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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와후원자들

<음악가와 후원자들>

1) 서평군과 음악인들
서평군은 조선후기의 종실(宗室)로 학문이 깊고 달변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수시로 그 자문에 응하여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또 동지사 겸 진하사로 여러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타고난 달변과 깊은 학식을 바탕으로 복잡한 외교문제를 잘 해결하여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에 왕으로부터 많은 포상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점차 교만해져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사치를 하자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서평군은 특히 음악을 좋아하였다. 거문고 솜씨도 상당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영조 3년 당시 宗臣 63인을 불러 잔치하는 자리에서 서평군의 거문고 소리를 듣기를 청한 일도 있다. 서평군의 음악에 대한 애착은 그의 집에 음악을 전담하는 노비인 악노(樂奴) 10명을 데리고 있었고 희첩(姬妾)들도 모두 가무(歌舞)에 능한 사람들을 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옥(李鈺, 1760-1812)의 「가자송실솔전(歌者宋蟋蟀傳)」에 의하면 서평군은 가객(歌客) 송실솔의 노래를 좋아하여 날마다 그의 노래를 들었고, 송실솔이 노래하면 거문고를 끌어당겨 몸소 반주를 하기도 했다. 서평군의 거문고 솜씨도 또한 일세에 높아 서로 만나면 더없이 즐거웠다고 하였다.

공자는 집에 악노(樂奴) 10여명을 데리고 있었으며 희첩(姬妾)들도 모두 가무에 능하였다. 악기를 만지며 마음대로 환락한지 20여년에 세상을 떴다. 실솔의 동료들도 역시 모두 늙어 죽었으며 홀로 박세첨이 그의 처 매월과 함께 지금까지 북산 밑에 살고 있다. 종종 술이 거나해지고 노래가 그치면 사람들을 향해서 지난날 공자와 놀던 일을 회상하며 한숨을 쉬곤 했다.

「송실솔전」에는 이들이 연주한 음악으로 후정화(後庭花), 황계곡(黃鷄曲), 등의 곡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당시의 유명한 가객인 이세춘과 조욱자, 지봉서, 박세첨 등의 인물이 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이세춘은 「유우춘전」과 「풍류」 등 다른 한문단편에서도 자주 등장하여 당대의 가객 가운데 예술후원자의 비호를 많이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서평군을 후원자로 하는 모임에 가담하여 연주활동을 벌였다.


2) 심용과 연주단
심용(沈鏞, 1711-88)은 「청구야담」이나 「동야휘집」등의 야담류에만 나오는 실존인물이다. [이조한문단편집]의 「풍류(風流)」에 소개된 심용은 상당한 재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의를 좋아하며 풍류 생활을 즐기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의 주변에는 일세의 가희(歌姬), 금객(琴客)과 술꾼 시인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연일 손님들이 벅적거렸다. 또 장안의 잔치와 놀이에 심공을 청하지 않고는 벌일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하였다.
「풍류(風流)」에는 당시 선상(船上)에서 벌이는 연회의 형태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평양감사 선유도> 등에서 보았던 연회의 형태도 그려볼 수 있다.

어느날 심공이 가객 이세춘과 금객 김철석, 기생 추월․매월․계섬 등과 초당에 앉아서 거문고와 노래로 밤이 이슥해 갔다. 심공이 말하기를 ‘너희들 평양에 가 보고 싶지 않으냐?’…(중략)…‘내가 들으니 평양감사가 대동강 위에서 회갑 잔치를 벌인다는구나. 평안도 모든 수령들이 다 모이고 명기 가객이 뽑혀 오는데…(중략)…아무날이 잔칫날이라는구나. 한 번 걸음에 심회를 크게 발산할뿐더러 전두(纏頭)로 돈과 비단을 많이 받아 올 것이니 이 어찌 양주학(楊洲鶴)이 아니겠느냐?’ 모두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곧 길채비를 해서 떠났다.

인용문은 당시 심용의 비호 하에 있던 연주단을 데리고 멀리 평양감사의 회갑잔치에까지 원정공연을 떠나는 광경이다. 연주단을 데리고 당시 화려한 악무로 이름난 평양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은 심용의 재력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이 후원하는 음악인들에게 새로운 음악문화를 접하게 하는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 것이기도 하다.

