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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홍대용

此器之出我東。未知何時。而其以土調解曲。始于洪德保。乾隆壬辰六月十八日。余坐洪軒。酉刻立見其解此琴也。槪見洪之敏於審音。而雖小藝。旣系刱始。故余詳錄其日時。其傳遂廣。于今九年之間。諸琴師無不會彈

이 악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연대가 언제인지 알 수는 없고 토조로 해곡한 것은 홍덕보로부터 비롯되었으니 건륭 임진년 6월 18일이다. 나는 덕보의 서재인 담헌에 앉아서 유시에 해곡하는 것을 보았다. 덕보가 얼마나 심음에 예민한지 그때 보았으니 해곡이 비록 조그만 기예지만 창시에 해당되기 때문에 내가 굳이 그 일시를 상세히 기억하는ㄱ 이다. 양금을 연주하는 법이 그로부터 널리 전해져서 지금까지 9년 사이에 금사들은 누구나 그것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박지원 <동란섭필>

二十二日。與麯翁步至。湛軒,風舞夜至。湛軒爲瑟。風舞琴而和之。麯翁不冠而歌。夜深流雲四綴。暑氣乍退。絃聲益淸。左右靜默。如丹家之內觀臟神。定僧之頓悟前生。夫自反而直。三軍必往。麯翁當其歌時。解衣磅礴。旁若無人者梅宕。甞見簷間。老蛛布綱。喜而謂余曰。妙哉。有時遲疑若有思也。有時揮霍若有得也。如蒔麥之踵。如按琴之指。今湛軒與風舞相和也。吾得老蛛之解矣。去年夏。余甞至湛軒。湛軒方與師延論琴。時天欲雨。東方天際雲色如墨。一雷則可以龍矣。旣而長雷去天。湛軒謂延曰。此屬何聲。遂援琴而諧之。余遂作天雷操。

스무이튿날 국옹(麯翁)과 함께 걸어서 담헌(湛軒)의 집에 이르렀다. 풍무(風舞)3가 밤에 왔다. 담헌이 가야금을 타니, 풍무는 거문고로 화답하고, 국옹은 맨상투 바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밤이 깊어 떠도는 구름이 사방으로 얽히고 더운 기운이 잠깐 물러가자, 줄에서 나는 소리는 더욱 맑게 들렸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어 마치 단가(丹家)가 장신(臟神)을 내관(內觀)하고 참선하는 승려가 전생(前生)을 돈오(頓悟)하는 것 같았다. 무릇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삼군(三軍)이라도 반드시 가서 대적한다더니, 국옹은 한창 노래 부를 때는 옷을 벗어젖히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품주이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여겼다.
매탕(梅宕)이 언젠가 처마 사이에서 왕거미가 거미줄 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나에게 말하기를,

“절묘하더군요! 때로 머뭇거리는 것은 마치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고, 때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으며, 파종한 보리를 발로 밟아주는 것과 같고, 거문고 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과도 같습디다.”
하더니, 지금 담헌이 풍무와 어우러져 연주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왕거미의 행동을 깨우치게 되었다.
지난해 여름에 내가 담헌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담헌은 한창 악사(樂師) 연(延)주과 함께 거문고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때마침 비가 올 듯이 동쪽 하늘가의 구름이 먹빛과 같아, 천둥소리 한 번이면 용이 승천하여 비를 부를 수 있을 듯싶었다. 이윽고 긴 천둥소리가 하늘을 지나가자, 담헌이 연(延)더러

“이것은 무슨 성(聲)에 속하겠는가?”
하고서, 마침내 거문고를 당겨 그에 맞추어 조율하니, 나는 드디어 천뢰조(天雷操)를 지었다.

