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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의유형

<음악후원의 유형; 정신적 후원과 물적 후원>

후원의 제 유형
‘연주’라는 영역은 지극히 전문적인 부문이다. 따라서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형태만을 추적하여 그로써 연주자의 자리 매김을 하려 한다든지 위계를 세우는 것은 무모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보상이 개개 연주가들의 예술활동에 어떤 형태로 영향을 미쳤을 것인지, 또는 어떠한 동기유발을 시켰는지 또, 어떤 작용을 일으켰는지 등의 문제에 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예술가들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행해지는 보상은 그들에게 직․간접적인 후원이 되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연주행위에 따른 보상형태가 성립되었다는 현상을 ‘음악의 상품화’라는 개념과 관련지어 설명한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설명방식이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면 문학사에서 ‘소설의 상품화’라는 개념을 쓸 때에는 대개 해당 소설에 일정한 정가가 매겨진 것으로 설명한다. 즉, ‘소설’이라는 예술이 하나의 상품과도 같이 일정 가격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간예술인 ‘음악’이라는, 구체적으로 ‘연주행위’라는 특수 분야에 적용시키려면 이는 또 다른 시각과 설명방식이 요구된다.
조선후기 서울 음악인들의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체계는 문헌에 일목요연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산발적으로나마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정리해 본다면 조선후기 사회에서 서울 음악인들의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형태에 대하여 대략적인 윤곽이 잡힐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유형화가 가능할 것인 바 크게 ‘정신적 후원’과 ‘물적 후원’의 두 가지 유형을 상정한 후 접근해 보기로 한다.

정신적 후원
정신적 후원이란 물질적 후원과 구분되는 개념으로서 일정한 연주행위에 대하여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보상이 이루어진 경우를 말한다. 연주행위에 대한 정신적 후원으로 벼슬을 하사(下賜)받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대개 19세기 판소리 명창이나 가객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판소리 명창에게 부여되는 벼슬은 대개 명예직에 그치고 실직으로서의 벼슬과는 무관하다. 이들에게 급여가 부과된 것도 아니고, 이들이 실권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정신적 보상은 당대의 예술인들 사이에 최고의 명예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송흥록은 의정부 좌찬성 김병기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간 것이 철종 10년(1859) 봄이었다. … 송흥록은 김병기의 주선으로 어전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하였고, 철종은 송흥록에게 정삼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26쪽)

“(염계달이) 철종대왕의 부르심을 받고 어전에서 누차 소리를 하였고 … 대왕의 총애를 입어서 동지(同知)의 직계(職階)를 제수(除授)하심을 받었다”([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26쪽)

“헌종 시대에 씨(모흥갑)의 명창(名唱)을 포상하기 위하여 동지(同知)의 직계를 수(授)하였다.([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30쪽)

“모흥갑의 완숙한 기량에 헌종을 위시하여 삼정승 육판서 이하 어전에 나열한 조신들은 지위와 체면을 잊어버리고 흥분하여 탄성을 울리면서 열광하였다고 한다. 헌종은 탄복하고 그 기량을 가상히 여겨 모흥갑에게 종이품의 동지 벼슬을 제수하였다. 상민으로서는 왕 앞에 나설 수 없었으므로 비록 명예직일지언정, 임금의 총애를 받고 벼슬까지 제수받은 것은 모흥갑이 최초의 일이다.”([판소리 二百年史], 73-4쪽)

“철종대왕께서 총애하셔서 (宋壽喆에게) 선달(先達)의 직계(職階)를 수(授)하시고, 이워서 장(杖)까지 하사하셨다 한다”([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48쪽)


“대원군의 세도당년(勢道當年)에 가악(歌樂)으로 질탕(迭蕩)하게 놀 때에 氏(박유전)의 장기(長技)인 새타령이 언제던지 가장(歌場)의 특색(特色)을 가(加)하였고 대원군의 총애(寵愛)는 더욱 깊어 무과급제(武科及第)를 시켰다.”([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43쪽)


“대원군이 총애(寵愛)하여 중년에 (朴萬順에게) 무과(武科) 선달(先達)의 직계(職階)를 시키었었다”([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147-8쪽)