심공이 평양에 도착한 다음날 잔치가 열렸다. 배 한척을 전세내어 청포 차일을 치고 좌우에 주렴을 드리우고 배 안에 기생과 가객, 악기를 실었다. 그리고 배를 능라도와 부벽정 사이에 숨겨 두었다. 이윽고 풍악은 하늘을 울리고 돛배가 강물을 뒤덮었다. 감사는 층배에 높이 앉고 여러 수령들도 모두 모여서 잔치가 크게 벌어졌다. 맑은 노래와 묘한 춤에 그림자는 물결 위에서 너울거리고 성머리와 강둑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심공은 이에 노를 저어 나아가서 층배가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배를 멈추었다. 저쪽 배에서 검무를 하면 이쪽 배에서도 검무를 하고, 저쪽에서 노래를 부르면 이쪽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마치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중략)…감사는 드디어 비밀히 명하여…(중략)…일제히 포위해서 끌고 오도록 하였다. 심공이 끌려서 층배 머리에 이르자 주렴을 걷고 껄걸 웃었다. 감사는 본래 심공과 친분이 깊은 터라 심공을 보고 넘어질 듯 놀라며 반가와했다...가기와 금객들이 저마다 평생의 재주를 다해서 진종일 놀았다.…(중략)…그날 당장 감사는 서울 기생에게 천금을 내렸으며, 다른 벼슬아치들도 각기 힘에 따라 상금을 내놓았다. 거의 만금에 가까운 돈이 들어왔다.

심공과 연주단은 평양감사 회갑연에 벌어지는 평양에 도착하였다. 이제 회갑연이 열린다. 심용은 바로 이 잔치판에 이세춘을 비롯한 음악인들을 데리고 원정공연을 간 것이다. 검무와 노래가 공연되었다. 이 날 심용이 데리고 간 연주단은 만금에 가까운 행하를 벌어들였다. 이상 강 위의 선상에서 벌이는 잔치에 대하여는 중앙박물관 소장의 <평양감사 선유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심용은 1788년(정조 12)에 생을 마친다. 심공이 서거한 뒤 그의 비호하에 있던 가객과 금객은 그의 장례를 지낸 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들은 평생 심공의 풍류 가운데 사람들이었고, 심공은 우리의 지기(知己)이며 지음(知音)이었다. 이제 노래 소리 그치고 거문고 줄은 끊어졌도다. 우리들은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비통해 하며 한 바탕의 노래와 거문고를 연주한 후 흩어져 돌아갔다. 이 부분은 후원을 입던 예술인들이 자신의 후원자에 대하여 어떠한 예로 다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3) 서상수의 후원
서상수(徐常修, 1735-1793)는 박지원․이덕무․이서구․유득공․박제가 등과 1768년 무렵 지금의 파고다 공원 자리인 원각사지 부근에 가까이하여 살면서 백탑청연(白塔淸緣)을 맺고 시서화악(詩書畵樂)을 즐기며 교유한 인물로 재력있는 예술애호가 겸 음악후원자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음악과 고전 등의 교양도 깊었고 또 소해(小楷)를 잘 썼다. 도봉산 서쪽에 동장(東庄)이라는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가난한 이덕무는 서상수의 도움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상수는 특히 음률에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정조 3년 7월에 경연관 송덕상이 당시 장악원 악기의 음률이 잘 맞지 않으니 서상수같은 인물을 불러 바로잡게 하도록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름없는 서류(庶類)라는 이유로 결국 기용되지는 않았다.
서상수는 당대의 악제(樂制)에 대하여도 잘 알고 있었으며 악기를 배울 때는 좋은 선생에게 찾아가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인식도 아울러 하고 있다. 서상수와 그룹을 이뤄 교류하던 유득공(1749-?)이 지은 「유우춘전(柳遇春傳)」의 기록이다.

“자넨 도무지 음악은 모르는군. 우리나라에는 두 갈래의 음악이 있는데, 하나는 아악(雅樂)이고 다른 하나는 속악(俗樂)이네. 아악은 옛날의 음악이고 속악은 후대의 음악이네. 사직(社稷)․문묘(文廟)는 아악을 쓰고 종묘(宗廟)는 속악을 섞어 쓰는 법이니 이게 이원(梨園)의 법부(法府)라네. 군문(軍門)에서 쓰는 것은 세악(細樂)이니 용맹을 돋우고 개가를 울리는 데, 완만하고 미묘한 소리까지 두루 구비치 않음이 없어 연회에서 이것이 쓰인다네. 여기에 철(鐵)의 거문고, 안(安)의 젓대, 동(東)의 장구, 복(卜)의 피리가 있으며 유우춘(柳遇春), 호궁기(扈宮其)는 나란히 해금으로 유명하지 않던가. 자넨 어찌 이들을 찾아가서 배우지 않고 그 따위 거지의 깡깡이를 배워 왔는가. 대개 거지들은 깡깡이를 가지고 남의 문전에서 영감 할멈 어린애 소리라든지 온갖 짐승이나 닭․오리․풀벌레 소리를 내다가 곡식 몇 움쿰 받아들고 가지 않던가. 자네의 해금은 바로 그런 따위이네.”