박지원 <하야연기>

風琴
余友洪德保甞論西洋人之巧曰。我東先輩若金稼齋,李一菴。皆見識卓越。後人之所不可及。尤在於善觀中原。然其記天主堂。則猶有憾焉。此無他。非人思慮所到。亦非驟看所可領略。至若後人之繼至者。亦無不先觀天主堂。然恍忽難測。反斥幽恠。是眼中都無所見者也。稼齋詳于堂屋畵圖。而一菴尤詳于畵圖儀器。然不及風琴。葢二公之于音律。不甚曉解。故莫能彷彿也。余雖耳審其聲。目察其制。然又文不能盡其妙。是爲大恨也。因出稼齋所記共觀焉。堂之東壁。有二層朱門。而上二扉下四扉。次第開之。其中有筒如柱如椽者簇立。大小不一而皆金銀雜塗之。其上橫置鐵板。其一邊鎖穴無數。一邊如扇形。刻方位及十二時。俄見日影到其方位。則臺上大小鍾。各撾四聲。中央大鍾。撾六聲。鍾聲纔止。東邊虹門內。忽有一陣風聲。如轉衆輪。繼以樂作。絲竹管絃之聲。不識從何而來。通官言此中華之樂。良久而止。又出他聲。如朝賀時所聽。曰。此滿州之樂也。良久而止。又出他曲。音節急促。曰。此蒙古之樂也。樂聲旣止。六扉自掩。西洋使臣徐日昇所造云。稼齋記止此。德保讀已大笑曰。是所謂語焉而不詳也。中有筒如柱如椽者。鍮鑞爲管。其最大之管如柱椽。簇立參差。此演笙簧而大之也。小大不一者。取次律而加倍之。隔八相生如八卦之變。而爲六十四卦也。金銀雜塗者。侈其外也。忽有一陣風聲如轉衆輪者。爲地道宛轉相通而皷槖以達氣如口吹也。繼以樂作者。風入城道。輪囷輥輾而簧葉自開。衆竅噭噪也。其皷槖之法。聯五牛之皮。柔滑如錦袋。以大絨索懸之樑上如大鐘。兩人握索奮躍。懸身若掛帆狀。以足蹋槖。槖漸蹲伏。而其腹澎漲。虛氣充滿。驅納地道。於是按律掩竅。則無所發洩。乃激金舌。次第振開。所以成衆樂也。今吾略能言之。而亦不能盡其妙。如蒙國家發帑命造。則庶幾能之云。德保所談止此。今吾入中國。每思風琴之制。日常憧憧于中也。旣自熱河還入燕京。卽尋天主堂。宣武門內。東面而望。有屋頭圓如鐵鐘。聳出閭閻者。乃天主堂也。城內四方。皆有一堂。此堂乃西天主也。天主者。猶言天皇氏盤古氏之稱也。但其人善治曆。以其國之制。造屋以居。其術絶浮僞。貴誠信。昭事上帝爲宗地。忠孝慈愛爲工務。遷善改過爲入門。生死大事。有備無患爲究竟。自謂竆原溯本之學。然立志過高。爲說偏巧。不知返歸於矯天誣人之科。而自陷于悖義傷倫之臼也。堂高七仞。無慮數百間。而有似鐵鑄土陶。皇明萬曆二十九年二月。天津監稅馬堂。進西洋人利瑪竇方物及天主女像。禮部言。大西洋不載會典。其眞僞不可知。宜量給衣冠。令還本土。勿得潛住京師。不報。西洋之通中國。葢自利瑪竇始也。堂燬于乾隆己丑。所謂風琴無存者。樓上遠鏡及諸儀器。非倉卒可究。故不錄。追思德保所論風琴之制。悵然爲記。


내 친구 홍덕보(洪德保)는 일찍이 서양 사람들의 기교를 논하면서,

“우리나라의 선배들로 김가재(金稼齋)와 이일암(李一菴)같은 이들은 모두 식견이 탁월하여 후세 사람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바요, 더구나 중국을 옳게 본 데도 쳐줄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천주당(天主堂)에 대한 기록들은 약간의 유감이 없지 않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으로는 잘 미칠 수 없는 것이고, 또 갑자기 얼핏 보아서는 알아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뒷날 계속해서 간 사람들에게 이르러서는 역시 천주당을 먼저 보지 않을 자가 없지마는 황홀 난측하여 도리어 괴물 같이만 알고 이를 배척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안중에 아무 것도 보지를 못한 까닭이다. 가재는 건물이나 그림에만 상세하였고, 일암은 더욱이 그림과 천문 관측의 기계에 자세하였으나 풍금(風琴) 이야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대체로 이 두 분이 음률에 이르러는 그리 밝질 못했으므로 잘 분별을 못했던 것이다. 내가 비록 귀로 소리를 밝게 들었고 눈으로 그 만든 솜씨를 살폈다 하더라도 이를 다시금 글로써 그 오묘한 곳을 다 옮길 수는 없고 보니 정말 이것이 유감스러운 일로 되었던 것이다.”
하면서, 곧 가재의 기록을 끄집어내어 나와 함께 보았다.

“방안 동편 벽에는 두 층계의 붉은 문이 달렸는데 위에는 두 짝이요, 아래에는 네 짝이다. 순차로 열리면서 그 속에는 기둥이나 서까래처럼 생긴 통(筒)이 총총하게 섰는데, 크기가 같지 않았다. 모두 금은빛으로 섞어 칠을 발랐고, 그 위에는 철판을 가로 놓고 그 한쪽 가에는 수없이 구멍을 뚫고 다른 한쪽 가에는 부채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방위와 12시(時)의 이름을 새겼다. 잠시 보니, 해 그림자가 그 방위에 이른즉 대 위에 놓인 크고 작은 종(鍾)이 각각 네 번씩 울고 복판에 있는 큰 종은 여섯 번을 쳤다. 종소리가 잠시 그치자 동쪽 변두리 홍예문(虹霓門) 속에서 갑자기 바람 소리가 쏴 하면서 여러 개의 바퀴를 돌리는 것 같았는데 계속해서 관ㆍ현ㆍ사ㆍ죽 등의 별별 음악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부터 이 소리가 나는지 알 수 없다. 통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 음악입니다.’ 한다. 얼마 아니되어서 소리는 그치고 또 다른 소리가 나는데 조회 때 들은 음악 소리와 같이 들렸다. 이는 ‘만주 음악입니다.’ 한다. 조금 있다가 이 소리도 그치고 또 다시 다른 곡조가 들리는데 음절이 촉급하였으니, ‘이는 몽고 음악입니다.’ 한다. 음악 소리가 뚝 그치고는 여섯 짝 문이 저절로 닫혔다. 이는 서양 사신 서일승(敍日昇)이 만든 것이라 한다.”가재의 기록이 여기에 이르러서 그쳤다.
덕보는 다 읽고 나서 한바탕 크게 웃으면서,

