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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

무동(舞童)

궁중의 여러 제사와 연향에서 여악(女樂) 대신 음악과 춤을 담당하는 8세 이상 14세 이하의 나이 어린 소년을 지칭하며 남악(男樂)이라고도 한다. 무동의 제도는 태종 이래로 중국의 사신들이 여악을 비례(非禮)라 하여 물리친 데서 비롯된다.
원래 무동은 각 사(司)의 유한(有限)한 노자(奴子)와 양인에게 출가한 자의 소생으로 보충하였으나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무동의 선발은 세종대의 경우 어린 사내아이 즉 동남(童男)중에서 11세 이상 13세이하의 나이로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과 기질이 총명하여 정재(呈才)를 출 수 있는 아이로 가려 뽑되 각도에 일정하게 인원을 배당하였다. 세종13년(1431)에 경상도 15명, 전라도 10명, 충청도 7명, 강원도 7명,경기.황해.평안도에 각 5명, 함길도에 3명씩 배정되어 모두 57명을 정원으로 하였다.
서울과 지방에 명부를 만들어 무동으로 들어온 후 나이가 많아져 쓸 수 없는 경우나 사고가 있어 일할 수 없게 되면 고을에 배정된 기준에 따라 보충되었다. 그 중에 음악을 잘 익혀 악공이 될만한 자격을 갖추면 장악원의 악공으로 일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무동을 뽑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일정 정도 성장을 하게 되면 더 이상 무동으로 일 할 수 없는 특수성 때문에 새롭게 충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에 충원대안으로써 비첩(婢妾)이 나은 자손 중에서 학생 및 백정 보충군, 즉 양인의 신분이지만 천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자손이나 기녀(妓女)로서 양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 또 기녀로서 7품 이하 관리에게 시집가서 나은 자 가운데 음률 전습이 가능한자와 무녀의 자손 중 8세 이상인자 등을 조사하여 무동으로 충원하는 방안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동은 세종29년(1447)에 지속적으로 무동 충원의 어려움이 따르게 되자 혁파하게 되었으며 일부는 악공에 소속하게 하였다. 그 대신 궁중의 회례연이나 양로연, 사신을 연향하는 잔치에는 악공이 맡았다 그 후 치폐를 거듭하면서 무동이 여러 의례에서 정재를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무동으로 정속(定屬)할 때는 이들에게 봉족(奉足) 2인을 주어 그 본가를 돌보게 한 다음, 그 나이가 장성하면 다시 악공(樂工)으로 이속(移屬)시키고, 전의 근무 연한까지 함께 계산하여 거관(去官)하게 하였다. 즉, 무동이 나이가 차면 악공으로서 일할 수 있는 길이 트여져 있었다.
무동으로서 뒤에 악공이 되어 주악(奏樂)을 담당하는 예는 순조·헌종·고종 때의 여러 가지 진찬의궤(進饌儀軌)와 진연의궤(進宴儀軌) 등에서 많이 발견된다.
1940년대까지 생존하여 이왕직 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악사로 활동한 바 있는 사람으로는 이수경(李壽卿)·이용진(李龍振)·고영재(高永在) 등이 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進爵儀軌(純祖戊子), 進饌儀軌(純祖己丑), 進饌儀軌(憲宗戊申), 進宴儀軌(高宗光武 5·6년).조선시대 장악원의 악인과 음악교육 연구(송지원,한국국악학회, 한국음악연구43,2008),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