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송회녕

송회녕, 석을산

乙巳九月初七日乙卯。子容,正中。匹馬短童。訪余于開城府板門奴舍。丙辰朝明。因與子容,正中發板門。行五六里出大路。過天水院。登天水亭。仰讀中樞李公苪亭記。達城徐公居正,判書李公承召,侍中洪公彥博等詩。皆和舍人崔斯立詩也。讀訖還下亭。渡橐駝橋。橋乃王太祖却契丹所獻橐駝之所。又過靑郊驛開國寺。寺但有基。基有華表二,長明燈一。入水口門。登夜橋路上。行至南大門外。見路傍菊花十餘叢紅黃紫白。爛熳齊開。余坐賞良久。還訪百源所寓之家。爲行路人所誣。誤抵他洞。艱難得達其家。百源與叔亨佇待余輩。及其至。大喜。仍請開城老人韓壽者。壽頗知前朝故迹。百源請爲嚮導。歸訪花園。所謂八角殿。但有故基。余去十年前到此。則八角摧朽不掇矣。今則無復存者。而殿礎傍。有梨樹準人長矣。殿北傍。有古石積立。石上有丹楓樹。辛禑時所種也。昂藏老根。盤在石間。頗有古態。韓壽引余輩坐殿基上。談前朝古事。亹亹不厭。移時去花園。東入故都評議司。讀三峯鄭道傳所撰碑。乃辛禑時所創也。又東出越土嶺路半里許。左入太廟洞。韓壽指洞口樓礎曰。此鄭侍中夢周爲高勵輩所擊殺處也。引余輩入洞小許。指一小屋曰。此侍中故宅也。余等坐門前。慷慨弔古。俄上龍巖寺。寺一名巖房。樹木參天。大至數圍。下有大巖橫斜。落葉被石。壽引余等坐石上。俯視平地。眼界甚闊。坐玩良久。壽曰。此我太祖回軍時駐蹕之地。巖後。有土城回曲如片月形。所謂內城者也。壽曰。太祖御國之翌年癸酉。築此城以隔絶王氏故居者。壽又引正中,百源等入寺中。示所謂十二行年佛者。子容拜佛四度。已而還出。與余上北岡藉艸坐。百源婢壻葉貴同携酒來飮。百源等數巡而罷。壽又引余輩下百草亭社堂。入其社則有女老十餘人打鼓唱佛。其中有最少者年可三十餘。自謂最知佛法。子容於女前北面立。拜佛四度。壽又引余使見百花亭。有叢竹雜生。余坐竹下。唱爲玄談。談訖。又上北岡。下妙覺庵。庵有女僧一人。子容對女僧拜佛二度。捫念珠唱佛。女僧目成而笑。庵前有塔甚高。高麗顯宗藏金字塔也。塔上有梵字。不可解讀。塔傍有石僧像八軀。技極精巧。余等覽畢下來。由土嶺路至寓家夕食。又乘昏至南大門外所經菊花前細玩。又上南大門。劇談步月而來。丁巳。韓壽以赴鄕射禮不來。百源等以余前嘗爲此遊。以爲前導。余不得已前行。路中使伶人宋會寧吹笛。行過土嶺。巡家在川邊。行一二里許。左越一土橋。入純孝寺。又入穆淸殿。欲謁太祖眞。以余輩皆闕服。無君臣禮。故不敢也。但巡觀庭廡而已。世傳寺乃太祖潛龍故邸。太祖捨家爲寺。又立影殿。留太祖眞。所謂穆淸殿者也。移時出來。問於樵童得小路。北赴成均館。館前有二川交流。是謂泮水。水外有石橋。橋外有馬巖。渡石橋入門。門內有東西兩齋。其設本爲諸生所舍。而無一諸生。齋上有敎官廳。而無敎官。又其上有明倫堂。堂後有東西廡。廡內有七十子及漢唐諸儒神板。廡上有大聖殿。殿中央。有文宣王土像。其傍有顏,曾,思,孟土像。東西從祀廳。有十哲土像。其位次與京城同。而土像則異矣。余等歷覽而出。還過馬巖。又過王大卿美遺墟。又過內東小門。至內東大門。門乃沒於荊棘。而路出門傍矣。入其門。問行路人投中華堂。洞口有石槽。有一老父自言。家在中華堂故基。掇出洞口今已三十餘年。余請老父前導指故基。老父從之。又入一洞。左視王倫寺而有堂基。乃前朝侍中蔡公中庵先生所居。先生諱洪哲。倜儻爲一代風流宗。構一室。所居上。日迎耆英設會。自作紫霞之曲。令女兒肄之。昏夜。令入紫霞洞唱其曲。絲管俱起。隱然如天上聲。中庵誣其客。此後紫霞洞。舊有神仙。夜則又有此聲。諸客信之。一日。曲聲漸近。至於中華堂後。俄而直至堂前中庭。中庵下跪。諸客稽首。莫不俯伏而聽。以此世傳此洞有神仙云。余等坐堂上小峯。紲馬下坐。談中華堂故事。老父曰。此蔡政丞時仙人所駐之峯也。伶人會寧奏紫霞洞之曲。諸客皆喜。峯後有小洞。曰墨寺洞。俄而下來。投王倫寺。見丈六三軀。又下來得水落石。余與正中,子容浴川水中。又上里許。有信朴庵。庵前東路卽紫霞洞。西路卽安和洞。余從西路上。路傍有野菊叢生,渡仙人橋至寺前。則綿竹成蹊。楓葉欲謝。又有黃菊開滿。芭蕉葉張。余等坐菊間飧蕊。飢腹果然。又請於寺僧。令小奴摘山梨以沃渴喉。余問宋徽宗所書額字。社主曰。有愚妄化主。以其書朽敗焚之矣。良久下來。還過信朴庵水落石。西入東山色越小嶺。經東池左藏之墟。登古宮墟。俗呼爲望月臺。臺下有毬庭。庭中有淸川。元自廣明寺而來。臺上有松樹。或至數圍者參天矣。余等坐松樹下。百源奴輩先設酒肉餠果矣。百源等開酌。酒半。會寧奏恭愍正北殿之曲。傷亡國也。興酣。奏毅宗時翰林之曲。憶全盛也。又相與慷慨不歇。余就弔古詩三篇。時乃重陽之日。望見東西南諸山。士女成行。處處登高。或歌或舞。頗有太平氣像。寒士荒年慮食之嘆頓忘矣。居無何。酒盡日落。百源輩欲上北嶺。歷覽諸宮之墟。旋訪瞻星臺。遇野祭士女於乾德殿基。士女競來迎入。坐百源上列。余等列坐從人之行。子容居首。正中居次。會寧居次。石乙山居次。叔亨居次。余居末。衣服甚醜。其人進行果設小酌。百源顧呼正中彈琵琶。或彈琴。會寧吹笛。石乙山唱歌。子容起舞。琵琶歌笛。極臻其妙。子容與主女最少者相對舞。舞罷作沐猴舞。枝枝節節。中於歌管。主人士女歡喜皆泣下。主人以次進酌。其一。年盛而似兩班形。自稱曰典籍安紹弟也。其二其三其四。年老而似市人形。自稱曰忠贊衛也。其五。年少而似儒生形。年老四人中之一人子也。主人極陳繾綣之意。樂極而罷。主人拜別百源。余等拜別主人。正中謝主人曰。草次之間。嘉遇誠難。多賀多賀。如欲再見我輩。問諸漢陽市中。主人答謝曰。僻處之人。未聞絲管。今聞仙樂。聾耳暫明。豈非大幸。分袂而來。過當今巖。越銀梳嶺。經興國寺故墟。出內南大門。道中會寧於馬上吹笛。子容於馬上起舞。家家士女迎門出見。咸嘆以爲異人。子容自得。時時發狂叫。是夜投宿寓家。百源奴心服子容才藝。又別設小酌。子容復起沐猴舞。主奴攢手再拜。石乙山許媒妓女。戊午。韓壽來。百源告壽長源亭之行。欲與偕歸。壽辭以謁見留守。


