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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유구(琉球)정복전투

유구(琉球)정복전투

* 시 기 : 1609.3.-4
* 전투지역 : 가고시마현 아마미 제도, 오키나와현 일대
* 관련인물 :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도쿠가와 이에야스 / 쇼네이(尙寧)
* 관련유적 : 슈리성, 나키진성터


1609년 규슈(九州) 남부에 위치한 사츠마(薩摩)번이 총 3000여 명, 100여 척의 군선을 파견하여 독립왕국인 유구를 정복했던 사건.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권력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은 에도(江戶, 현 도쿄)에 막부를 설치하고 각 번을 강력히 통제하는 막번제 국가를 수립했다. 16세기 중엽 이래 단절되어 있던 명과의 국교 회복을 대외기본정책으로 삼은 도쿠가와 정권은 유구를 대명교섭의 창구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이에야스는 사츠마번을 통하여 유구에게 빙례사(聘禮使)의 파견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구측이 이에 응하지 않자, 빙례사 파견 문제는 유구와 사츠마번 사이의 정치문제로 부상했다.
15세기 쇼씨(尙氏)에 의해 통일왕조가 수립된 유구는 아마미(奄美) 제도로부터 야에야마(八重山) 제도에 이르는 영토에 국가제도를 정비, 명과의 대외무역으로 번성하고 있었다. 유구측은 중국과 조공관계에 있고,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1606년 6월 사츠마 번주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는 유구의 무례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이에야스에게 유구 출병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여 수락되었다.

1609년 3월 4일 총 3000여명, 100여척의 군선이 사츠마번 출발하여 오시마(大島), 도쿠노시마(德之島), 요론토(與論島), 오키노에라부토(沖永良部島) 등의 섬을 차례차례로 평정한 다음 3월 26일 유구의 운텐(運天)항에 상륙하였다. 이때 운텐항 동쪽 해발 100m 고지에 있던 나키진(今歸仁)성에서 성을 지키던 감수(監守)는 5백 명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사츠마군은 나키진 지역 일대 산야에 불을 지르는 작전을 구사하여 성도 소실되었다. 감수(監守)는 분전하며 항전하였으나 중상을 입고 포로로 잡히고, 군대도 도망가게 된다. 이때 나키진군의 전사자는 32명이었다.

이후 사츠마군은 우라소에(浦添)에 도착, 여기서 육지와 바다로 나뉘어 유구의 수도인 슈리(首里)성을 향해 진격해갔다. 육로군은 우라소에를 통과하면서 약탈·방화을 자행하였고, 이에 각지의 유구 관인들이 주민들을 이끌고 항전하였지만 사츠마군에 진압되었다. 사츠마군은 4월 1일 슈리성에 도착하여 유구왕 쇼네이(尙寧)는 조총부대를 주축으로 한 사츠마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성을 나와 강화를 청하게 된다. 4월 5일 슈리성을 접수하였는데 이 유구 정복전에서 사츠마군의 전사자는 총 300명이었다. 7월 7일 이에야스는 유구정복을 이룬 사츠마 번주에게 유구 지배권을 주게 된다. 사츠마번은 아마미 제도를 빼앗아 번 영지를 확대시키고, 나머지 유구섬 이하의 지역만을 유구왕국령으로 하였다. 더불어 사츠마번에 대한 공납을 정하고, 유구의 무역권을 사츠마번 관할 하에 두게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구왕국은 중국과 책봉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사츠마번의 속령이 되어, 일본 막번체제에 편입하게 되었다. 명치유신 후 일본정부의 유구처분 결과, 유구왕국령은 1879년 오키나와현으로 성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