「유우춘전」의 저자 유득공은 서상수의 지우(知友)이다. 인용문에 제시한 「유우춘전」에서 서상수의 당대 악제(樂制)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가 악(樂)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다. 당시 장안에서 유명한 음악인에 대한 정보 또한 풍성하다. 아울러 ‘거리의 음악’과 ‘진정한 음악’에 대해 엄격히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상수는 유득공에게 계속하여 해금악사 유우춘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당시 “유우춘의 해금”이라 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주인공을 저자가 직접 찾아가기도 하며, 유우춘의 무리는 유득공의 집으로 찾아가 연주를 하기도 한다.
「유우춘전」을 통해 볼 때 서상수가 음악과 관련된 박학함과 음악인에 대한 정보가 풍성한 것은 평소 음악인들과의 교류가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손을 좋아해 누가 찾아오면 술상을 벌이고 거문고를 뜯거나 피리를 불어 주흥을 돋우는” 서상수의 음악 애호와 음악 이해는 당대 여러 음악인들에게 지적 토대와 풍성한 음악정보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4)김용겸과 박지원
김용겸(金用謙, 1702-1789)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손자이며 김창집(金昌緝)의 아들로 악률에 밝아 장악원 제조를 역임한 바 있다. 연암그룹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아 존장격으로 대우받던 김용겸을 박지원은 “풍류가 넘치고, 담론이 끊임없이 이어지는(風流弘長, 談論媚媚)” 선배라 묘사하고 있다.

선군(박지원)은 음률을 이해함에 정미했고 담헌은 악률에 밝았다. 어느날 선군이 담헌의 거실에 구라철사금(歐邏鐵絃琴(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구라철현금은 담헌이 연행시 가져왔는데 그 당시 아무도 타는 법을 몰랐다. 마침 선군이 이것을 풀어내려 하자 담헌이 말하였다. “연주하는 법도 모르면서 그걸 내려 무엇하려 하십니까?” 하고 웃었다. 선군은 시험삼아 작은 막대기로 그 줄을 짚으며 “당신은 가야금만 가져 오구려”라고 하며 가야금의 선율과 맞추었다. 가락에 맞추어 보기를 여러차례 하니 그 음조가 맞게 되었다. 이때부터 철현금이 우리나라에 성행하게 되었다. 당시 금사(琴師) 김억(金億)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별호는 풍무자(風舞子)였는데 바로 교교재 김공이 그렇게 명명하였다. 그는 특히 철현금을 새로 번곡하길 즐겼는데 마침 담헌의 거실에 함께 모였다. 이날 저녁 달빛 아래 음악이 조용히 연주되는데 교교재 김공이 기약도 없이 이르렀다. 생황이 어울려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그는 마음에 흡족하여 책상위에 놓인 동반(銅盤)으로 박자를 맞추며 「벌목장(伐木章)」의 시구(詩句)를 읊으며 흥을 돋운다.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지은 [과정록(過庭錄)]의 기록이다. 내용을 보면 박지원이 즉석에서 양금을 탄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연암그룹의 모임에 장악원 악사인 김억을 불러 함께 연주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모임에는 장악원 소속의 악인(樂人)이 함께 하기도 하여 당대 궁정의 연주인이 민간 지식층과 함께 음악 교류를 하였음을 알려준다.
김용겸은 장악원 제조를 역임한 바 있는 인물이다. 음률에 민감한 김용겸은 장악원 제조를 지내면서 이미 전문 음악인들과 친분이 두터웠음에 분명하다. 김용겸은 인용문에서처럼 장악원의 악사들을 자신의 모임에 늘 끌어들였다. 이는 음악 전문인들과 문인들과 교류의 장을 열어 주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문인들은 기예에 뛰어난 전문 음악인들을 불러 함께 연주하면서 음악적인 면을 심화시키는가 하면 장악원 소속의 음악인들은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지적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과정록]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본다.

