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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황진이

眞娘 開城盲女之子 性倜儻類男子 工琴善歌 嘗遨遊山水間 其自楓嶽歷太白 智異至錦城 州官方宴節使 聲伎滿座 眞娘以弊衣膩面 直坐其上 捫蝨自若 謳彈無少怍 諸妓氣懾 平生慕花潭爲人 必携琴釃酒詣潭墅 盡驩而去 每言知足老禪 三十年面壁 亦爲我所壞 唯花潭先生昵處累年 終不及亂 是眞聖人 將死 命家人曰 愼勿哭 出葬以鼓樂導之 至今歌者能謳其所作 亦異人也 眞娘常白于花潭曰 松都有三絶 先生曰 云何 曰 朴淵瀑布及先生曁小酌也 先生笑之 此雖善謔 亦有是理 盖柗都山水 欎然盤紆 人才輩出 花潭之理學 爲國朝最 而石峯筆法 振耀海內外 近日車氏父子兄弟 亦有文名 眞娘亦女中翹楚 卽此可知其言不妄 眞伊者松都娼女也 嘗僑居于松都古射場宿焉 夜月微明問無行人 有白馬將軍駐馬盤桓以袖拭淚而歌曰 五百年都邑地匹馬歸來兮 山川依舊人傑何所之兮 已矣哉故國興亡問之何爲兮 歌竟揮鞭而遊 不知所向 始知其非人也 其歌悲壯殆非婦人所能 今人謬傳爲眞伊作 松都人云 -

嘉靖初 松京有名唱眞伊者 女中之倜儻任俠人 聞花潭徐敬德高蹈不仕 學問精粹 欲試之 束縚帶挾大學往拝曰 妾聞禮記男○革女○絲 妾亦志學帶絲而來 先生笑而誨之 真伊乘夜相○如魔登之拊○阿難者累 而花潭終不少橈 眞伊聞金剛爲天下名山 欲一辨淸遊 無可與偕 時有 李生員者宰相子也 爲人跌宕淸疎 可共方外之遊 從容謂李生曰 吾聞中國人 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 況我國人 生長本國 去仙山咫尺而不見眞面目可乎 今吾偶奉仙郞 正好共做仙遊 山衣野服恣討勝賞而還不亦樂乎 於是 使李生止僮僕勿隨 布衣草笠親荷粮 眞伊自戴松蘿圓頂穿葛衫帶布裙曳芒鞋杖竹枝而隨 入金剛無深不到 乞食諸刹 或自賣其身取粮於僧 而李生不之尤兩人遠涉山林 飢渴困悴 非復○時容顔 行到一處有村儒十餘人會宴于溪上松林 真伊過拜焉 儒曰 汝舍長亦解飮乎 勸之酒不辭 遂執酌而歌 歌聲淸○響震林壑 諸儒深異之 餉以酒肴 眞伊曰妾有一僕 飢甚請饋餘瀝乎 與之李生以酒肴 時兩家各失所往 不知影響者殆半歲餘 一夕鶉衣○面而返 隣里見之大驚
宣傳官李士宗善歌 嘗出使松都 卸鞍川壽院川邊 脫冠加腹而臥 高唱數三曲 真伊有所如 亦歇馬于院側耳聞之曰 此歌曲甚異 必非村家俚曲 吾聞京都有風流李士宗當代絶唱 必此人也 使人往探之 果士宗也 於是 移席相近致其欵 引至其家留數日 當與子六年同住 翌日盡移家産三年之資于士宗家 其父母妻子仰事俯育之費 皆辦自自家 親着臂鞲 盡妾○禮 使士宗家不助錙銖 旣三年 士宗餉眞伊一家 一如真伊餉士宗 以報之者適三年 眞伊曰 業已遂 約期滿矣 辭而去 後真伊病且死 謂家人曰 吾生時性好紛華 死後勿葬我山谷 宜葬之大逵邊 今松都大路邊 有松都名娼眞伊墓 林悌爲平安都事 過松都爲文祭于其墓 卒被朝評

진이는 개성 맹인 여자의 자식이다. 성품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남자와 같았다.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노래를 잘 했다. 일찍이 산수에서 놀면서 풍악으로부터 태백과 지리산에서 금성에 이르렀다. 고을 벼슬아치가 절도사와 잔치를 열었는데, 노래 부르는 기생이 자리에 가득했다. 진이는 해진 옷을 입고 때묻은 얼굴로 그 위에 앉아서 태연하게 이를 잡고 있었다. 노래하며 거문고를 타는데 부끄러워함이 조금도 없어서 모든 기생이 진이를 두려워했다. 평생에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손에 가지고 화담의 농막에 이르러서 기쁨을 다하고 돌아왔다. 매번 말하기를 지족선사가 삼십년을 면벽하였지만 내가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오직 화담선생은 여러 해를 친하게 지냈는데 끝내 정을 통할 수가 없으니 진짜 성인입니다. 장차 죽음에 임박할 때 집안사람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곡하는 것을 삼가하고 장사 나갈 때 풍악을 울려서 인도를 받아라. 지금도 노래하는 사람은 그 지은 바를 능히 부르니 역시 이인이다. 진이가 화담에게 아뢰여 말하기를를 송도에 삼절이 있습니다. 선생이 무엇이냐 물으니 박연폭포와 선생과 소인입니다라고 하니 선생이 웃었다. 이것이 비록 농담이지만 또한 옳은 말이다. 대저 송도는 산수가 울창하고 구부러져서 인재가 많이 나왔다. 화담의 이학은 국조에서 최고이고 석봉의 필법은 바다 안팎에 빛나고 떨쳤습니다. 근래에 차씨 부자와 형제 또한 문명이 있습니다. 진이 또한 여자 중에 가장 뛰어나니 즉 이것으로 그 말이 잊혀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진이는 송도의 몸 파는 여자다. 일찍이 송도의 옛 활터에 교거하며 잠을 잤다. 밤에 달이 희미하고 행인도 없었다. 백마를 타던 장군이 말을 머무르게하고 머뭇거리면서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노래하기를


오백년 도읍지를 한 필의 말로 돌아오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어디 있느냐
말지어다 고국의 흥망을 물어 무엇하랴

노래를 끝내고 말 채찍을 때리며 갔으나, 향하는 곳을 알지 못했다. 비로소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 노래가 비장하여 부녀자들이 지을 수 있는 바가 아닌데, 지금 사람들은 황진이의작으로 잘못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송도사람이 이른 것이다.