“이야말로 이야기는 하면서도 자세하진 못하다는 말이구료. 속에 기둥이나 서까래처럼 생겼다는 통은 유기로 만들었는데 제일 큰 통은 기둥이나 서까래만큼씩 하여 크고 작게 총총하게 섰는데 이는 생황(生黃) 소리를 내기 위하여 크게 한 것이다. 크기가 같지 않은 것은 다음 틀을 취하여 곱절로 더 보태고 8율(律)씩 띄어 곧장 상생(相生)케 하여 8괘(卦)가 변하여 64괘(卦)가 되는 것이나 같다. 금은 빛을 섞어 바른 것은 거죽을 곱게 보이기 위함이요, 갑자기 한 줄기 바람 소리가 여러 개 바퀴를 돌리는 소리 같이 난다는 것은 땅골로부터 구불구불 서로 마주 통한 데서 풀무질을 하여 입으로 바람을 불 듯이 바람 기운을 보내는 것이요, ‘연방 음악 소리가 났다.’는 것은 바람이 땅골을 통하여 들면 바퀴들이 핑핑 재빨리 돌아 생황 앞이 저절로 열리면서 뭇 구멍에서 소리가 나게 된다. 풀무 바람을 내는 법식은 다섯 마리의 쇠가죽을 마주 붙여서, 부드럽기는 비단 전대처럼 만들고, 굵은 밧줄로 들보 위에 큰 종처럼 달아 매어서 두 사람이 바를 붙잡고는 몸을 치솟구어 배 돛대를 달듯 몸뚱이가 매달려 발로 풀무 전대를 밟으면 풀무는 점차 내려 앉으면서 바람주머니배는 팽창되어 공기가 꽉 들어찬다. 이것이 땅골로 치밀려 들면서 이때야 틀에 맞추어 구멍을 가리우면 어디고 바람은 새지 않고 있다가 쇠 호드기 혀를 부딪쳐서 순차로 혀는 떨려 열리면서 여러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대강 이렇게 말할 수 있으나 역시 그 오묘한 데를 다 말할 수는 없다. 만일에 국가에서 돈을 내어 이것을 만들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될 법도 하지.”덕보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하였다. 이제 내가 중국에 들어와서 풍금 만드는 법식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마음속에 잊히지 않았다. 이미 열하로부터 북경으로 돌아와 즉시로 선무문(宣武門) 안 천주당을 찾았다. 동쪽으로 바라다 본즉 지붕 머리가 종처럼 생겨 여염 위로 우뚝 솟아 보이는 것이 곧 천주당이었다. 성내 사방에서는 다 한 집씩 있는데 이 집은 서편 천주당이다. 천주라는 말은 천황씨(天皇氏 중국 전설에 나오는 최초의 임금)니 반고씨(盤古氏 중국 전설에 나오는 최초의 임금)니 하는 말과 같다. 이 사람들은 역서(曆書)를 잘 꾸미며 자기 나라의 제도로써 집을 지어 사는데, 그들의 학설은 부화(浮華)함과 거짓을 버리고 성실을 귀하게 여겨 하느님을 밝게 섬김으로써 으뜸을 삼으며, 충효와 자애로써 의무를 삼고,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는 것으로써 입문(入門)을 삼으며, 사람이 죽고 사는 큰 일에 준비를 갖추어 걱정을 없애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저들로서는 근본되는 학문의 이치를 찾아 내었다고 자칭하고 있으나 뜻한 것이 너무 고원하고 이론이 교묘한 데로 쏠리어 도리어 하늘을 빙자하여 사람을 속이는 죄를 범하여 제 자신이 저절로 의리를 배반하고 윤상을 해치는 구렁으로 빠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천주당 높이는 일곱 길은 되고 무려 수백 칸인데 쇠를 부어 만들거나 흙을 구워 놓은 것만 같았다. 명(明)의 만력(萬曆) 29년(1601년) 2월에 천진감세(天津監稅) 마당(馬堂)이 서양 사람 이마두(利瑪竇)의 방물과 천주 여상(女像)을 바쳤더니 예부(禮部)에서 이르기를,

“대서양(大西洋)이란 회전(會典)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참인지 거짓인지 알 길이 없으니, 적당히 참작해서 의관을 내려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몰래 북경에 숨어 있지 못하도록 하라.”
하고는, 황제에게는 보고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서양이 중국과 서로 통한 것은 대체로 이마두부터 시작되었다. 건륭(乾隆) 기축년(1769년)에 천주당이 헐렸으므로 소위 풍금이란 것은 남은 것이 없었고, 다락 위의 망원경과 또 여러 가지 표본기들은 창졸간에 연구할 수 없으므로, 여기 기록하지 않는다. 이제 덕보의 풍금 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추억하면서 서글픈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박지원 <천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