우리집에는 이전에 생황과 거문고 등 여러 악기가 있어서 혹 김억의 무리가 찾아오면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담헌공(1731-1783)이 돌아가시자 지기를 잃은 슬픔 때문에 다시는 음악을 듣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5년 뒤 우연히 담헌 댁에 들르셨는데, 돌아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시더니 그 악기들을 모두 남들에게 주어버렸다. 이 때문에 나는 어릴 때 생황이나 거문고 따위의 악기를 본 적이 없다.(박종채 1780-1835) 그 후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시자, “산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데다 시절도 태평하니 풍악을 울려야 마땅하다”라고 말씀하셨다. 마침 장악원의 늙은 악공 중에 은퇴하여 영남 땅을 떠도는 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불러다가 보수를 줘가며 음악적 재능이 있는 자들에게 몇 달 간 노래와 음악을 가르치게 하는 한편, 서울에서 유행하는 음악도 전수하게 하셨다. 그래서 당시 안의현의 음악은 경상도에서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박지원은 장악원 출신 악사인 김억의 무리가 찾아오면 생황과 거문고 등의 악기를 함께 연주하여 왕성한 음악활동을 하였다. 또 늘 함께 음악을 연주하곤 하였던 홍대용이 죽자 지기를 잃은 슬픔에 음악을 듣지 않다가 자신의 악기들을 모두 남들에게 주어 버렸다고 하니 박지원의 음악에 대한 애착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박지원은 이후 안의현감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음악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영남 땅을 떠도는 장악원 악공 출신 노악사를 찾아내어 보수를 줘가며 그곳 사람들 가운데 재능이 있는 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서울의 유행음악도 전수하게 하여 지방에서 서울의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안의현감이었던 박지원의 이러한 노력은 당시 안의현의 음악 수준을 경상도에서 으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5) 이정보와 계섬
이정보(李鼎輔; 1693-1766)는 영조대에 대제학을 지내면서 예조판서를 겸임한 인물로 음악을 잘 이해하고 좋아했다. 자신의 집에 음악하는 사람을 많이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0여수에 달하는 시조를 남기기도 한 인물인데, 이정보와 계섬이라는 음악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예술 후원의 하나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계섬은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이라는 문인에 의해 「계섬전」으로 입전되어 주목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계섬은 원래 황해도 성화현 출신으로 대대로 고을 아전을 지낸 집안 출신이었으나 7세 때 아버지를 잃고 12세에 어머니마저 잃자 고아가 되어 공노비의 적에 오르게 되었다. 나이 16세에 노래를 배워서 ‘성비(聲婢)’가 되어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가며 음악활동을 계속했던 인물로, 여러 집을 거친 후 이정보의 집에 들어가면서 그의 후원 아래 있게 되었다.
이정보의 후원 아래 있으면서 계섬은 꾸준히 노래공부를 이어갔다. 여러 해 공부를 통해 계섬의 노래는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녀가 노래를 할 때면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하늘하늘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노래 실력이 나날이 좋아져 계섬의 이름은 온 나라에 알려졌다. 노래공부를 하고자 하는 이들 치고 계섬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가기(歌妓)들이 서울에 와서 노래를 배우고자 하면 모두 계섬에게 몰려들어, 학사대부들이 노래와 시로 계섬을 칭찬하는 이들이 많았다.

태학사 이정보가 늙어 관직을 그만두고 음악과 기생으로 자오(自娛)하면서 지냈는데 공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남녀 명창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도 계섬을 가장 사랑하여 늘 곁에 두었으니 그의 재능을 기특히 여긴 것이요 사사로이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악보에 따라 교습하여 수년의 과정을 거치니 계섬의 노래는 더욱 향상되었다.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하늘하늘 집안에 울려 퍼졌다. 이에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떠들썩하게 되니 지방의 기생들이 서울에 와 노래를 배울 때 모두 계섬에게 몰려들었다. 학사대부들이 노래와 시로 계섬을 칭찬함이 많았다.