不從。余等五人。獨從四奴負糧行。會寧石乙山不從。其意似惡行止冷淡也。渡時豆爲橋。過太平館。南出承旨門。入敬天寺。時日過午。倩喫菁根。以充飢腹。寺中有石塔十二層。層各刻佛。頂上立金表。爲技極妙。僧云中朝所造也。須臾。辭僧輩訪長源亭。行將二十里。至亭之故基。徑往鐵里串。登堂頭山。頂有神堂。故名。山形峭竦。走入海曲。三面皆水。漢水,洛水交流入海。海南有島。曰江華郡。郡西有島。曰喬桐郡。二郡之山。若螺髻浮水然。海西有水自北入海。曰碧瀾渡。渡西有陸。曰白川郡。坐觀山海。正中,百源喜氣益加。二人遊觀山海。此其初眼也。出粟米投前村水軍家炊飯來。劈菁根漓鹽醬。一柳器盛食。余等五人。列坐共食。子容或澤手抔喫。食訖坐巖間。或論時。或談古。或及陰陽造化之談。潮汐進退之理。興極夜深。塵懷散落。涼月正中。潮長鷗鳴。余有二詩。其一曰。長風吹起白鷗眠。夜月懸空浪接天。一代豪華今寂寞。長源古事思茫然。其二曰。老馬飢嘶日欲曛。白鹽粟飯劈菁根。潮來潮去猶生死。在世榮枯摠似雲。俄而有三客從三僮尋余輩來拜。正中疑樑上君子也。驚遽出答拜曰。客何從來此。客曰。我輩海濱士人。未見君子。到此仄聞冠蓋來臨。疑非齷齪小子。必兩班士族。故來謁耳。今日夜深露重。何不下歸就寢乎。正中曰。我等本以觀海而來。幽興未盡。霜露未可畏也。相與觀潮。三人謝去。余等夜分乃還所寓之家。宿於舂廬。己未。發堂頭。從小路徑往甘露寺。或失路。或得路。艱難得達。山路甚澁。及上甘露南嶺。藤蘿上樹。落葉沒屨。東背五峯山。西臨碧瀾渡。上流有寺峙焉。依然如屛裏。寺柱繫船。寺北有多慶樓。樓北有檀亭臨流。正中坐不肯起。主僧有稱劉思德姪子者。以我有劉先生舊恩。迎我慇懃。坐余輩堂上。饋澆飯。又從而炊飯。俄而復饋飯。炙豆腐無數進之。余於諸友。食最多。仰讀陽村記。記有云。前朝李子淵赴中朝。見潤洲甘露寺。倣而創此寺。寺北有休休庵。亦倣潤洲休休也。壁上又有永川君安之詩。乃江囱雙韻。富林君浪翁,虛舟居士持正等次韻詩又書在壁間。余與百源次韻。倚囱觀潮。水族出沒。奇形怪狀。不可具述。午後。辭主僧還出來。從坦途入開城。路過正陵。以日暮不得入見。又過迎賓館。入午正門。百源奴輩設酌於鴨脚樹下以待之。會寧吹笛。正中彈琴。盡歡而罷。乘月吹笛。到寓家宿。庚申。韓壽來導余輩。入南大門見壽昌宮。宮乃恭愍王南奔後所創也。今爲倉府云。出弘禮門。渡龍頭橋。出內西小門。過開城府。望見佛隱寺。寺之西邊。有一小洞。韓壽云星入之洞。高麗侍中姜邯贊爲宋使云。此文曲星精。乃避此洞。洞內有姜侍中故宅。洞口東邊。有趙政丞浚故宅。西邊有前朝詩人許錦故宅。皆墟矣。余等立馬良久乃還。過太平館。東入小洞。見先政丞龜亭先生故宅。基今爲野人所耕田。邊有石。蓋龜亭上馬臺。余下馬就二詩。其一曰。五百年終遇聖君。龜亭當日際風雲。凄涼故宅松山下。短布來過五葉孫。其二曰。故園今作野人田。此去龜亭一百年。喬木南朝看世廟。絳侯元是四朝賢。龜亭宅下。有河政丞浩亭先生遺基。南邊一嶺後。有金政丞上洛伯遺基。亦皆爲田矣。覽畢出洞口。東入演福寺。見能仁殿。有大佛三軀。四面有阿羅漢五百軀。又上五層殿極頭。令會寧吹笛。開囱下瞰。神氣舒暢。余等下來。見陽村所撰碑。乃我太祖重創演福事迹也。出南門到慶德宮。馬上負衣而來。行路大笑。至宮門。有白鵲飛鳴。余輩初眼也。大門覽宮殿畢。出跨馬到惠民局前。百源,子華,叔亨西歸延安。余與正中,子容東尋湧巖山洛山寺。至一小溪邊與韓壽別。三人從一僮。子容於馬上携琴。過成均館。越炭峴。過歸法寺故墟。有華表二石。前朝毅宗爲逆臣鄭仲夫所迫。囚於此寺。過馬墜嶺。入洛山造泡前。置奴從及馬。上洛山寺。階石作層。檀樹成陰。寺僧性休者。余之辛丑年遊山時贈詩者。引余入坐。余等納粟米炊飯。休易以白粒。子容辭謝不得。飯後歷覽寺之前後。眞絶境。寺後有成公俔贊佛碑。陷置巖石間。寺前香爐峯。有僧稱學祖弟子者。引余三人登峯頂。四顧豁如。望見前山佛成,成佛等庵。時日落月出。風起樹鳴。正中彈琴。山僧莫不聳聽。余與子容採蝨。或談或舞。夜入來就宿。辛酉。發洛山。渡獺越嶺過跡巖。問路於山僧。入靈鷲山玄化寺。寺前有碑。乃高麗周佇所撰。文義鄙僻。不能成讀。又有二華表。一長明燈。一石塔。塔有故人大猷德優名。寺前有故闕墟。乃穆宗,顯宗所居離宮。而寺則成宗所創也。寺僧一義又換余所納粟米饋白飯。食訖。別一義等僧。問路越悟道嶺。僧云。古之五聖悟道處也。經文殊庵。入元通寺。寺乃獵夫所創也。僧云。古有獵夫射得一獺。已屠其皮。獺過靈鷲山。入聖居山。抱五子而死。獵夫蹤血尋之。卽生慈悲之念。因折弓矢。埋其獺曰獺項。造佛寺曰元通寺。又造石塔於獺墳傍。蓋祈獺冥福也。於寺前檀木下。正中彈琴。又於寺之前樓上彈之。寺僧列立聽琴。有一僧最喜。乃祝曰。古之崔致遠輩率爾遊山。子等無乃是耶。社主海敬者遇余輩。頗有曲意。余等納粟米。海敬又換白粒爲飯。飯後出坐門外階上彈琴。僧輩亦出聽。還入房談玄理。雜以儒釋語及董山叛母之說。正中深闢之。有僧海恩者金堤人也。頗識道理。外形骸。已於無字上破其義者。與談其道。喜其合。自云各出生計較之。余諾大同而小異。恩曰。客到閫域而行差下。相與撫掌大笑。恩求衣。余不許曰。余不佞佛。恩亦笑。且曰。僕小相地理。能增人之壽。得人之爵。加人之福。余曰。公持文記而相之歟。持山形而相之歟。曰。余無文記。余對曰。余性鄙俚。壽不求益。爵不求得。福不求加。死不求見彌陀。恩謝曰。然則客味道矣。壬戌朝明。開囱坐堂上視洞口。山風拖雨。行數十里。東邊出日初暾。余得一絶書壁上。食後雨霽。