가정(嘉靖)초에 송경(松京)에 명창(名唱) 진이(眞伊)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인 중에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협기가 있었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 고상한 행실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의 정수를 이루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허리에 끈을 묶고 [대학(大學)]을 끼고 가서 절하며 말했다. “첩이 듣기로는 [예기(禮記)]에 ‘남자는 가죽띠를 차고 여자는 실띠를 찬다’고 했습니다. 첩 또한 학문에 뜻을 두고 실띠를 차고 왔습니다.” 선생이 웃으며 가르쳤다. 진이는 밤을 틈타 친근하게 굴며 마등(魔登)이 아난(阿難)을 어루만진 것처럼 여러 차례 하였다. 그러나 화담은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진이는 금강산이 천하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맑은 흥취의 놀이를 갖추고자 하였는데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 이생원(李生員)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재상의 아들이었다. 사람됨이 호탕하고 소탈해서 세상을 벗어난 유람을 함께 할 만하였다. 진이가 조용히 이생에게 말했다. “저는 중국 사람도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기를 원한다(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고 들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 사람으로 본국에서 태어나 자라서 선산을 지척에 두고 진면목을 보지 못한대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제가 우연히 선랑을 받들었으니, 바로 신선 놀음을 함께 짓기에 좋습니다. 산의(山衣)․야복(野服)으로 빼어난 경치를 마음대로 찾아보고 돌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에 이상으로 하여금 하인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베옷에다가 삿갓을 쓰고 친히 양식을 짊어지게 하였다. 진이는 스스로 송라원정(松蘿圓頂)을 머리에 이고 갈포 적삼과 베 치마를 입고 짚신을 끌고 대나무 가지 지팡이를 짚고 따랐다. 금강산에 들어가 깊숙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여러 절에서 걸식하며 혹 스스로 그 몸을 팔아 승려에게서 양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생은 탓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멀리 산림을 지나쳐서 배고프고 목이 말라 고생하며 파리해져서, 다시는 지난날의 모습과 얼굴이 아니었다. 가다가 한 곳에 이르렀는데, 마을 유생 십여인이 시냇가 소나무 숲에서 모여 잔치를 하고 있었다. 진이가 찾아가 절했다. 유생이 말했다. “너의 사장(舍長)도 술 마시는 것을 이해하느냐?” 술을 권하니, 사양하지 않았으며 드디어 술잔을 잡고 노래하였다. 노래 소리가 맑아서, 음향이 수풀과 골짜기를 울렸다. 여러 유생들이 매우 특이하게 여겨 술과 안주를 보냈다. 진이가 말했다. “첩에게는 종이 한명 있는데 매우 굶주렸습니다. 청컨대 남은 술을 먹여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생에게 술과 안주를 주었다. 당시에 양쪽 집에서는 각각 간 곳을 찾지 못했다. 그림자와 울림조차 알지 못한 지가 거의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에 헤진 옷을 입고 시커먼 얼굴로 돌아오니 이웃에서 보고 크게 놀랐다.
선전관(宣傳官) 이사종(李士宗)은 노래를 잘했다.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송도에 갔다. 천수원(天壽院) 시냇가에서 안장을 풀고 관(冠)을 벗어 배 위에 얹고 누워 노래 두 서너 곡을 높이 불렀다. 진이도 갈 곳이 있어서 역시 원(院)에서 말을 쉬다가 귀를 기울여 듣고 말했다. “이 노래 곡조는 심히 특이하구나. 반드시 촌가(村家)의 속된 곡조가 아니다. 나는 서울에 풍류 이사종이 당대의 절창(絶唱)이라고 들었는데,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사람을 시켜 가서 찾게 했더니, 과연 이사종이었다. 이에 자리를 옮겨 서로 가까이 하여 그 다정함을 극치로 했다. 이끌고 그 집으로 가서 며칠 머문 후 말하였다. “마땅히 그대와 함께 6년을 같이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튿날 집안 살림살이할 3년의 재물을 이사종 집으로 모두 옮겼다. 위로 그 부모처자를 섬기고 아래로 기르는 비용을 모두 자기 집으로부터 마련하였다. 직접 비구(臂鞲)를 착용하며, 첩의 예를 다하면서 이사종의 집으로 하여금 조금도 돕지 못하게 했다. 3년을 마치자 이사종이 진이의 집으로 보내기를 진이가 이사종의 집에 보낸 것과 같이 했다. 보답한 지 꼭 3년 만에 진이가 말했다. “이미 약속이 이루어졌고 기일이 다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직하고 갔다. 후에 진이가 병들어 죽게 되자 집안사람들에게 일러 말했다. “나는 살아서 성품이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소. 죽은 후에도 나를 산골짜기에 장사지내지 말고 마땅히 큰길가에 장사지내주오.” 지금 송도 큰길가에는 송도 명창 진이의 묘가 있다. 임제(林悌)가 평안도사(平安都事)가 되어 송도를 지나면서 그 묘에 축문을 지어 제사지냈다가 끝내 조정의 비평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