이정보는 계섬의 이러한 활동을 묵묵히 지지해 주었다. 사사로이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재능을 귀하게 여겨 후원한 경우이다. 이정보의 후원형태의 경우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오직 자신의 귀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음악인의 후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후원아래 있음에도 오직 자신만의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 후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후원했던 인물로 하여금 기량을 꾸준히 연마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에 그치지 않고 다른 음악인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하였으니 이정보의 후원을 통한 계섬의 음악적 성장은 조선후기 음악문화의 긍정적 확산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6) 송인과 석개
송인(宋寅, 1516~1584)은 16세기에 문장과 인망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 중종의 사위이기도 하다. 특히 서법(書法)에 뛰어나 금석문의 글씨가 늘 그의 손에 맡겨졌고, 집에는 그를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송인의 집에는 석개(石介)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주로 물 긷는 일이나 약초 캐는 허드렛일이 맡겨졌다. 그러나 석개는 그러한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노래 부르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약초를 캐라고 내보내면 어느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주변에 작은 돌멩이를 수북하게 모아 놓고,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나면 돌멩이를 하나 집어 광주리에 넣고, 또 한 곡 부르고 나면 다시 돌멩이를 광주리에 넣었다. 광주리에 돌이 가득 차고 나면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돌멩이를 하나씩 꺼내 놓고, 또 한 곡 끝나면 다시 꺼내어 광주리를 비우곤 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주변의 만류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노래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석개의 이야기는 결국 송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송인은 석개에게 남다른 점이 있다 생각하여 노래를 정식으로 배울 것을 허락하였다. 노래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자 그녀의 노래실력은 나날이 좋아졌다.
석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장안에서 제일 잘 하는 음악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근 100여년 동안 그녀만한 명창이 없었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당시 최고의 노래실력을 지닌 석개가 잔치자리에 출연을 하면 금과 비단이 수없이 쌓였다. 석개는 예상치 못하던 부도 축적하게 되었다. 노래가 좋아서 노래에 전념한 결과, 실력은 물론이고 명성과 부가 함께 따르게 되었다. 후에 딸을 하나 낳아 옥생(玉生)이라 이름 지었는데, 그녀의 딸 역시 어머니의 재주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당시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석개의 음악은 당시 여러 명상들을 감동시켰다. 석개의 노래를 듣고 그녀를 위해 지은 시가 많이 남아 있다. 홍섬(洪暹), 정유길(鄭惟吉), 노수신(盧守愼), 김귀영(金貴榮), 이산해(李山海), 정철(鄭澈), 심수경(沈守慶) 등이 남긴 시에서 석개의 예술적 재능을 칭송하고 있다.
석개는 송인의 사후에도 여전히 여러 문인들의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송인이 지어 놓은 동호(東湖)의 수월정(水月亭)에 가면 그를 생각하면서 석개의 이야기를 시로 썼다. 여러 벗들과 달밤에 한강에서 뱃놀이를 한 후 수월정에 올라가 풍류를 즐길라치면, 훌륭한 음악가로 거듭난 석개의 이야기는 늘 그들의 시심을 자극했고 화제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였다.
석개의 노래무대가 되었던 동호의 수월정은 난리를 치르면서 불타 없어졌으나 이후 송인의 손자 기(圻)가 시정(寺正)으로 있으면서 옛 정자의 터에 초당을 짓고 단청을 새로 하여 편액까지 다시 걸었다. 새로 지은 수월정에 모인 이들은 고인(故人)이 된 송인과 송인이 발굴하여 키운 음악가 석개를 생각하며 감회를 서술하였다. 신흠은 5언율시로 그 감회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상촌집(象村集)]의 내용이다.

出郭仍遵浦 성곽을 나가 포구를 좇아 移舟晩趁陰 배를 옮겨가니 저녁이 되었네 新涼眞解事 초가을 서늘함은 진정 사리를 알겠고 佳客亦聯襟 반가운 손들 또한 옷깃을 연이었네 俛仰悲遷逝 구부리고 우러르며 세월가기 슬퍼하고 江山閱古今 강산은 끝없이 고금을 겪었네 黃昏正容與 황혼의 경치 참으로 넉넉한데 月色亂盃心 달빛에 술잔이 어지럽네

송인은 떠났지만, 송인이 지은 정자는 그 손자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고, 바로 그곳에 신흠, 이수준, 신익성 등의 반가운 벗들이 모여 함께 한강을 유람하며 시를 지었다. 예전에 수월정에 노닐던 송인과 송인이 그 노력과 재능을 알아보고 노래 배울 것을 허락하여 큰 음악가로 일가를 이루게 된 석개의 이야기는 송인보다 쉰 살 아래인 신흠의 시심이 되어 이처럼 시가 되었다.
석개의 출신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노비라는 신분에서 일가를 이룬 음악가로 성장하는 과정에는 송인의 안목이 큰 역할을 하였다. 여성음악가 석개는 허드렛일을 하며 평생을 보낼 뻔 했지만,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노래에 전념한 결과 음악활동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송인의 안목이 한 음악가를 키운 것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심수경, [遣閑雜錄]; 신흠, [象村集]; 유희춘, [眉巖日記]
沈魯崇 저, 김영진 역 [孝田散稿], 태학사, 2001
박종채 저, 박희병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개, 1998
유몽인 저, 신익철 외 번역, [於于野談)]
송지원 “조선시대 음악(인)과 후원의 양상” [한국의 예술지원사], 2009, 미메시스
송지원, [옛 음악인 이야기-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고], 2009, 태학사