發元通。西行至於中庵。但有一僧。請爲嚮導。投水精窟歇。臥成小睡。睡覺。請社主思湜爲嚮導。上南雙蓮。寺極精漑。內無一僧。余等坐堂上望觀。題名壁間。出寺上後巖。或匍匐行。上西聖居庵。庵又奇古。加雙蓮一等。有一僧名智深者入定矣。出求余言。余留贈一絶。還出。又爲巖上行。坐遮日巖。巖有遮日跡。思湜曰。此五聖會處。余曰。五聖者何人耶。思湜曰。古之五聖人。上此山頂結艸廬。精盡化道於此。歲久不知其名。但以五聖號其庵。今之南雙蓮,西聖居,北雙蓮,南聖居,北聖居等庵是也。此山之名爲聖居。疑亦以此故也。時西邊俯視南北聖居二庵。又上聖居上峯。南風甚勁。巖石甚險。足不接地。正中大恐。固引余輩下。余與子容從之。至北雙蓮。風力益緊。凍雨成雪。雜與黃葉飛空。開囱望海。如有神靈作氣者。正中子容大喜。正中彈靑山別曲第一闋。主僧性浩亦大喜。漉葡萄汁。沃余輩渴喉。余亦喜比來山中之味無此比。俄而雪霽。出與思湜行數里許。入潤筆庵。行僧數人已先止接。見余來。喜迎入坐。子容曰。僕前入智異山僧堂三年。後入金剛山無言二年。今又從狂妄客到此。又見行脚禪輩。豈非宿緣歟。僧輩大驚異之。爭持其漆鉢漆匙。列我等前饋粟飯。余居首。子容居次。正中居末。有一僧祝手。子容曰。中坐客人。壯貌加奇於懶翁一倍。而學問又高。坐雖在中。必是先覺。食訖。正中又進琴彈之。諸僧嗟異之。思湜別去。又請行僧敬如發庵。歷一小窟。冒雨雪入義相庵。庵有義相眞掛壁間。余上坐義相臺。雪小歇。有虹見於臺前。出過黃蓮庵前路。赴觀音窟寓宿。癸亥朝日。就見朴淵瀑布。高數十丈。正中子容大驚異之。然比余前日所見。奇峭不甚異。乃余見金剛山十二瀑故也。孟子所謂觀於海者難爲水也。余等又下姑淵傍石上。正中彈琴。琴韻甚淸。余得一絶書在石間。觀罷。還上觀音窟朝飯。見窟中石觀音者。王太祖願佛也。泝瀑布上流。坐大興寺故墟。求性海庵失路。誤入定光庵。又從庵南路。轉踏西山之腰。迷失路。行高山樹木之底。落葉沒膝。艱難得達一路。飢餐石首魚。上寂滅庵餐菁根。又出山頂路南行。又視西海斜日耀水。正中大喜曰。近日山行。無如此日。行過天磨山淸涼峯之東路。下視靈通寺後峯。從谷中路。披叢竹將十餘里。乃達靈通路。入寺登樓上。重來。景槩不殊。而落葉脫枝則異也。社主飯我於東廂。館我於西廂。夜半。有僧玉麟者來話。頗聰明。解禪法。相與劇笑終夜。甲子。靈通寺後有興聖寺。有老釋自稱得陸行法派者。嘗化糧於野。與余成暫話者。得米五斗。與其弟子一人爲終冬之契闊。見余輩。引而爲飯饋余。余哀而辭之。見老釋誠懇。不得已而許之。又見釋學知者。亦多友儒生。涉儒家風。余別三僧。來宿板門。乙丑。過長湍。歷見李子賀。又訪伯淵不遇。渡臨津宿馬山驛。丙寅。冒雨入京。

을사년(1485, 성종16) 9월 7일 을묘일
자용(子容)주D-001과 정중(正中)주D-002이 필마(匹馬)를 타고 아이종을 데리고서 개성부(開城府) 판문(板門) 노사(奴舍)로 나를 방문하였다.
병진일(8일)
아침에 자용, 정중과 함께 판문을 출발하여 5, 6리를 가서 큰길로 나갔고, 천수원(天水院)을 찾아 천수정(天水亭)에 올랐다. 중추공(中樞公) 이예(李芮)의 기문 및 달성(達城) 서거정(徐居正) 공, 판서(判書) 이승소(李承召) 공, 시중(侍中) 홍언박(洪彦博) 공 등의 시를 쳐다보면서 읽었는데, 이는 모두 사인(舍人) 최사립(崔斯立)의 시에 화운(和韻)한 것이었다.
다 읽은 뒤에 도로 정자를 내려와서 탁타교(橐駝橋)를 건넜다. 이 다리는 바로 고려 왕 태조(王太祖)가 거란이 바친 낙타를 물리친 곳이다. 또 청교역(靑郊驛)과 개국사(開國寺)를 찾았다. 절은 단지 터만 남았고 터에는 화표주(華表柱) 두 개와 장명등(長明燈) 하나만 있었다. 수구문(水口門)에 들어갔다가 야교(夜橋) 길로 올라서 남대문 밖에까지 이르렀다. 길가에 국화 10여 떨기가 홍자색(紅紫色)과 황백색(黃白色)으로 흐드러지게 일제히 핀 것을 보고 한참 동안 앉아서 감상하였다.
돌아와서 백원(百源)주D-003이 우거하는 집을 방문하였다. 길 가는 사람에게 속아 다른 동네로 잘못 들어갔다가 간신히 그 집에 도달하였다. 백원과 숙형(叔亨)이 우두커니 우리들을 기다리다가 우리가 이르자 크게 기뻐하였고, 이어 개성의 노인 한수(韓壽)라는 사람을 초청하였다. 한수는 전조(前朝)의 고적(故迹)을 잘 알기 때문에 백원이 길잡이가 되어 주기를 청한 것이다.
화원(花園)을 방문하였다. 이른바 팔각전(八角殿)이라는 것은 옛터만 남아 있었다. 내가 10년 전에 이곳에 이르렀을 때는 팔각이 꺾이고 썩은 채로 철거되진 않았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 팔각전 주춧돌 곁에 사람의 키만큼 자란 배나무가 있었다. 팔각전 북쪽 곁에는 쌓여 있는 옛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단풍나무가 있었다. 신우(辛禑) 때에 심은 것으로, 기운 찬 늙은 뿌리가 바위 사이에 서려 있어 자못 예스러운 자태가 있었다. 한수가 우리들을 인도하여 팔각전 터 위에 앉게 하고 전조의 옛일을 얘기하니 흥미진진하여 싫증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보내다가 화원을 떠나 동쪽으로 옛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비문을 읽었다. 이는 바로 신우 때에 창건한 것이다. 또 동쪽으로 나와서 토령(土嶺)을 넘었고, 반 리(里)쯤 가서 왼쪽으로 태묘동(太廟洞)에 들어갔다. 한수가 동구의 누각 주춧돌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여기는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가 고려(高勵) 무리들에게 격살당한 곳입니다.” 하고, 우리를 인도하여 동네로 조금 들어가다 작은 집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시중의 옛집입니다.” 하였다. 우리들이 대문 앞에 앉아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옛일을 애도하였다.
조금 있다가 용암사(龍巖寺)로 올라갔다. 절은 일명(一名)이 암방(巖房)이다. 수목이 하늘에 닿고 큰 것은 둘레가 몇 아름이나 되었다. 아래에 비스듬히 가로지른 큰 바위가 있고 낙엽이 바위를 덮었다. 한수가 우리들을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게 하였다. 평지를 굽어보니 안계(眼界)가 매우 넓어 앉아서 한참 동안 감상하였다. 한수가 말하기를 “여기는 우리 태조(太祖)께서 회군(回軍)할 때에 군사를 멈춘 곳입니다.” 하였다. 바위 뒤에 조각달 모양처럼 굽은 토성(土城)이 있으니, 이른바 내성(內城)이라는 것이다. 한수가 말하기를 “태조께서 나라를 세운 이듬해 계유년(1393, 태조2)에 이 성을 쌓아 고려 왕씨(王氏)의 옛 고장을 격리시켰습니다.” 하였다.