“각종고전가(各種古典歌)에 정통(精通)한 것과 전인(前人)의 법제(法制)에 견문(見聞)이 많은 것은 또한 드물리 보는 바이다. 근대(近代) 사계(斯界)에 일대가(一大家)로 허(許)함에 넉넉하다. 구한국(舊韓國) 융희황제(隆熙皇帝)께서 조선(朝鮮)의 성악발달(聲樂發達)을 기도(期圖)하기 위(爲)하여 원각사(圓覺社)를 서대문내(西大門內)에 설치(設置)하고 김창환을 주석(主席)으로 송만갑(宋萬甲) 염덕준(廉德俊)을 그 간부(幹部)로 선정(選定)케하시다...(중략)...춘향전 심청전을 창극으로 구성하여서 배우(俳優)라고할는치 일백칠십여명(一百七十餘名)의 남녀(男女)를 끌고 연행(演行)한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창극(唱劇) 춘향가 심청가가 그때 그것을 모방한 것이다....이로 보아서 씨가 조선 구악계에 공헌한 바가 다대(多大)하다. 고종시대에 어전에서 소리를 누차 하였거니와 고종황제의 총애를 입어서 의관(議官)의 관직(官職)까지 제수(除授)하심을 받았다.“([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147-8쪽)


위의 자료들을 통해 볼 때 판소리 명창에게 주어진 벼슬은 통정대부, 동지(同知), 선달(先達) 등이다. 즉, 철종은 송흥록에게 정삼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하였고, 염계달은 철종으로부터 동지의 직계(職階), 모흥갑 역시 동지의 직계를, 송수철은 선달의 직계와 장(杖)을 하사받았으며, 대원군은 박유전에게 무과급제(武科及第)를 시켰고 박만순(朴萬順)에게도 무과 선달의 직계를 주었다. 김창환은 고종황제로부터 의관(議官)의 관직을 제수 받았다.
음악인들에게 연주에 대한 보상으로 관직을 내리는 예를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는지, 또 관직을 받는 예술인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연주에 대한 보상형태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예우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예술가에 대한 최고의 형식적 찬사 정도, 또는 신분 낮은 예술인에 대한 신분상승 기회 등 여러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러한 정신적 보상이 대부분의 음악인 사이에 상당한 명예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물적 후원
물적 후원이란 개념은 ‘출연에 대한 물적 사례’와 가까운 의미이다. 이는 음악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따라, 또는 주최측의 사회적, 경제적 지적 특수성 등에 따라 다르다. 최고의 기량을 지녔으면서도 물적 보상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연주자가 있는가 하면 명성을 얻은 연주자가 명성에 걸맞는 최고의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물론, 예술의 가치가 보상의 과다(過多)와 반드시 상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하에 접근해야 한다.

“(송흥록은) 그 명성이 서울은 물론 삼천리 방방곡곡에 진동하였다. 벼슬아치 양반들의 부름에 응하여 소리를 하게 되면 그 행하(行下), 즉 출연료는 천량금이어서, 상경한 지 2년만에 수만금을 벌었다”([판소리 二百年史], 70쪽.)

위의 기록을 보면 송흥록은 서울에 올라온지 2년만에 수만금을 벌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당대의 ‘수만금의 가치’란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에 제시되어 있는 숫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당시의 언어관습에서 드러나는 상징적 의미 정도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모흥갑은 공경대부의 부름을 받아 명성을 유감없이 떨쳤고, 행하도 수만냥 벌었다고 한다.”([판소리 二百年史], 74쪽.)

長安盛說禹春大 장안에서 이름 높던 우춘대를
當世誰能善繼聲 이 시대에 그 명성 이을 자 그 누군가?
一曲樽前千段錦 술자리서 한 곡 불러 천 필 비단을 받는
權三牟甲少年名 권삼득과 모흥갑은 소년 명창이라.
(「관우희」 49수)

정조년간 활약한 것으로 알려진 우춘대는 술자리에서 한 곡 부르면 천 필의 비단을 행하로 받았다. 판소리 명창들의 예우를 물질적 보상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한 대우이다. 단기간에 수만냥, 수만금의 사례도 적지 않다. 물론 이는 명성을 얻은 명창의 경우이다. 그러나 최고의 기량을 지녔으면서도 정당한 보상이 따르지 못한 경우도 있다.
잠시 18세기의 상황을 살펴본다.