<거대권력의 개인후원; 대원군>

거대권력이 음악가 개인을 후원한 사례로 대표되는 것은 19세기의 가객 박효관과 안민영이 대표된다. 박효관은 대원군의 비호 아래 있던 가객이다. ‘운애(雲崖)’라는 호를 대원군이 하사한 데에서 보이듯 대원군의 후원은 각별한 것으로 보인다. 또 박효관과 함께 가악(歌樂)활동을 했던 제자 안민영의 호도 대원군이 하사하였다. 박효관과 안민영의 활동을 통해 19세기 거대권력의 개인 후원 양상을 일부나마 감지해 볼 수 있다. 특히 안민영의 저술인 [금옥총부(金玉叢部)]에는 그러한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풍류를 좋아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자신이 풍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음악인들에 대한 후원 자 역할을 자처하였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민영 등은 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을 비롯하여 삼청동, 공덕리 등을 드나들면서 대원군을 위한 음악연주를 자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옥총부(金玉叢部]에 다음의 기록이 보인다.

석파대로는 임신년(1897, 고종9) 봄에 공덕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셨는데, 하루는 석양이 질 무렵 문인(門人)및 기공(技工)을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오르셔서 크게 풍악을 베풀면서 환오(歡娛)하였는데, 그 사이 해는 지고 달이 떠올랐다. 이에 탄식하며 말씀하시는데, ‘내 나이 이제 50이 넘었으니 이제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가. 우리들이 내생(來生)에서도 한곳에 모여 금세에 미진한 연을 잇는 것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무리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머금었다.

위의 정황은 대원군이 음악인들과 함께 하던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대원군은 안민영보다 4년 년하로서 안민영에 대해 특별한 비호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민영의 회갑(1896. 6.29) 때에는 공덕리 추수루(秋水樓)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기악(妓樂)을 불러 종일 즐기도록 한 것도, 그러한 정황을 잘 알려준다. 또 대원군의 장남인 완흥군(完興君) 이재면(李載冕, 1845-1912)도 박효관, 안민영을 비롯한 여러 음악인들의 후원을 했던 양상이 [금옥총부]에 보인다. 음악 후원자 가운데 실권자 혹은 거대권력이 음악사에 두드러지게 노출되는 것은 19세기의 일로 보이는데 [금옥총부]에는 그러한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금옥총부]에서 드러나는 음악인들의 활동 양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특히 부정적인 시선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임형택은 그의 [문화사적 현상으로 본 19세기]에서 이들의 활동에 대해 ‘재롱을 떠는 꼴’, ‘주체가 서서 내려진 판단인지’, ‘앵무새 소리’, ‘아첨의 소리’와 같은 표현을 써서 평가하였고, ‘안민영 그룹과 대원군의 관계는 예술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하지 못했고’, ‘대원군 집정기 예술인들은 전반적으로 시녀화된 나머지 보수적 성향을 드러내었으며’ ‘안민영은 대원군 주변에서 향락생활의 보좌역을 줄곧 담당한 것 같다.’고 평가한 바 있다. 또 박노준도 그의 「안민영의 삶과 시의 문제점」 [조선후기 시가의 현실인식]에서 안민영이 지은 왕실을 송축하는 내용의 시에 대해 ‘낮은 수준의 아첨의 악장류’ ‘안민영의 비극이요 불행’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러나 19세기 가곡 발달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가곡원류]를 편찬한 두 인물, 박효관, 안민영이 [금옥총부] 편찬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고, 또 [금옥총부]의 내용 가운데 그들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며 음악적으로 다양한 활동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활동 양상에 대해 기존의 평가 외에도 보다 구체적 진단이 필요하다.
[금옥총부]의 내용 가운데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음악인들의 교류양상이다. 특히 안민영의 활동반경을 보면 대원군 주변에서 운현궁을 비롯한 궁이나 양주 직동의 조그마한 별장, 대원군의 휴식처인 창의문 밖 삼계동의 정자, 운현궁의 사랑, 후원의 산정 등 권력의 주변에서 활동하면서 시를 제작한 내용은 물론 박효관의 운애산방(雲崖山房), 영남지역 문경의 조령, 연풍의 산장, 해주의 부용당, 동래부, 밀양, 필운대, 연광정, 통영, 거제, 진주, 광주, 남원, 운봉, 전주, 금강산, 진양, 창원, 순창, 담양, 홍천 등, 전국을 각기 다른 목적으로 거쳐가면서 각 지역의 음악인들을 만나고 음악적 교유를 이루었다. 이러한 활동반경은 한 음악가 개인의 물적 토대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에는 거대권력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로 해석된다. 안민영은 실제 전국 각 지역을 두루 다니며 지역마다 음악인들의 활동 현황, 활용 가능한 인렫 등에 대해서도 조사를 함께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안민영의 활동을 통해 궁중 소속의 음악인이 아닌 민간에 기반을 둔 음악인들이 궁중을 드나들며 음악활동을 전개하는 새로운 양상을 볼 수 있다. 18세기 궁중음악의 연행이 주로 장악원 악인(樂人)을 중심으로 치러졌던 현실과 크게 비교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상은 특히 가곡을 연주하는 가객(歌客) 집단에게 두드러진다. 이를 통해 가객이 주로 연주하는 ‘가곡‘(歌曲)의 19세기적 정황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음악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음악과 음악인이 궁중에 들어가 그들의 음악을 선보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은 판소리의 궁중진입 현상과도 일치한다. 19세기 말엽 판소리의 호황에 따른 결과인 ‘판소리라는 개체의 질적 향상’은 판소리를 궁중 안에서 연행하는 음악쟝르가 되도록 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금옥총부]의 내용이 그러한 19세기적 정황을 풀어내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거대권력의 음악후원 결과의 하나로 풀이되며, 그 후원의 결과 궁중음악과 민간의 음악이 교류할 수 있는 지점이 마련되었다.

