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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장악원 악인의 생활>
장악원의 악인 가운데 악생(樂生)은 양인 가운데 선발하거나 악생의 자제들로 충당했으며, 악공(樂工)은 공천(公賤) 출신으로 충당했다. 악공과 악생은 힘든 업종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전쟁을 치른 후 악공과 악생이 흩어진 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숫자가 많은 것도 그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따라서 실제 악공과 악생의 숫자를 충원할 때에는 늘 어려움이 있었고, 항상 예정된 숫자를 채우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경우 각 지방에 할당 인원을 부여하여 서울로 보내는 식으로 인원을 조달했는데, 해당 지역은 충원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악공과 악생은 조선이라는 신분사회에서는 좋은 직업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악원에서 매 달 2자와 6자가 들어가는 날 연습하도록 하는 '이륙회(二六會)와 같은 정기연습일을 제도적으로 법전에 명기해 놓은 것은 한편 악공들의 생업을 고려한 조치이기도 하다. 장악원 악공과 악생들의 보수실태는 최저 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므로 그 일 외에도 궁중 밖의 여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소집되어 올라와 활동했기 때문에 대개는 다른 집에 몸을 의탁하여 살거나 태평관(大平館)이나 왜관(倭館)의 공터 등, 서울의 오부(五部) 근처에 거적을 치고 살아야 하는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평소 궁중 안에서 특별한 행사가 없을 경우에는 민간의 음악 수요에 부응하여 일정 정도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였고, 여타 생업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았다. 궁 밖에서는 민간에서 여러 용도로 쓰이는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민간에서 잔치가 있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악공과 악생이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장악원 음악인들의 사회적 소통 방식은 궁중음악과 민간음악을 일정 지점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였고, 이러한 현장에서 궁중과 민간의 음악교류가 이루지도록 했다. 그 결과 궁중음악 가운데 일부는 민간으로 들어가 새로운 음악양식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樂掌謄錄], [增補文獻備考] 「樂考」,
* 송지원, "조선시대 장악원의 악인과 음악교육 연구" [한국음악연구] 제43집, 한국국악학회, 2008. 17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