한수가 또 정중, 백원 등을 인도하여 절 안으로 들어가서 이른바 십이행년불(十二行年佛)이라는 것을 보여 주니, 자용이 부처에게 네 번 절하였다. 조금 있다가 도로 나와서 나와 함께 북쪽 언덕으로 올라가 풀을 깔고 앉았다. 백원의 비서(婢婿) 섭귀동(葉貴同)이 술을 갖고 와서 마셨고, 백원 등이 몇 잔을 돌리고서 파하였다. 한수가 또 우리들을 인도하여 백초정(百草亭) 사당(社堂)으로 내려갔다. 그 사(社)에 들어가니, 늙은 여인 10여 명이 북을 치며 큰소리로 염불하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젊은 여자는 나이 서른 남짓으로, 불법을 가장 잘 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자용이 여자 앞에서 북쪽을 향해 서서 부처에게 네 번 절하였다.
한수가 또 나를 인도하여 백화정(百花亭)을 보게 하였다. 뒤섞여 자란 총죽(叢竹)이 있기에 내가 대나무 아래에 앉아 현담(玄談)주D-004을 큰소리로 읊었다. 다 읊은 뒤에 또 북쪽 언덕으로 올라가서 묘각암(妙覺庵)으로 내려갔다. 암자에는 여승 한 명이 있었다. 자용이 여승을 마주 대하여 부처에게 두 번 절하고 염주를 돌리며 큰 소리로 염불을 외니, 여승이 눈짓으로 알아차리고 웃었다. 암자 앞에 매우 높은 탑이 있으니, 고려 현종(顯宗)이 금자경(金字經)을 안치한 탑이다. 탑에 새겨 있는 범어(梵語) 글자는 해독할 수 없었고, 탑 곁에 있는 돌 승상(僧像) 여덟 개는 기교가 매우 정교하였다. 모두 본 뒤에 내려와서 토령(土嶺) 길을 통하여 유숙하는 집에 이르렀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또 황혼을 이용하여 남대문 밖에 이르렀다. 지나오는 길에 국화 앞에서 자세하게 완상하였고, 또 남대문에 올라가서 맘껏 담소하고 달빛 아래를 걸으면서 왔다.
정사일(9일)
한수가 향사례(鄕射禮)에 참여하느라 오지 않았다. 백원 등이 내가 일찍이 이곳을 유람했다는 이유로 나를 선도로 삼으니, 내가 부득이 앞장서 갔다. 길 가던 도중에 악사(樂士) 송회령(宋會寧)에게 피리를 불게 하였다. 토령을 지날 때에 순가(巡家)가 냇가에 있었다. 1, 2리쯤 가서 왼쪽으로 흙다리 하나를 넘어 순효사(純孝寺)에 들어갔다. 또 목청전(穆淸殿)에 들어가서 태조의 진영(眞影)을 배알하고자 했으나 우리들이 모두 복장이 미비하여 군신(君臣)의 예를 갖출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행하지 못하고, 단지 뜰과 집만 둘러보았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절은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살던 옛집으로, 태조주D-005가 집을 희사하여 절을 짓고 또 영전(影殿)을 세워서 태조의 진영을 모신 것이 이른바 목청전이라고 한다.
한참 시간을 보내고 나와서 초동(樵童)에게 물어 샛길을 알아내어 북쪽으로 성균관에 이르렀다. 성균관 앞에 두 냇물이 교차하여 흐르고 있으니 이것을 반수(泮水)라고 한다. 반수 밖에 석교(石橋)가 있고, 석교 밖에 마암(馬巖)이 있다. 석교를 건너 대문에 들어가면 대문 안에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다. 그것은 본래 제생(諸生)을 묵게 하려고 설치한 것이지만 제생은 하나도 없었다. 동서재 위에 교관청(敎官廳)이 있으나 교관은 없었다. 또 그 위에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명륜당 뒤에 동서무(東西廡)주D-006가 있다. 동서무 안에 공자의 70제자 및 한당(漢唐) 제유(諸儒)의 신판(神板)이 있었다. 동서무 위에 대성전(大聖殿)이 있다. 대성전 중앙에 문선왕(文宣王)의 토상(土像)이 있고, 그 곁에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의 토상이 있다. 동서의 종사청(從祀廳)에는 십철(十哲)주D-007의 토상이 있는데, 그 위차(位次)는 서울과 같으나 토상은 달랐다.
차례로 둘러본 뒤에 나와 도로 마암을 지나갔다. 또 대경(大卿) 왕미(王美)의 유허(遺墟)를 찾았고, 또 내동소문(內東小門)을 지나 내동대문(內東大門)에 이르렀다. 문이 가시덤불에 묻혀서 길이 문 곁으로 나 있었다. 그 문에 들어가서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 중화당(中華堂)으로 향하였다. 동네 어귀에 돌로 만든 수조(水槽)가 있었다. 어떤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 집이 중화당 옛터에 있는데, 수조를 동네 어귀로 내다놓은 것이 지금 이미 30여 년이 되었소.” 하였다. 내가 노인에게 앞서 인도하여 옛터를 가르쳐 주기를 청하니, 노인이 따라 주었다.
또 한 동네에 들어가서 왼쪽으로 왕륜사(王倫寺)를 보다가 어떤 집터가 있었으니, 바로 고려 시중(侍中) 채공 중암(蔡公中庵)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선생은 휘(諱)가 홍철(洪哲)로, 기개가 높아 한 시대 풍류의 으뜸이 되었다. 집 한 채를 짓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기영(耆英)주D-008을 맞이하여 모임을 열었다. 스스로 〈자하곡(紫霞曲)〉을 지어 여아(女兒)로 하여금 익히게 하고는 어두운 밤에 자하동(紫霞洞)에 들어가서 그 곡을 부르게 하였다. 관현악기가 모두 연주되자 은연히 천상의 소리 같으니, 중암이 손님들을 속이기를 “이 뒤쪽 자하동은 예전에 신선이 있었기 때문에 밤이면 또 이러한 소리가 나는 것이다.” 하자, 여러 손님들이 그렇게 믿었다. 하루는 〈자하곡〉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중화당 뒤에 이르렀고, 조금 있다가 중화당 앞 뜰 가운데로 곧바로 이르니, 중암이 내려가서 꿇어앉자 여러 손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부복(俯伏)하고 들었다. 이로 인해 자하동에 신선이 있다고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중화당 위의 작은 봉우리에 앉아 아랫자리에 말을 매어놓고 중화당의 고사를 얘기하였다. 노인이 말하기를 “이곳은 채 정승(蔡政丞) 때에 선인(仙人)이 머물던 봉우리라오.” 하였다. 악사 회령(會寧)이 〈자하동곡(紫霞洞曲)〉을 연주하니, 여러 손님이 모두 기뻐하였다. 봉우리 뒤에 작은 동네가 있으니, 묵사동(墨寺洞)이다. 조금 있다가 내려와서는 왕륜사에 들어가서 장륙(丈六)주D-009 세 개를 보았다. 또 내려오다가 수락석(水落石)을 만나 정중, 자용과 함께 냇물에서 목욕하였다.


