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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사츠마·영국전쟁(薩英戰爭)

사츠마·영국전쟁(薩英戰爭)

* 시 기 : 1863년 6월 28일 - 7월 4일
* 전투지역 : 일본 가고시마현 남부 가고시마만(灣)
* 관련인물 :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큐퍼 (Augustus Kuper)제독


1863년 나마무기(生麥)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영국함대와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웅번인 사츠마(薩摩)번 사이의 전투

1858년 일본에서는 천황의 칙허 없이 서양열강과 통상조약을 맺은 막부를 격렬히 비난하는 존왕양이론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츠마번은 막부의 개혁을 주장하며 막부를 지원하고자 했다. 1862년 사츠마번 일행은 조정의 칙사를 수행하여 에도(江戶)에 가서 막부의 개혁을 이루게 하는 임무를 완수한 후, 교토(京都)로 돌아가는 도중 나마무기 촌(현 요코하마)에 이르렀을 때 영국상인 일행(남자 3명, 여자 1명)을 만나게 된다. 영국상인 일행은 다이묘 행렬시 지켜야할 법도를 모르고 말에 탄 채 그대로 통과하고자 했다. 이때 분노한 사츠마번 무사가 영국인 일행을 칼로 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나마무기 사건이다.

이에 격노한 영국 측은 막부에 대해서 공식사과서와 배상금을, 사츠마번에 대해서는 범인처벌과 배상금을 요구하여 막부는 이에 응했지만 사츠마번은 잘못은 영국상인들에게 있다 하여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 측은 사츠마번에 큐퍼 제독이 이끄는 함대 7척을 파견하여 그 위세로 사츠마번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사츠마번에서는 영국 함대가 1863년 6월 28일 카고시마 만에 나타나자 각 포대에 인원을 배치하고 식량·탄약 등을 보급하는 등 총동원을 꾀했다.

가고시마 만 중앙에는 사쿠라 섬이 위치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사츠마번 중심도시(城下町)가 있어 포대는 이 양 연안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다. 사츠마번은 10개의 포대에 83문의 포를 배치하고 있었다. 6, 8, 12, 18, 24, 36, 80 파운드의 포와 150파운드의 유탄포 등 다양한 포들을 갖추고 있었지만 사정거리가 1km정도인 구식포이었다(단 시가지 연안포대와 사쿠라섬 포대 사이는 4km 정도였다). 이외 사츠마번은 외국으로부터 구입한 3척의 기선도 있었다. 한편 영국 측은 7척의 군함에 101문의 포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 중 22문은 사정거리 4km에 달하는 최신식의 암스트롱포였다.

처음에는 서간을 통한 교섭이 진행되었는데 성과가 없자 영국측은 7월 2일 사쿠라섬에 정박중이던 사츠마번 기선 3척을 나포하여 교섭을 위한 담보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사츠마번의 지휘관 오쿠보 도시미치는 각 포대에 일제 사격을 명령하게 되었다. 전투경과를 보면 악천후 속에서 사츠마번의 선제공격으로 함대 두척에 경미한 피해를 본 영국 측은 전열을 가다듬고 날씨가 회복됨에 따라 집성관 공장과 포대를 공격했다. 이 포격전 중 사츠마번은 사정거리에 들어온 영국함대의 기함을 집중 공격하여 함장을 포함한 63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츠마번의 자랑스런 전과였다. 이에 비해 사츠마번에서는 7월 2일 하루 만에 나포된 기선 3척이 불타버리고 포대 8할이 파괴되었으며, 집성관과 시가지 1할이 불타버렸다. 7월 3일에도 양측간의 포 공격이 있은 뒤 7월 4일이 되자 영국함대는 선체 수리, 석탄·탄약·식량의 보급을 위해 가고시마만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가고시마만에서의 전투는 끝이 난다. 영국함대가 철수한 지 4개월 후인 11월 양측은 강화를 맺어 사츠마번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범인색출을 약속하게 된다.

이 전쟁은 일본인들에게 무모한 양이 전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통감시키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한편 이 전쟁으로 영국측은 사츠마번의 실력을 평가하게 되고, 사츠마번은 군비의 근대화를 통감하게 되어 오히려 양측은 우호관계가 깊어지게 되었으며, 이 전쟁이후 사츠마번 내 하급무사 세력이 대두하여 막부타도운동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또 이 전쟁으로 사츠마번 무사들에게 해군력의 중요함을 통감케하여 명치유신 후 일본해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약케 하는 등 막부말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