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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도바·후시미(鳥羽·伏見)전투

도바·후시미(鳥羽·伏見)전투

* 시 기 : 1868년 1월 3일~5일
* 전투지역 : 교토(京都)시 도바·후시미 지역
* 관련인물 :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 관련유적 : 소지교(小枝橋,사에다바시), 성남궁(城南宮,죠난구, 神社), 요도성(淀城)


왕정복고에 의해 성립한 신정부가 저항하는 구 막부세력을 평정하고 통일국가의 기틀을 다진 무진(戊辰)전쟁의 시발이 되었던 전투

1867년 10월 14일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통치권을 조정에 반납, 막부 정치는 끝이 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신정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토막파의 주도 하에 요시노부의 관위사퇴와 영지몰수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요시노부는 교토에서 오사카성으로 철수하여 주도권 회복을 노리다 드디어 토막파 토벌을 명분으로 교토 진격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무진전쟁의 시작이다.

1868년 1월 2일 막부측은 프랑스식 훈련을 받은 막부병 5000, 아이즈(會津)번병 3,000, 구와나(桑名)번병 1,500을 주력으로 한 15,000명의 군사를 도바·후시미로 북상시켰다. 이에 맞서 토막군은 도바에서 후시미까지 일직선상으로 진을 쳤다. 토막군은 사츠마번, 죠슈(長州)번병에 도사(土佐)번병 300명을 합쳐도 4,5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 수적으로는 막부군이 3배 이상 우세하였다. 막부군 지휘자는 이러한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군대를 분산시켜 교토에 진격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병력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지휘를 받는 사츠마, 죠슈번이 이미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도바·후시미로 진군토록 하는 졸렬한 전술을 취했다.
1868년 1월 3일 막부군이 도바쪽에서 교토로 진입하는 다리 부근에서 진을 치고 있던 사츠마군을 무력으로 돌파하려고 하자, 이 부근의 낮은 구릉에 설치되어 있던 사츠마군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시작되어, 이로써 도바·후시미전투가 시작되었다. 막부군이 숫적 우위를 믿고 무리하게 일본도와 창을 들고 돌격하는 전술을 반복했던 데 비해, 사츠마, 죠슈군은 대포로 선제공격하고 막부군이 돌격해오면 소총으로 격퇴시키는 전술을 택해, 전투의 주도권을 잡았다. 막부군은 사기는 높았지만, 이처럼 전술이 형편없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1월 4일, 막부군은 전날의 패배로 전선 후방에 위치한 요도(淀)번의 요도성에 퇴각해 있었는데, 이날은 안개 낀 날씨로 인하여 대포공격을 피할 수 있어서 도바 방면의 막부군은 선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후시미 방면은 포격을 당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더욱이 지휘관이 작전회의란 명목으로 교전 중 요도성으로 빠져나가 전선의 막부군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이처럼 전 전선을 파악하고 있는 지휘관이 없어 막부군은 병력을 유용하게 활용하지 못하고 토막군의 총공격에 후퇴하게 된다.
1월 5일, 천황의 군대란 표시인 금기(錦旗)가 도바 방면 토막군에 도착하여 토막군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게다가 막부군은 우군이라 믿었던 쓰(津)번으로부터 측면공격을 당하고, 요도번의 협조 거부에다 지휘계통도 붕괴되어 장병들은 오사카로 도주했다. 오사카성에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장병들이 도망해 오는 것을 보고 6일밤 몰래 군함을 타고 에도로 돌아갔다. 이로써 도바·후시미전투는 토막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게 된다.

막부군은 수적 우위뿐 아니라 군사장비 면에서도 결코 토막군에 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계통의 붕괴, 무리한 전술로 인하여 사기는 떨어지고 전투에서 패하게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신정부내 무력토막파는 주도권을 확립되게 되었으며 1월 7일에는 천황의 이름으로 요시노부 추토령(追討令)이 내려지게 된다. 이에 양쪽 사이에서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기회만 엿보던 서쪽의 번들과 오사카의 호상들은 신정부를 지지하게 되어 무진전쟁에서 신정부군이 위력을 발휘하는 토대를 확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