또 1리쯤 올라가니 신박암(信朴庵)이 있었다. 암자 앞의 동쪽 길은 곧 자하동이고, 서쪽 길은 곧 안화동(安和洞)이다. 서쪽 길을 따라 올라가니, 길가엔 들국화가 무더기로 나 있었다. 선인교(仙人橋)를 지나 절 앞에 이르니, 솜대가 오솔길을 이루었고 단풍잎이 떨어지려 하였다. 또 황국(黃菊)이 만발하고 파초가 잎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들이 국화 사이에 앉아 꽃술을 따먹으니 주린 배가 불렀다. 또 절의 승려에게 청하여 어린 노복으로 하여금 똘배를 따오게 하여 마른 목을 적셨다. 송나라 휘종(徽宗)이 썼다는 액자를 물으니, 사주(社主)가 말하기를 “어리석고 망녕된 화주승(化主僧)이 그 글씨가 썩어 못 쓰게 되었다고 불태웠습니다.” 하였다. 오랫동안 있다가 내려왔다.
도로 신박암과 수락석을 지나서 서쪽으로 동산색(東山色)에 들어가 작은 고개를 넘었다. 동지(東池)와 좌장(左藏)의 옛터를 지나 고궁(古宮)의 옛터에 올랐다. 세속에서 망월대(望月臺)라고 부른다. 망월대 아래에 구정(毬庭)이 있고, 구정 가운데에 청천(淸川)이 있으니, 원래 광명사(廣明寺)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다. 망월대 위에 소나무가 있으니, 혹 몇 아름 되는 것은 하늘에 닿기까지 하였다. 소나무 아래에 앉았다. 백원의 노복들이 먼저 술, 고기, 떡, 과일을 차려 놓아 백원 등이 술자리를 열었다. 술이 반쯤 되었을 때에 회령이 공민왕(恭愍王) 때의 〈북전곡(北殿曲)〉을 연주하였으니 망국을 상심한 것이고, 흥취가 한창일 때에 의종(毅宗) 때의 〈한림곡(翰林曲)〉을 연주하였으니 전성시대를 생각한 것이다. 또 서로 더불어 강개한 마음이 다하지 않아 내가 옛일을 슬퍼하는 시 3편을 지었다.
이날이 바로 중양절(重陽節)이었다. 동서남쪽의 여러 산을 바라보니, 남녀가 행렬을 이루어 곳곳에서 높은 곳에 올라 노래 부르기도 하고 춤추기도 하여 자못 태평한 기상이 있으니, 한미한 선비가 흉년에 의식을 염려하는 탄식이 문득 잊혀졌다. 얼마 있지 않아 술이 다하고 해가 졌다. 백원의 일행이 북령(北嶺)에 올라가 여러 궁궐 터를 둘러보고 곧이어 첨성대(瞻星臺)를 방문하였다.
건덕전(乾德殿) 터에서 야제(野祭)를 지내는 남녀를 만났다. 남녀가 앞 다투어 나와 맞이하고 들어가서는 백원을 윗줄에 앉게 하니, 우리들은 뒤따르는 사람의 줄에 늘어앉았다. 자용이 첫 번째 앉고, 정중이 그 다음에 앉고, 회령이 그 다음에 앉고, 석을산(石乙山)이 그 다음에 앉고, 숙형(叔亨)이 그 다음에 앉고, 내가 끝에 앉았다. 의복이 매우 지저분했다. 주인 남녀가 과일을 내어오고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백원이 돌아보면서 부르자 정중이 비파를 타다가 혹 거문고를 타고, 회령이 피리를 불고, 석을산이 노래를 부르고, 자용이 일어나 춤추니, 비파와 노래와 피리가 매우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자용이 가장 젊은 주인 여자와 마주보고 춤추었고, 춤이 끝나고서 원숭이 춤을 추니, 몸동작이 굽이굽이 노래와 피리 소리에 들어맞아 주인 남녀가 기뻐서 모두 눈물을 흘렸다.
주인이 차례대로 술잔을 올렸다. 첫 번째 사람은 나이가 젊고 행색이 양반 같았는데, 스스로 전적(典籍) 안소(安紹)의 아우라고 일컬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사람은 연로하고 저잣거리 사람 같았는데, 스스로 충찬위(忠贊衛)라고 일컬었다. 다섯 번째 사람은 나이가 어리고 행색이 유생(儒生) 같았는데, 나이 많은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주인이 곡진한 뜻을 극진히 펼쳐서 즐거움이 극도에 다다른 뒤에 파하였다. 주인은 백원과 작별하고 우리들은 주인과 작별하였다. 정중이 주인에게 사례하기를 “노숙하는 경우에는 아름다운 만남이 진실로 어려운 법이기에 고맙고 고맙소이다. 만일 우리들을 다시 보려고 한다면 한양의 시중(市中)에서 물어보십시오.” 하니, 주인이 답하여 사례하기를 “궁벽한 곳에 살다 보니 여태 관현악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선악(仙樂)을 듣고서 먹었던 귀가 잠시나마 밝아졌으니, 어찌 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헤어지고 나와서는 당금암(當今巖)을 지나 은소령(銀梳嶺)을 넘고 흥국사(興國寺) 옛터를 경유하여 내남대문(內南大門)을 나갔다. 길 가는 중에 회령은 말 위에서 피리를 불고 자용은 말 위에서 일어나 춤추니, 집집마다 남녀가 문을 나와서 바라보고 모두 감탄하며 이인(異人)이라 하므로, 자용이 스스로 만족스러워서 때때로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이날 밤 유숙하던 집에서 묵었다. 백원의 노복이 자용의 재예(才藝)에 심복하여 또 별도로 작은 술자리를 베푸니, 자용이 다시 일어나 원숭이 춤을 추었다. 노복의 우두머리가 손을 모아 두 번 절하였고, 석을산이 기녀를 소개해 주었다.
무오일(10일)
한수가 왔다. 백원이 한수에게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함을 알리고 그와 함께 가고자 했으나 한수가 유수(留守)를 뵙는다면서 사양하고 따르지 않았다. 우리들 다섯 사람이 단지 네 명의 노복만 데리고 양식을 지워서 나섰다. 회령과 석을산은 따라오지 않았으니, 행차가 재미없는 것을 싫어해서인 듯하였다.
시두위교(時豆爲橋)를 건너 태평관(太平館)을 지나고 남쪽으로 승지문(承旨門)을 나가서 경천사(敬天寺)에 들어갔다. 시간이 정오를 지났으므로 무 뿌리를 얻어 씹어 주린 배를 채웠다. 절 가운데에 12층 석탑이 있었다. 층마다 부처를 조각하였고 꼭대기에 금표(金表)를 세웠는데, 기술이 매우 정묘(精妙)하였다. 승려가 이르기를 “중국에서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뒤에 승려들과 작별하고 장원정을 찾아갔다.