참고문헌
[金玉叢部]
송지원 “조선시대 음악(인)과 후원의 양상” [한국의 예술지원사], 2009, 미메시스
송지원, [옛 음악인 이야기-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고], 2009, 태학사


<효명세자의 후원>

효명세자는 1809년에 태어나 1830년까지 22년의 짧은 시기를 살았던 인물로 19세기 궁중정재 창제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효명세자 예제(睿製)의 궁중정재로는 망선문(望仙門), 춘대옥촉(春臺玉燭), 영지(影池), 경풍도(慶豐圖), 보상무(寶相舞), 만수무(萬壽舞), 헌천화(獻天花), 무산향(舞山香), 박접(撲蝶), 춘앵전(春鶯囀), 첩승무(疊勝舞)와 무고(舞鼓), 아박(牙拍),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 제수창(帝壽昌), 최화무(催花舞), 무애), 사선무(四仙舞) 등이 [무자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와 [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 등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효명세자가 직접 창작한 것과, 순조대 이전에 창작된 정재에 효명세자가 창사를 새로 지은 경우도 포함한다.
효명세자가 궁중정재를 많이 창제했던 의도와 의미, 또 그것의 예술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고, 여전히 보다 치밀한 해석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예술사적 의미를 결과론적으로 진단하면 이들 궁중정재의 창제가 조선시대 공연문화 확장에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효명세자가 예제한 궁중정재에서 주목되는 것은 ‘정재를 연행할 때 수반되는 음악의 변화’와 관련되는 내용으로 궁중정재에서 가곡 선율을 연행하는 경우이다. 이는 ‘민간음악의 궁중진입’, 나아가서는 ‘민간에 기반을 둔 음악인의 궁중진입’의 코드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19세기에 난만한 발달을 보이는 ‘가곡’이 어떠한 현장에서 어떠한 형태로 수용되고 있는지, 그 양상 가운데 하나를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되는 것과 동시에 거대권력의 음악후원의 한 형태로 드러난다.
19세기 효명세자가 예제한 궁중정재에서 노래로 불려지는 ‘악장’혹은 창사(唱詞)의 연행이 이전 시기와 다른 특징은 앞서 언급한 바대로 곧 ‘가곡 선율의 채용’이다. 예컨대 ‘무애무’(無㝵舞)에서는 ‘산하만세사(山河萬歲詞)’와 ‘남산송백사(南山松柏詞)’, ‘남극수성사(南極壽星詞)’ 등의 악장을 편(編) 계통의 가곡 선율로 노래하였고, ‘경풍도’(慶豐圖)에서는 ‘올도 풍년(豊年)이요’로 시작하는 창사를 가곡 ‘편’으로 노래하였으며 ‘만수무’(萬壽舞)에서는 ‘어져 만재(萬載)이여’로 시작하는 창사를 ‘편’으로 노래하였다. 이밖에 효명세자 예제가 아닌 정재로서 ‘향령무’(響鈴舞)에서는 ‘옥전요궁주관현(玉殿瑤宮奏管絃)’으로 시작하는 창사를 '계락‘(界樂) 선율로, ’봉래의‘(鳳來儀)에서는 ‘주국태왕(周國太王)이’로 시작하는 창사를 ‘계락’ 선율로, ‘사선무’(四仙舞)에서는 ‘어와 성대(盛代)로다’로 시작하는 창사를 ‘편’ 선율로 노래하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19세기 궁중정재에서 노래로 불려진 것은 가곡의 모든 선율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계락’과 ‘편’의 두 가지이다. 