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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웅주성(雄州城)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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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주성(雄州城)전투

시대 : 고려
시기 : 1108년(예종 3) 2월 11일~5월 초순
전투지역 : 함남 길주군 동해면 웅주성
전쟁상대국 : 여진
관련유적 : 여진족성터, 다신산성터
상세내용

고려 예종 3년(1108)의 여진정벌 전쟁 중 웅주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

1107년(예종 2) 윤관과 오연총이 이끄는 총병력 17만의 여진정벌군은 12월 13일 정주성 관문 정면의 여진군을 패퇴시킨 후 여진족의 촌락 125개소를 소탕하여 적병 3,740여명을 격살하고 1,030여명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윤관은 여진으로부터 탈취한 지역에 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함주(咸州)·공험진(公嶮鎭) 등 여섯 고을을 설치하고 성곽을 축조하였다. 고려가 여진의 거주지역을 직할령으로 삼아 통치력을 강화하자 1108년 1월 완옌부 여진은 잃은 땅을 되찾기 위하여 남침을 개시하였다. 영주성에서 고려군에 일격을 가한 여진군은 2월 11일 수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웅주성을 포위하였다. 웅주성은 현 길주군 동해면에 있는 다신산성터로 추정되는데, 두만강으로부터 동해안을 따라 고려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여진군은 고려군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자신하여 웅주성을 일거에 공략하기 위하여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공세를 가하였다. 병마판관 최홍정은 여진군의 방심을 틈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여진군의 포위공세가 장기화됨에 따라 군량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지원도 끊어진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척준경은 야음을 틈타 여진군의 포위망을 뚫고 정주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여 다시 웅주성에 도착, 여진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성의 위기를 구원하였다. 웅주성 공격에 실패한 여진군은 영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두만강 밖으로 잠시 물러난 여진은 4월 8일 다시 대군을 이끌고 웅주성 주변 일대에 목책을 세워 웅주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웅주성의 병마별감 임언과 병마판관 최홍정을 비롯한 고려 군민들은 여진군의 공격에 맞서 힘껏 싸웠으나 공방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점차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4월 23일 웅주성이 위급하다는 급보에 접한 고려 조정에서는 오연총을 지휘관으로 한 1만여 명의 증원군을 급파하였다. 고려의 증원군이 웅주성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여진군은 병력의 일부를 오음지령(烏音志嶺)과 사오령(沙烏嶺)에 배치하여 고려군의 전진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려군은 이곳에서 여진군과 두 차례에 걸친 격전을 벌여 482명의 적병을 참살하고 파죽지세로 진격을 거듭하여 웅주성을 포위하고 있는 여진군의 배후 지역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전후 양면에서 고려군의 협공을 받게 된 여진군은 그들이 구축해 놓은 목책과 각종 장비를 소각하고 퇴각을 단행하였다.

웅주성 전투에서 패각한 여진군은 이후에도 길주·영주·함주 일대에서 소규모의 전투를 빈번하게 벌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자 고려 동북계에 대한 무력 침공을 포기하고 고려에 화의를 제기하였다. 고려 역시 여진과 전쟁을 계속하면서 막대한 군비를 소모하는 것보다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화의를 수락함으로써 고려와 여진 사이에는 일단 평화가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