20리를 가서 장원정의 옛터에 이르렀다. 곧바로 철리곶(鐵里串)으로 가서 당두산(堂頭山)에 올랐다. 산꼭대기에 신당(神堂)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형세가 가파르게 솟았고 바다 굽이로 달려 들어가서 삼면이 모두 물이다. 한수(漢水)와 낙수(洛水)가 교류하여 바다에 들어간다. 바다 남쪽에 있는 섬이 강화군(江華郡)이고, 강화군의 서쪽에 있는 섬이 교동군(喬桐郡)이니, 두 군의 산이 마치 소라껍데기가 물에 떠 있는 듯하였다. 바다 서쪽에 북쪽에서 바다로 들어오는 강물이 있으니 벽란도(碧瀾渡)이고, 벽란도 서쪽에 육지가 있으니 배천군(白川郡)이다. 앉아서 산과 바다를 볼 때에 정중과 백원은 한층 더 기쁜 기색이 역력했는데, 두 사람이 산과 바다를 구경한 것으로는 이것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곡식을 내어 앞마을 수군(水軍) 집에 가서 밥을 지어 왔다. 무 뿌리를 잘라 소금 간장을 무쳐서 하나의 유기(柳器)에 밥을 담아 우리 다섯 사람이 나란히 앉아 함께 먹었다. 자용은 간혹 손으로 한 움큼씩 집어 먹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바위 사이에 앉아 혹 시사(時事)를 논하다가 혹 옛일을 논하였고 혹 음양 조화의 담론과 조석(潮汐) 진퇴의 이치까지 언급하니, 밤이 깊도록 흥취가 지극하여 속진의 회포가 흩어져 사라졌다. 서늘한 달이 하늘 가운데 이르고 조수가 불어나서 갈매기가 울었다. 내가 시 두 수를 지었다. 첫 번째 시에,

긴 바람 불어서 흰 갈매기 잠 깨우는데 / 長風吹起白鷗眠
밤 달 허공에 걸리고 물결 하늘에 닿았네 / 夜月懸空浪接天
한 시대의 호화로웠던 일 이제는 적막하니 / 一代豪華今寂寞
장원의 옛날 일이야 생각하매 아득하구나 / 長源古事思茫然
하고, 두 번째 시에,

늙은 말은 주려 울고 해는 저물려는데 / 老馬飢嘶日欲曛
흰 소금과 조밥에다 무 뿌리 썰어 먹네 / 白鹽粟飯劈菁根
밀물 썰물 오고감은 삶과 죽음 같으니 / 潮來潮去猶生死
세상의 영고성쇠야 모두 뜬구름 같아라 / 在世榮枯摠似雲
하였다.
이윽고 세 명의 나그네가 세 명의 종을 데리고 우리들을 찾아와서 인사하였다. 정중이 도적일 것이라 생각하여 놀라 성급히 나서서 답례하기를 “손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하니, 나그네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바닷가에 사는 사인(士人)으로, 아직 군자를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이르러 귀한 분이 왕림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악착스러운 소자(小子)가 아니고 필시 양반의 사족(士族)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찾아와서 뵙는 것입니다. 오늘은 밤이 깊고 이슬이 많이 내리거늘 어찌 내려가서 주무시지 않습니까.” 하였다. 정중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래 바다를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윽한 흥취가 다하지 않았기에 서리와 이슬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였다. 함께 조수를 보다가 세 사람은 떠나갔고, 우리들은 밤중이 되어 유숙하는 집으로 돌아와서 방앗간 채에서 묵었다.
기미일(11일)
당두산을 출발하여 작은 길을 따라 곧바로 감로사(甘露寺)로 갔는데, 길을 잃었다가 다시 찾기도 하며 간신히 도달하였다. 산길이 매우 험난하여 감로사의 남쪽 고개를 오를 때는 등 넝쿨이 나무를 휘감아 오르고 낙엽에 발이 쑥쑥 빠졌다. 동쪽으로 오봉산(五峰山)을 등지고 서쪽으로 벽란도에 임하여 상류에 우뚝한 절이 있으니, 영락없는 병풍 속 풍경이었다. 절의 기둥에 배가 매어져 있었다. 절의 북쪽에 다경루(多慶樓)가 있고, 다경루 북쪽에 강물에 임한 단정(檀亭)이 있었다. 정중이 앉았다가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주지승으로 유사덕(劉思德)의 조카라고 일컫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유 선생과 구은(舊恩)이 있다는 이유로 정성껏 맞이하여 우리를 당상에 앉게 하고 물에 만 밥을 대접하였다. 또 이어 밥을 짓고는 조금 뒤에 다시 밥을 대접하며 구운 두부를 무수히 올리니, 내가 여러 벗들 중에서 가장 많이 먹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기문을 쳐다보며 읽었다. 기문에 이르기를 “전조의 이자연(李子淵)이 중국에 갔다가 윤주(潤洲)의 감로사를 보고 본떠서 이 절을 창건했다.” 하였다. 감로사 북쪽에 휴휴암(休休庵)이 있으니, 또한 윤주의 휴휴암을 본뜬 것이다. 벽에 영천군(永川君) 이안지(李安之)의 시가 있으니, 곧 강(江)과 창(窓)의 쌍운시(雙韻詩)였다. 부림군(富林君) 낭옹(浪翁)주D-010과 허주거사(虛舟居士) 지정(持正)주D-011 등의 차운시가 또 벽에 적혀 있었다. 나도 백원과 함께 차운하였다. 창에 기대어 조수를 보고 있자니, 수족(水族)이 출몰하여 기괴한 형상을 다 기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후에 주지승과 작별하고 도로 나와서 평탄한 길을 따라 개성에 들어갔다. 길이 정릉(正陵)을 지나갔으나 날이 저물어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또 영빈관(迎賓館)을 지나서 오정문(午正門)으로 들어갔다. 백원의 노복들이 압각수(鴨脚樹) 아래에 술자리를 베풀고 기다리고 있었다. 회령이 피리를 불고 정중이 거문고를 타서 기쁨을 다한 뒤에 그만두었고, 달빛을 타고 피리를 불며 유숙하는 집에 이르러 묵었다.


경신일(12일)
한수가 와서 그의 인도 하에 우리들이 남대문에 들어가서 수창궁(壽昌宮)을 보았다. 수창궁은 공민왕이 남쪽으로 달아난 뒤에 창건한 것이다. 지금은 창고가 되었다고 한다. 홍례문(弘禮門)을 나와서 용두교(龍頭橋)를 건넜고, 내서소문(內西小門)을 나와서 개성부(開城府)를 지나다가 불은사(佛隱寺)를 바라보니, 불은사의 서쪽에 작은 동네 하나가 있었다. 한수가 이르기를 “별이 들어온 동네입니다. 고려 시중(侍中) 강감찬(姜邯贊)이 송나라 사신에게서 ‘이 사람은 문곡성(文曲星)의 정기이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동네로 피하였습니다.”주D-012 하였다. 동네 안에 강 시중의 옛집이 있었다. 동네 어귀 동쪽에 조준(趙浚) 정승의 옛집이 있고, 서쪽에 전조의 시인 허금(許錦)의 옛집이 있으니, 모두 빈 터만 남아 있었다. 말을 세우고 한참 동안 있다가 돌아왔다.
태평관을 지나 동쪽으로 작은 동네에 들어가서 나의 선조인 정승 구정(龜亭) 선생주D-013의 옛집을 보았다. 집터는 지금 농부가 경작하는 밭이 되었고, 밭 곁에 바위가 있었으니, 이는 구정이 말에 오르던 대(臺)이다. 내가 말에서 내려 시 두 수를 지었다. 첫 번째 시에,

오백년이 끝나고 성군을 만나니주D-014 / 五百年終遇聖君
구정공 당시에 풍운이 제회하였네주D-015 / 龜亭當日際風雲
송악산 아래 처량한 고향집으로 / 凄凉故宅松山下
오세손이 베옷 입고 찾아왔다오 / 短布來過五葉孫
하고, 두 번째 시에,