가곡 ‘락’(樂)과 ‘편’(編)은 이미 [청구영언](靑丘永言) 시대, 즉 18세기 전반에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락’ 중에서 계면조로 된 ‘계락’(界樂)은 19세기 전반에는 계락과 편락, 언락의 형태로 분화되었음에 반해 우조로 된 ‘우락’(羽樂)은 19세기 초에도 여전히 분화되지 않고 ‘우락’선율 하나만이 통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여러 파생곡을 형성한 계락의 인기가 같은 ‘락’ 선율 가운데서도 더욱 높았음을 알 수 있고, 바로 그런 계락 선율이 궁중정재의 창사로 쓰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곡 '편' 선율이 사용되는 정황은 ‘편’ 중에서도 그것이 편수대엽인지, 편락, 우편, 언편 중 어느 것인지 확언하기 어렵지만 10박 편장단의 음악으로 연행하였다는 사실까지는 확인된다. 노랫말의 자수가 많기 때문에 엮어 부르는 방식의 연주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와 아울러 ‘경사’(慶事)에 해당하는 잔치에서 연행하는 음악이 가곡 중에서도 후반부에서 긴장을 다소 풀고 연주하는 음악인 ‘편’ 계열의 선율을 채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궁중정재에 수반되는 창사를 가곡 선율로 노래하기 위해서는 궁중에 소속된 악인(樂人)이 궁중 안에서 교육되는 커리큘럼 내에서 소화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19세기 궁중에서는 가곡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은 궁중 밖, 민간에 활동 기반을 두고 있는 가객(歌客)들을 자연스럽게 궁중 안으로 유입시켜 민간의 노래와 궁중에서 연행되는 악무를 만나게 할 수 있는 합당한 조건이 되었다. 그 수순으로 볼 때 음악이 필요해서 가객을 불러들인 것인지, 아니면 가곡의 인기가 자연스레 가객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것인지 그 선후관계는 따져볼 필요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가객들이 궁중의 주요 연향에서 노래할 수 있는 시기가 된 것이 19세기의 일이고, 좀 더 정확하게 효명세자가 그 물꼬를 튼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효명세자 이후 민간 가객이 궁중에 들어와 활동한 기록은 앞서 언급한 [금옥총부]에 상세히 나타난다. 안민영은 그의 스승 박효관과 가집 [가곡원류]를 편찬한 바 있고, 그의 음악활동은 국내 전 지역에 걸쳐 활발하게 펼쳐져 있었으며 그가 교유한 음악인들은 가객을 비롯하여 판소리 명창, 기악 부분의 명인들까지 아우르고 있다. 안민영, 박효관과 대원군, 그리고 대원군의 아들 이재면이 이들의 거대 후원자[patron]였다는 사실은 19세기 가곡의 궁중 출입, 혹은 19세기 가객의 궁중 출입을 자연스럽게 하도록 했음에 분명하다. 가곡, 혹은 가객의 궁중 출입이 주는 의미는 ‘궁중의 음악’ ‘민간의 음악’이라는 도식을 자연스럽게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가 되고, 나아가 보다 완성도 높은 음악이 연주되는 무대가 바로 중앙[궁중]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19세기 궁중 안에 들어와 있던 음악 가운데는 지방 관아에서 연행되는 정재도 있었고(검무(劍舞)가 대표적이다), 또 민간에서 연행되는 가곡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역으로 그 이전 시기 궁중에서 연행되던 보허자, 여민락과 같은 음악이 이미 민간으로 나아가 현악기 위주의 방중(房中)에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으로 화(化)하는 맥락과 반대되는 현상이지만 궁중과 민간의 음악 교유의 한 현상으로 기록될 수 있으며 그 중심에는 거대권력의 후원이 작동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金玉叢部], [己丑進饌儀軌], [戊子進爵儀軌]
송지원 “조선시대 음악(인)과 후원의 양상” [한국의 예술지원사], 2009, 미메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