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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도

1) 드라마 <계섬>은 조선시대의 가기(歌妓-聲婢)였지만 자존심 강한 예술가로서 높은 음악적 성취를 기록한 계섬의 실제 삶을 드라마적으로 허구화한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계섬은 신분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장애물을 뛰어넘어 장악원의 연희 총감독인 전악에 도전함으로써 예술을 통해 자유와 존엄을 추구한다. 시대의 제약에 순응하지 않고 남성 귀족들의 취미 혹은 교양으로 여겨진 예술을 통해 자유와 개성을 주장한 계섬의 극적이고 용기 있는 삶은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삶의 올바른 가치관을 모색하게 만들 것이다.

2)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조선사회이다. 조선을 예의와 규범에 사로잡힌 양반들의 사회로 조명하는 것을 넘어 반역을 꿈꾸는 아웃사이더들 혹은 반항아들의 유쾌한 반란의 징후 가득한 역동적인 사회로 조명해보겠다. 계섬의 욕망은 신분, 성별의 벽에 맞서 자유로운 인간, 예술가로 서려는 것이다. 계섬은 뛰어난 재능을 소유하고 있지만, 가기인 탓에 현실 속에서 늘 팔려 다니고 모욕당하는 처량한 신세이다. 그녀가 자기의 음악적 주체성 혹은 독립성을 유지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예술은 금전을 얻기 위한 상업 노동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음악의 주인이 될 수 없을 때 권력이나 재물을 욕망하곤 한다. 그러나 계섬은 자신과 자신의 음악을 팔리는 상품으로 규정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유를 찾기 위해 투쟁한다. 그녀가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은 전악에 도전하는 것은 인간적 존엄과 예술적 자유를 찾기 위한 행동이다. 그러니 그녀는 단순히 도피적 방외인이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아웃사이더이자 적극적 반항아라 할 수 있다. 김성기, 유우춘 등 조선사회의 이름난 음악연주가들은 부를 버리는 대신 자유를 선택함으로써 실제 반항을 통한 예술적 자유를 추구한 아웃사이더들이다.

3) <계섬>은 이름난 음악인이어서가 아니라 자아의 개체성과 존엄성을 주장한 근대인으로 살고자했던 점에서 역사 속의 매력적인 인물이다. 계섬은 조선의 신분 피라미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주장할 수 없었던 가기(歌妓)이다. 귀족의 술자리나 행사장에서 여흥을 돋우는 천한 악인인 계섬에게 음악은 타인들을 위한 것이다. 음악은 그녀에게 먹을 것 을 주지만, 결코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악인 유우춘은 자신들의 음악이 속물적인 귀족들의 놀이거리로 전락한 데 따른 심리적 고통을 자신의 음악에 대한 환멸로 표현한 바 있다. 계섬은 때로 ‘돼지’들을 위해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천한 노예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자신의 육체와 욕망의 주권을 주장할 수 없는 기녀이다. 계급과 성(gender)은 그녀의 삶을 억누르는 이중굴레로서 그녀를 팔리는 상품으로 정의한다. 계섬은 기생이지만 신분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인간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정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고 도전한다.

4) 이 드라마는 조선시대의 풍류문화(왕실, 사대부 그리고 뒷골목의 퇴폐적 유흥 문화 등)를 드라마의 주요배경으로 설정해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시하는 한편으로 조선사회를 재해석하려 한다. 드라마의 주된 공간으로 국립음악기관인 장악원을 설정했다. 고려가 무인정치의 사회였다면 조선은 문의 통치를 내세운 문인들의 사회로서 예술적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조선의 예악정치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 음악인데, 장악원은 조선사회에서 음악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드라마는 음악을 양반사회의 아비투스(상징투쟁의 장)로 조명함으로써 예술과 정치가 얽히는 맥락들을 살펴보려 한다. 노래비인 계섬의 소유주였던 시랑 원의손(1726-1781)은 계섬이 자신을 떠나 이정보의 문하에 들어가자 이정보를 찾아가 계섬을 다시 데려오려 한다. 원시랑의 이러한 행동(노비를 되찾기 위해 양반이 몇 번씩 부탁을 한다는 것은-)은 당시 양반들 사이에서 음악이 자신의 권세 혹은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적 재화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기방이나 여흥의 거리를 통해 예의와 규범을 중시한 유교문화의 이면에 위치한 난봉꾼, 예술을 소비하는 귀족, 선비 등 남다른 감각(퇴폐의 민주주의?)을 소유한 조선시대의 아웃사이더들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서민문화의 성장을 엿볼 수 있도록 거리의 예인들을 등장시키고자 한다. 즉, 왕실, 양반, 서민 문화의 장을 오가고, 고급과 저급, 공식과 비공식 문화를 대비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음악을 중심으로 조선에 대한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5) 이 드라마는 세 사람의 사회적 혹은 개인적 상처를 간직한 인물들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해가는 방식을 보여줄 것이다. 계섬은 신분제가 남긴 상처-그것은 아버지대로부터 이어져오는 것으로 신분제 사회에서 하위계급들이 겪는 트라우마 이다-를 치유하기 위해 최초로 장악원의 전악에 도전한다. 그녀는 원칙과 소신을 지켜가며 성공을 추구한다. 계섬의 라이벌인 사대부 여성 진아는 여성을 이류 혹은 이등 인간으로 규정하는 가부장제 사회로부터 상처 입은 인물로 금기를 넘어서기 위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 되고 싶어 하지만 부정적 혹은 왜곡된 방식을 택한다. 계섬의 연인인 황문오는 사회적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내파하려기보다 현실을 냉소하고 조롱함으로써 자신의 꿈을 버려둔다. 이 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무엇이 상처 혹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올바른 삶의 자세인지를 고민해 볼 수 있다. 세 인물의 성공과 실패는 제 각각 성숙의 계기가 될 것이다.

6) 최근 사극은 점점 더 여성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주인공은 남성 영웅이 아니라 여성이며, 주 시청자 층 역시 여성이 되어가고 있다. 여성형 사극은 기존 남성 사극과 달리 21세기 영웅 혹은 사회적 리더의 자질을 새로이 구축해 보여준다. 비범한 천재, 남성적 담력이나 영웅다움이 아니라 보살피고 설득하며 의사소통하는 여성적 리더십이 진정한 영웅의 자질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권위주의적 카리스마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계섬의 집중력, 부드러움, 내면적 성찰성, 타인에 대한 의존과 보살핌 등은 새로운 리더 혹은 점점 인간화하는 영웅의 면모를 보여줄 것이다.

7) 계섬이 살았던 영정조 시기는 국가가 장악원을 중심으로 임진왜란과 서민문화의 부상으로 어지러워졌다고 판단된 악풍을 재정비하려는 사업이 일어났던 때이다. 영조는 아악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으며 정조는 문체반정과 악풍반정을 시도했다. 성리학적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의 타락은 극심해진다. 한 예로 정치적, 성적 타락을 들 수 있다. 장악원은 타락한 권력자들의 공간이기도 했다. 장악원을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는, 즉 타락한 정치의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장소로 조명해 볼 수 있다. 장악원의 행정 관리와 장악원 전악, 그리고 사대부들의 부패와 안이함을 드러냄으로써 장악원을 부조리한 권력의 공간으로 조명하겠다. 따로와 끼리의 파벌 문화, 내부 고발자의 소외 문제 등에 대해 그릴 것이다. 특히 조선사회의 음악은 감정의 교화 장치였지만, 음악과 관련한 이들은 욕망을 무한정 추구한 노예였고, 그 속에서 여성 예인들이 어떻게 희생되고 소외되는지를 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