옛 동산은 지금 농부의 밭이 되었으니 / 故園今作野人田
구정공 당시까진 일백 년 세월이라 / 此去龜亭一百年
교목 늘어선 한양의 종묘를 볼지니 / 喬木南朝看世廟
강후는 원래 네 조정의 현신이었네주D-016 / 絳侯元是四朝賢
하였다.
구정댁 아래에 호정(浩亭) 선생 하륜(河崙) 정승의 남은 집터가 있고, 남쪽의 고개 하나 뒤에 상락백(上洛伯) 김사형(金士衡) 정승의 남은 집터가 있으니, 또한 모두 밭이 되었다. 구경을 모두 마치고 동네 어귀를 나와서 동쪽으로 연복사(演福寺)에 들어가 능인전(能仁殿)을 보았다. 큰 불상 세 개가 있고, 사면에 아라한(阿羅漢) 500개가 있었다. 또 능인전의 5층 꼭대기에 올라서 회령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창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신과 기운이 활짝 펴졌다. 우리들이 내려와서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비문을 읽었다. 이는 바로 우리 태조께서 연복사를 중창한 사적이다.
남문(南門)을 나와서 경덕궁(敬德宮)주D-017에 이르렀다. 말 위에서 웃옷을 걸머지고 오자 길 가는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궁궐 문에 이르렀을 때에 흰 까치가 날면서 우니,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대문에서 궁전을 다 보고 나와서 말에 걸터앉아 혜민국(惠民局) 앞에 이르렀다. 백원, 자화(子華), 숙형은 서쪽으로 연안(延安)으로 돌아갔고, 나는 정중, 자용과 더불어 동쪽으로 용암산(湧巖山) 낙산사(洛山寺)를 찾았다. 작은 시냇가에 이르러 한수와 작별하였고, 우리 세 사람이 동복 하나만 데리고 갔기 때문에 자용이 말 위에서 거문고를 잡았다. 성균관을 지나 탄현(炭峴)을 넘어 귀법사(歸法寺) 옛터를 찾으니, 화표주 2개가 있었다. 전조의 의종(毅宗)이 역신(逆臣) 정중부(鄭仲夫)에게 핍박을 받아 이 절에 갇혔었다.
마추령(馬墜嶺)을 지나 낙산사에 들어가 조포소(造泡所) 앞에 노복과 말을 남겨두고 낙산사에 오르니, 섬돌은 층계를 이루고 박달나무는 그늘을 드리웠다. 절의 승려 성휴(性休)는 내가 신축년(1481, 성종12)에 산을 유람했을 때에 시를 지어 준 사람이다. 나를 인도하여 들어가 앉게 하였다. 우리들이 곡식을 주고 밥을 짓게 하니, 성휴가 흰쌀로 바꾸므로 자용이 사양했으나 되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에 절의 앞뒤를 둘러보니 참으로 절경이었다. 절 뒤에 성현(成俔) 공의 찬불비(贊佛碑)가 바위 사이에 빠져 있었다.
절 앞이 향로봉(香爐峰)이다. 학조(學祖)주D-018의 제자라고 일컫는 승려의 인도로 우리 세 사람이 향로봉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시원스레 트였고, 앞산의 불성암(佛成庵), 성불암(成佛庵) 등이 바라보였다. 이때 해가 지고 달이 나왔고, 바람이 일어 나무가 울렸다. 정중이 거문고를 타니, 산승(山僧)이 모두 귀를 세우고 들었다. 나와 자용은 이〔蝨〕를 잡다가 혹 담론하기도 하고 혹 춤추기도 하였다. 밤이 되어서야 들어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신유일(13일)
낙산을 출발하여 여울을 건너고 재를 넘어 적암(跡巖)을 지나갔다. 산승에게 길을 물어 영취산(靈鷲山) 현화사(玄化寺)에 들어갔다. 절 앞에 비석이 있었으니, 고려 주저(周佇)가 지은 것이다. 글 뜻이 비루하고 편벽되어 읽을 수가 없었다. 또 화표주 두 개와 장명등 하나와 석탑 하나가 있었다. 탑에는 친구 대유(大猷)와 덕우(德優)주D-019의 이름이 있었다. 절 앞에 옛 궁궐 터가 있었으니, 바로 목종(穆宗)과 현종(顯宗)이 거처하던 이궁(離宮)이고, 절은 성종(成宗)이 창건한 것이다. 절의 승려 일의(一義)가 또 내가 준 곡식을 바꾸어 흰밥을 대접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일의 등의 승려와 작별하였다.