“무릇 나의 해금이나 거지가 연주하는 해금의 재료는 같답니다. 말총으로 활을 매고 송진을 칠하여 타는 것도 아니고 부는 것도 아닌 비사비죽(非絲非竹)의 악기이지요. 내가 처음 해금 공부를 시작하여 3년 만에 일정한 경지에 도달했는데 다섯 손가락에 온통 못이 박혔답니다. 그러나 기술이 더욱 높아져도 수입은 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은 더욱 심하답니다. 저 거지는 허름한 해금을 다만 몇 달 만져 보았는데, 듣는 사람에 겹겹이 둘러싸이고, 연주를 마치고 돌아갈 때엔 뒤에 따라붙는 사람만도 수십명이고 하루 벌이가 말 곡식에 돈 한 움큼이랍니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유우춘의 해금’을 온 나라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름만 듣고 아는 것이요, 정작 해금의 음악을 듣고 아는 자가 몇이나 될까요.([영재집(泠齋集)])

18세기 해금악사 유우춘의 고민이다. 「유우춘전」에서 유우춘은 당대 해금으로서는 최고의 기량을 지닌 연주가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최고의 경지라 하지만 유우춘의 물적 보상은 형편없었던가 보다. 유우춘은 “기술이 높아갈수록 급료도 나아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기술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움직이는 현실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기술이 더욱 높아갈수록 급료는 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은 더욱 심하답니다”라고 하면서 당시 해금으로 구걸하는 거지의 벌이와 자신의 상황을 비교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연주자로 모두 인정하고 있는 예술인의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 자료는 보여준다.
물론 해금이라는 악기는 ‘비사비죽(非絲非竹)’, 즉 현악기도 아니고 관악기도 아니라 하는 유우춘의 말에서도 보이듯, 악기의 특수성으로 인해 다른 현악기와의 비중을 나란히 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해금 연주자의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형태로 당시의 다른 악기 연주자들의 예우를 가늠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아울러 해금이라는 악기 연주자의 고민을 통해 한 시대 음악인들의 의식을 뭉뚱그려 가늠해 보는 일 또한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해금 악사의 고민을 통해 조선후기 당시 음악에 대한 몰이해 또는 음악인들에 대한 현실을 가늠할 수 있다. 같은 자료에서는 그러한 현실을 한탄한다.


“종친이나 대신이 밤에 악공을 부르면 각각 악기 하나씩을 안고 가 허리를 굽히고 대청으로 올라가 앉습니다. 촛불이 휘황히 밝은데 측근자가 ‘잘 하면 상이 있을 거네’ 합니다. 우리들은 그만 황공해서 ‘예이-’하고 연주를 시작하지요. 현악과 관악이 서로 맞추지 않아도 길고 짧고 빠르고 느린 것이 아득히 저절로 맞아 돌아가는데 숨소리 잔기침 하나 문 밖으로 새나오지 않을 즈음에 곁눈으로 살짝 보면 잠자코 안석에 기대어 고작 졸음이나 청하고 있다가 이윽고 기지개를 켜면서 ‘그만두어라’ 하면 우리는 ‘예이-’하고 물러나는 것이지요. 집에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제가 타는 것을 제가 듣다가 돌아왔을 뿐이라. 저 귀유공자(貴游公子)와 우쭐대는 명사들의 맑은 담론, 고상한 모임에는 일찍이 해금을 안고 끼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영재집(泠齋集)])

최고의 기량을 지닌 연주가가 음악을 감상할 줄 모르는 청중을 대상으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해야 하는 현실은 유우춘에게는 이율배반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모른다. 1723년 무렵 장악원 소속의 악공들의 월급은 한 달에 한 필의 베였다. “장악원의 악공 김중립 등 67명이 상소에서 임금님에게 삼가 아뢰기를...저희들의 급료는 오직 한 달에 한 필의 베 뿐이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비록 작은 급료에 대한 탄식을 감히 밖으로 표시하지 못한 채 굶주림을 참아 가면서 지내는 형편입니다.”([악장등록])라고 한 데에서 알 수 있다. 용호영에 다니던 유우춘의 실상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음악인들 가운데 양반 귀족들, 중인 부호층들의 연회에 초청을 받아 거기에서 나오는 비용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이 많았음에 비추어 볼 때 유우춘의 경우는 특이하다. 많은 연회에 초청받아 나가지만 진정 음악을 알아주는 지음(知音)이 없음에 한탄하며 그러한 자리를 거부하고, 결국 자신이 부양해야 할 노모가 세상을 뜨자 업을 버렸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의 유우춘의 상황과 앞서 살펴본 바 있는 이세춘 일행을 비교하면 사뭇 양상이 다르다. 이세춘 일행이 심용의 후원으로 평양까지 원정공연을 가서 받아온 돈은 당대 부자의 재산규모와 비교해 볼 때 대단한 액수였다.

