 1273년 4월 9일에 진행되었다. 고려와 몽고 연합군은 추자도에서 일단 정박한 뒤 본격적인 제주 공격에 나섰다.

중군은 항파두성에서 조금 떨어진 함덕포(제주에서 동쪽 31리)에 상륙하였다. 시간은 새벽 무렵이었다. 이 일대는 군항포, 귀일포, 애월포 등이 있는 곳으로 중군의 함덕포 공격은 항파두리의 삼별초군을 유인하여 병력을 분산시키고자 하는 양동작전의 의도가 있었다. 한편 삼별초군도 이곳의 지형지물과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바위 사이에 병력을 매복시켜 두고 있다. 이 무렵 좌군의 30척 병력은 항파두성에서 서북으로 약간 떨어진 비양도를 교두보로 하여 한림 해변으로 상륙하였다. 이 사이 항파두성에서 서쪽 40여 리 지점의 비양도로 들어 온 좌군은 삼별초의 지휘부를 공격하였다. 좌군의 전함 30척이 들이 닥치자 삼별초군은 바람에 날리듯 자성(子城)으로 밀려났다. 관군은 외성을 넘어 가 불화살(火矢) 4발을 쏘니 화염이 충천하여 삼별초군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중군 또한 함덕포에서 삼별초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중군은 풍랑이 멎자 함덕포로 들어갔다. 이때 바위 사이에 매복하고 있었던 삼별초군은 소리치며 뛰어나와 이들을 저지하였다. 김방경은 모두 배를 타고 함께 가도록 독려하였다. 대정 고세화가 삼별초군에 선봉으로 접근하였다. 이에 사졸들이 그 뒤를 따랐고, 장군 나유가 정예군을 이끌고 뒤따라 잔적을 소탕하였다. 김방경 등이 삼별초의 최후거점인 항파두성에 들어가 항복을 받고 제주 삼별초군은 공식적으로 진압한 때는 4월 28일이다. 4월 9일 나주 반남현에서 출발하여 4월 28일에 완전 진압에 성공한 것이다.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삼별초군은 마침내 진압되었다. 이때 삼별초군은 크게 두 지휘부로 갈라져 있었다. 김통정을 중심으로 70여 명은 한라산 기슭에서 계속 항거하였고, 이순공·조시적 등은 투항하였다. 성을 장악한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은 지휘부의 김윤숙 등 6인은 공개처형하고 나머지 35명은 포로로 삼아 돌아오던 중 나주에서 참수하였다. 사졸 중 항복한 1,300명은 포로로 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제주도에는 흔도 휘하에 있던 몽고군5백명, 그리고 개경측의 장군 송보연, 중랑장 강사신, 윤형으로 경군 8백에 외별초 2백 등 여몽군 1천 5백을 잔류하게 하였다. 삼별초 잔여세력 소탕과 치안유지가 목적이었다. 윤 6월에는 자결한 김통정의 시신을 확인하였고 삼별초의 장군 김혁정, 이기 등 70여 명도 수색 체포되어 몽고군의 홍다구에게 보내져 처형되었다.

김방경은 시중에 임명되었고, 변윤은 판추밀원사, 김서은 상장군 지어사대사, 그리고 나유와 송보연은 대장군에 올랐다. 제주에는 몽고의 다루가치가 파견되었고 6월에 몽고에서 탐라국초토사가 파견되고 총관부가 되어 직접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1274년 몽고는 일본원정에 나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