길을 물어 오도령(悟道嶺)을 넘었다. 승려가 이르기를 “옛날의 다섯 성인이 도를 깨달은 곳입니다.” 하였다. 문수암(文殊庵)을 지나 원통사(元通寺)에 들어갔다. 절은 사냥꾼이 창건한 것이다. 승려가 이르기를 “옛날에 어떤 사냥꾼이 수달 한 마리를 쏘아 잡아서 그 가죽을 이미 벗겼는데, 수달이 영취산을 넘고 성거산(聖居山)에 들어가서 다섯 마리 새끼를 안고 죽었습니다. 사냥꾼이 핏자국을 따라 찾아내고는 곧 자비의 마음이 생겨서 활과 화살을 꺾고 그 수달을 묻어 달항(獺項)이라 하고, 절을 지어 원통사라 하고, 또 수달 무덤 곁에 석탑을 지었으니, 이는 수달의 명복을 빈 것입니다.” 하였다.
절 앞 박달나무 아래에서 정중이 거문고를 타고, 또 절 앞 누각 위에서 거문고를 타니, 절의 승려가 늘어서서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한 승려가 몹시 기뻐하며 축원하기를 “옛날 최치원(崔致遠) 무리들이 거리낌 없이 산을 유람하더니, 그대들도 이러한 무리가 아니겠소.” 하였다. 사주(社主) 해경(海敬)은 우리들을 대우함에 자못 곡진한 뜻이 있었다. 우리들이 곡식을 주자 해경이 또 흰쌀로 바꾸어 밥을 지었다. 밥을 먹은 뒤에 문밖 섬돌 위에 나가서 앉아 거문고를 타니, 승려들이 또한 나와서 들었다.
도로 방에 들어와서 현묘한 이치를 담론하며 유가와 석가의 설을 뒤섞어가다가, 얘기가 동산(董山)이 어머니를 배반한 것주D-020에 미치자 정중이 깊이 이를 배척하였다. 해은(海恩)이라는 승려는 김제(金堤) 사람이었는데, 자못 도리를 알아 형해(形骸)를 벗어났고 이미 무(無) 자에 대해 그 의미를 간파하였다. 함께 도를 담론하다가 합치됨을 기뻐하여 스스로 이르기를 “각각 자신의 살림을 꺼내어 견주어 본 것이오.” 하기에 내가 대동소이함을 인정하였다. 해은이 말하기를 “손님께서는 도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실행은 조금 못하구려.” 하여 함께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해은이 시주하기를 청하거늘 내가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는 부처에게 아첨하지 않소.” 하니, 해은이 또한 웃으며 말하기를 “저는 지리(地理)를 조금 볼 줄 알아 사람의 수명을 늘릴 수 있고, 사람의 벼슬을 얻을 수 있고, 사람의 복을 더할 수 있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공은 문기(文記)를 갖고서 상을 보오, 산형(山形)을 갖고서 상을 보오?” 하니, 말하기를 “나는 문기가 없소.”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성품이 비루하고 촌스러워 수명을 더하기를 구하지 않고, 벼슬을 얻기를 구하지 않고, 복을 더하기를 구하지 않고, 죽어서 아미타불을 보기를 구하지 않소.” 하니, 해은이 사례하기를 “그렇다면 손님께서는 도를 맛본 것이오.” 하였다.
임술일(14일)
아침이 밝을 무렵에 창을 열고 당상에 앉아 동구를 보니, 산바람이 비를 끌고서 수십 리를 가고, 동쪽에는 아침 해가 막 솟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벽에 적었다.
아침 식사 뒤에 비가 개었다. 원통사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가서 중암(中庵)에 이르니, 승려 한 사람만 있었다. 길잡이가 되어 주기를 청하여 수정굴(水精窟)에 이르렀다. 쉬면서 누웠다가 잠깐 잠들었고 잠이 깬 뒤에 사주(社主) 사식(思湜)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기를 청하여 남쌍련암(南雙蓮庵)에 올라갔다. 절은 매우 정결했으나 안에는 승려가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들이 마루 위에 앉아 바라보다가 벽에 이름을 적었다. 절을 나와서 뒤쪽 바위에 오를 때에는 기기도 하면서 서성거암(西聖居庵)에 올랐다. 암자는 또 기이하고 예스러움이 쌍련암보다 한층 더하였다. 이름이 지심(智深)인 승려가 입정(入定)하고 있다가 나와서 나에게 시를 요구하거늘 내가 절구 한 수를 남겨 주고 도로 나왔다.
또 바위 위로 걸어가서 차일암(遮日巖)에 앉았다. 바위에는 해를 가린 흔적이 있었다. 사식이 말하기를 “여기는 다섯 성인이 모였던 곳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다섯 성인은 어떤 사람이오?” 하니, 사식이 말하기를 “옛날 다섯 성인이 이 산꼭대기에 올라 초가집을 짓고 정진하여 여기에서 도를 깨달았습니다. 세월이 오래되어 그 이름은 알지 못하고, 단지 다섯 성인으로써 그 암자를 호칭했으니, 지금의 남쌍련암, 서성거암, 북쌍련암, 남성거암, 북성거암 등이 이것입니다. 이 산의 이름이 성거산(聖居山)이 된 것도 아마 이 때문인 듯합니다.” 하였다.
이때 서쪽에서 남북의 두 성거암을 굽어보다가 또 성거산 상봉에 올라갔다. 남풍이 매우 거세고 암석이 매우 험하여 발을 땅에 붙일 수 없으니, 정중이 크게 두려워하여 굳이 우리들을 끌고 내려가려 하기에 나와 자용이 따랐다. 북쌍련암에 이르러서는 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찬비가 얼어 눈이 되어 누른 낙엽과 뒤섞여 공중에 날렸다. 창을 열고 바다를 바라보니, 마치 신령이 기운을 일으키는 듯하여 정중과 자용이 크게 기뻐하였다. 정중이 〈청산별곡(靑山別曲)〉의 첫 번째 곡을 타니, 주지승인 성호(性浩)도 크게 기뻐하여 포도즙을 걸러 내와 우리들의 마른 목을 적셔 주었다. 나 또한 기뻤으니, 근래 먹었던 산중의 음식 중에 이것과 견줄 것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눈이 걷히자 나와서 사식과 함께 몇 리쯤을 걸어 윤필암(潤筆庵)에 들어갔다. 행승(行僧) 몇 사람이 이미 먼저 거접(居接)하고 있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기쁘게 맞이하여 들어가 앉게 하였다. 자용이 말하기를 “내가 이전에 지리산 승당(僧堂)에 들어가서 3년을 지냈고, 뒤에 금강산에 들어가서 묵언(默言)한 것이 2년이었소. 지금 또 광망(狂妄)한 객(客)을 따라 여기에 이르렀다가 행각승(行脚僧)들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숙세(宿世)의 인연이 아니겠소.” 하니, 승려들이 크게 놀라며 남달리 여겼고, 앞 다투어 검은 바리때와 검은 수저를 가져다 우리들 앞에 늘어놓고 밥을 대접하였다. 내가 첫 번째 앉고 자용이 다음에 앉고 정중이 끝에 앉았다. 어떤 승려가 자용에게 합장하고 말하기를 “가운데 앉은 객인(客人)은 장대한 모습이 나옹(懶翁)주D-021보다 배나 뛰어나고 학문이 또 높으니, 자리는 비록 가운데에 있으나 필시 먼저 깨달은 사람일 것이오.” 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정중이 또 거문고를 내어서 타니, 모든 승려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사식이 작별하고 떠나자, 또 행승 경의(敬如)에게 길잡이를 청하여 암자를 출발하여 작은 굴 하나를 지나 내리는 눈을 무릅쓰고 의상암(義相庵)에 들어갔다. 암자에는 의상의 진영(眞影)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내가 의상대(義相臺)에 올라가 앉았을 때에 눈이 조금 그치고 의상대 앞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나와서 황련암(黃蓮庵) 앞길을 지나 관음굴(觀音窟)로 가서 묵었다.
계해일(15일)
아침에 박연폭포(朴淵瀑布)를 보러 가니, 높이가 수십 길이었다. 정중과 자용이 몹시 경이롭게 여겼으나 내가 전날 본 것과 견주면 우뚝 솟은 것이 그다지 기이하지는 않았다. 이는 내가 금강산 십이폭포(十二瀑布)를 보았기 때문이니, 맹자가 말한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고연(姑淵) 곁의 바위 위로 내려갔다. 정중이 거문고를 타니 거문고 소리가 매우 맑았다.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바위에 적었다. 다 구경하고 도로 관음굴로 올라가서 아침밥을 먹고 굴속의 석관음(石觀音)을 보았으니, 이는 왕 태조(王太祖)의 원불(願佛)이다.
폭포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대흥사(大興寺) 옛터에 앉았고, 성해암(性海庵)을 찾다가 길을 잃어 정광암(定光庵)으로 잘못 들어갔다. 또 암자의 남쪽 길을 따라 서산(西山)의 허리를 돌아서 가다가 헷갈려 길을 잃고 높은 산 수목 밑을 걸어가니, 낙엽에 무릎이 빠져서 간신히 길로 접어들었다. 배가 고파 석수어(石首魚 조기)를 먹고, 적멸암(寂滅庵)에 올라가서 무 뿌리를 먹었다. 또 산꼭대기 길을 나와서 남쪽으로 가다가 또 서해의 석양이 물에 빛나는 것을 보게 되니, 정중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근일의 산행에 오늘 같은 걸음은 없었다.” 하였다.
천마산(天磨山) 청량봉(淸凉峰) 동쪽 길을 지나 영통사(靈通寺) 뒤쪽 봉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골짜기 가운뎃길을 따라 대숲을 헤치며 10여 리를 가서 비로소 영통사 길에 도달하였다. 절에 들어가서 누각 위에 오르니, 두 번 온 걸음이라서 경관은 다르지 않으나 낙엽이 떨어진 것은 달랐다. 사주(社主)가 동쪽 곁채에서 우리들에게 밥을 차려 주고 서쪽 곁채에 묵게 하였다. 한밤중에 옥린(玉麟)이란 승려가 와서 얘기를 나누었다. 자못 총명하고 선법(禪法)을 이해하므로 서로 더불어 크게 웃으며 밤을 지새웠다.
갑자일(16일)
영통사 뒤에 있는 흥성사(興聖寺)에 육행법파(陸行法派)를 얻었다고 스스로 일컫는 노승(老僧)이 있었다. 일찍이 들판에서 탁발하다가 나와 함께 잠시 얘기를 나눈 사람으로, 쌀 다섯 말을 얻어 제자 한 사람과 더불어 겨울이 끝나도록 정진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을 보고는 인도하여 밥을 지어 대접하려 하니, 내가 애처롭게 여겨 사양했으나 노승의 정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을 보고 부득이 허락하였다. 또 학지(學知)라는 승려를 보았는데, 또한 유생을 많이 사귀어 유가의 풍모를 제법 알았다. 세 승려와 작별하고 와서 판문(板門)에서 묵었다.
을축일(17일)
장단(長湍)을 지나는 길에 이자하(李子賀)를 만났고, 또 백연(伯淵)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임진(臨津)을 건너서 마산역(馬山驛)에서 묵었다.
병인일(18일)
비를 맞으며 서울에 들어왔다.

남효온 <송경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