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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귀주성(龜州城)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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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성(龜州城)전투

시대 : 고려
시기 : 1231년(고종 18) 9월 3일~1232년 1월
전투지역 : 평북 구성군 귀주성
전쟁상대국 : 몽고
관련유적 : 귀주성, 정공사(旌功祠, 박서·김경손의 사당)
상세내용

고려 고종 18년(1231) 귀주성에서 몽고군과 고려군 사이에 4개월간 벌인 전투.

1231년 8월 10일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의주)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낸 몽고의 원정군은 함신진을 교두보로 하여 군대를 남로군·북로군·본군의 3개로 재편하고, 남진을 계속하였다. 이때 청천강을 넘어 안북부로 진출하기로 하였던 북로군은 삭주의 선덕진을 점령한 후 9월 3일 귀주성으로 진출하였는데, 당시 귀주성에는 귀주병마사 박서가 5천여 병력을 거느리고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9월 3일 새벽을 기하여 공격에 들어간 몽고군에 대해 병마사 박서는 김중온의 삭주부대를 성의 동면에, 김경손의 정주부대를 성의 남면에 배치하고, 자신은 북문의 수비를 담당하고, 안북부와 위주·태주 등지에서 집결한 별초군 250여명을 성의 3면에 분산 배치하였다. 전투 초기 몽고군의 거센 공격에 고려군의 사기가 위축되자 정주분도장군 김경손은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고군 대열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몽고군을 교란시켰고, 이 기회를 틈타 성 안의 고려군이 일제히 성문을 열고 달려나가 몽고군을 공격하자 몽고군은 뿔뿔히 흩어져 퇴각하였다.

이후 보름 가량 소강상태를 보였던 몽고군은 10월 20일 다시 귀주성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몽고군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한때 동문의 수비가 뚫리면서 몽고군이 성 안에 돌입하기도 하였으나, 고려군의 민첩한 대응으로 다시 몰아낼 수 있었다.

11월 22일 몽고군은 귀주성에 대한 세 번째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후 몽고군은 12월 17일까지 20여일간 정찰기병으로 귀주성 주변의 요로를 장악하여 고려군의 통태를 탐지하면서 소규모의 파상공세를 계속하다가 12월 17일 다시 전면적인 공격을 취하였다. 이에 고려군은 오히려 신서문(新西門)을 열고 3백여 명의 정예병을 출격시켜 남문을 공격하는 몽고군의 측방을 공격하여 몽고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처럼 고려군과 몽고군이 귀주에서 대접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인 10월부터 고려 조정과 몽고군 사이에서는 강화교섭이 추진되기 시작하여 12월 중순에는 강화가 타결될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몽고군은 고려와 몽고 사이에 이미 강화교섭이 진행되고 있음을 통보하고 항복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박서·김경손 등은 항전태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양국간에 강화가 성립되고 나서도 귀주성의 고려군은 항복을 완강히 거부하자, 몽고군은 12월 하순부터 이듬해(1232년) 1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귀주성을 재차 공격하였으나 끝내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고려 조정에 사신을 보내 ‘귀주성이 항복하지 않으면 강화는 파기될 수밖에 없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1232년(고종 19) 1월 초 후군지병마사(後軍知兵馬使) 최임수를 귀주로 보내 정식으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최임수의 간곡한 설득으로 박서는 왕명을 끝까지 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몽고군에 항복하였다.

귀주성전투는 4개월이라는 비교적 오랜 시일에 걸쳐 온갖 공성 방법과 수성 방법이 동원하여 격렬한 공방전을 벌린 보기 드문 전투였다. 몽고군은 당초의 계획대로 귀주성을 단시일내에 점령하지 못하고 원정군의 3분의 1이 넘는 북로군 1만여명이 무려 4개월 동안이나 귀주성에 발이 묶임으로써 그들의 작전은 전반적으로 큰 차질을 빚었다. 이때 몽고의 남로군은 황주 남쪽까지 진출하였으나 북로군이 귀주에 묶여 있었으므로 불안을 느낀 나머지 다시 청천강 이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려군은 그만큼 몽고군의 행동을 제약하여 피해를 줄일 수 있었고, 강화교섭에서도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