「遊浿營 風流盛事」:* 평양감사가 서울 기생에게 천금을 내림.
* 이세춘 일행이 벌어온 돈은 만금에 가까움
「看羊錄」 : * 부자를 ‘수수만금’의 부자로 표현함.([訥隱集])

19세기와 18세기에 있어서 몇몇 연주자들의 물적 보상형태를 정리해 보았다. 앞서 살펴본 19세기 판소리 명창들의 물적 보상형태를 보면 당대 최고의 명성에 걸맞게 일급의 대우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판소리의 경우 19세기는 이미 수많은 명창이 배출된 때인데 거기에는 귀 명창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두터운 애호가 층이 판소리의 진가를 인정하고 명창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기에 그에 따른 장르의 발전이 아우른 것이다.
여기에 비할 때 18세기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연주자의 기량이 아무리 나아져도 그것을 진정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드문 것으로 보인다. 대중의 취향을 따르려 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는 결국 거지의 하루벌이보다 못한 상황에 놓여 있다. 또 후원자를 뒤에 업고 떠들석한 연회에 참가하는 음악인들은 부를 쉽게 거머쥐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된 상황들을 단편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조선후기 음악사회의 한 단면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잠시 각 문헌에 나타난 연주자들의 출연료와 연회에 드는 비용, 비슷한 시기의 악공의 월급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유유춘전」: * 거지의 하루벌이가 말곡식, 돈 한움쿰
2. 「풍류」 : * 평양감사가 서울 기생에게 천금을 내림.
* 이세춘 일행이 벌어온 돈은 만금에 가까움
3. 「유송년전」: * 성천(成川)의 기악(妓樂), 그곳 기생의 법은 쌀 40석을 내놓으면 마음대로 기
생 한명을 골라 무한정 데리고 놀 수 있다.
* 기생의 치장에 수백냥
* 잔치의 비용도 수백냥
4. 「송경운전」: * 한 묶음의 비단, 만 꿰미의 돈이 연회의 비용으로 소비.
5. 「악장등록」: * 한필의 베(1723년 당시 장악원 악공의 한 달 월급)
6. 「道學先生」: * 부자를 ‘수수만금’의 부자로 표현

몇몇의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으로 일반화시켜 보기는 어렵지만 1723년 당시 장악원 악공의 한 달 월급이 베 한필임에 비해 도시 한가운데서 활동하는 거지의 하루벌이가 말곡식에 해당하고, 또 서울 기생이 출연료로 천금을 받았다는 사실, 이세춘 일행이 벌어온 돈이 만금에 가까웠다는 것, 기생의 치장에 수백냥을 들였다는 사실 등은 당시 음악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당대의 부자를 ‘수수만금의 부자’라고 표현하는 예에 비추어 볼 때 이세춘 일행이 평양감사의 회갑연에서 받아온 돈의 가치는 짐작이 된다. 물론 베 한필과 쌀 한말, 한 석, 한 묶음의 비단, 돈 한 꿰미, 만금 등의 화폐가치를 정확히 계산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당시 예술인들에 대한 대우가 어떠했는지 가늠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 일정한 예술 후원자의 비호 아래 활동했던 음악인들과 그렇지 않은 음악인들의 상황에 대한 비교도 가능해진다.


참고문헌
[樂掌謄錄]
朴晃, [판소리 二百年史], 思想硏, 1987
정노식(鄭魯湜),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 조선일보사 출판부, 1940
유득공(柳得恭), 「유우춘전(柳遇春傳)」 [영재집(泠齋集)] 卷 10.
李光庭, 「看羊錄」 [訥隱集] 卷 20.
김흥규, 「19세기 前期판소리의 演行環境과 사회적 기반」 [어문논집] 30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1
송지원 “조선시대 음악(인)과 후원의 양상” [한국의 예술지원사], 2009, 미메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