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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

성소부부고(惺所覆螺藁)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許筠)의 문집. 8권 1책. 필사본. 작성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만력(萬曆) 계축에 쓴 이정기(李廷機)의 서문으로 미루어 보면 1613년(광해군 5) 봄이나 그 전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허균의 일생 중에서 가장 불우했던 시기이다. 그가 칩거하면서 그동안 저술한 시와 산문들을 모아 시부(詩部)·부부(賦部)·문부(文部)·설부(說部) 등 4부로 나누어 정리한 초고이다.

외손인 이필진(李必進)의 발문에 “부부고라는 것은 외조부 교산의 유고이다. 부부·문부의 6권 외에 또 시부가 있어 모두 8권인데 전질을 손수 썼다. 〈갑진명주고 甲辰溟州藁〉·〈서관행록 西關行錄〉·〈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 제2권은 옥사가 일어나자 마침내 모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이것을 정리하여 우리 집에 보내게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발문에 적힌 〈갑진명주고〉 이하 몇 권의 저술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년의 저술들이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허균은 역적의 괴수로 극형을 받고 죽었기 때문에 그의 문집은 공간될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래 필사하여 전해졌으므로 오자낙서가 적지 않다. 저본은 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사본이다. 책마다 첫 장에 정조대왕이 세손 때에 사용한 장서인인 ‘관물헌(觀物軒)’과 ‘이극지장(貳極之章)’이라는 어인이 찍힌 귀중본이다.

≪성소부부고≫의 구성은 시부·부부·문부·설부 등 네가지로 나누어 수록하여 일반 문집의 편찬체재와 다르다. 그러나 각 부의 배열을 보면 부부와 문부의 내용은 일반 문집의 체재와 거의 비슷하다.

≪성소부부고≫의 시부는 〈정유조천록 丁酉朝天錄〉·〈남궁고 南宮藁〉·〈궁사 宮詞〉 등과 같이 시기나 주제별로 묶어서 수록하고 있어 이색적이다. 이러한 체재는 이후에 많은 문집에서 채택되었다. 보통의 경우 설부의 내용은 잡저라 하여 문부의 일부에 편입시키거나, 혹은 패설류를 혼합하여 분별없이 수록하는 것이 상례이다.

≪성소부부고≫의 체재는 설부를 다시 ‘지소록(識小錄)’·‘시화(詩話)’·‘도문대작(屠門大嚼)’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어 편찬의 면밀성을 읽을 수 있다. 시부에는 곳곳에 이달(李達)과 권필(權億)과 같은 대시인의 평어를 세주로 실었다. 이점은 허균의 시에 대한 그 시대의 높은 평가를 확인시켜준다. 작품 가운데 〈풍악기행 楓嶽紀行〉 47편, 〈궁사〉 100편, 〈열악 閱樂〉 8편 등은 절창으로 그 시대에 널리 회자되었다.

권필은 허균의 〈궁사〉를 높이 평가하여, “궁중의 사실을 눈으로 보듯이 모두 열거하였으니, 족히 일대의 시사(詩史)가 될만하다. 송·원의 사람이라도 감히 따를 수 없으니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열악〉을 “여러 시들이 모두 밝고 높고 화려해서 다른 작품과 같지 않으니 이것이 절창이 된다.”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성소부부고≫의 설부에 실려 있는 ≪성수시화 惺馬詩話≫는 별도로 전하는 ≪학산초담 鶴山樵談≫과 함께 우리 나라의 역대시화 가운데 주목할만한 것이다. 모두 85수의 시화를 수록하였다.

허균의 선시안(選詩眼)과 비평은 그 시대나 후대에도 익히 인정되었다. 그의 시대에는 복고의 풍조가 성행하여 송시에서 당시(唐詩)의 경향으로 옮아가던 시기였다. 그의 시에도 이러한 당시풍은 그대로 반영되었고, 비평의 기준 또한 성당(盛唐)을 표준으로 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시풍을 당시풍으로 옮겨놓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성소부부고≫는 허균이 스스로 편집하였고, 체재에 있어서의 참신성으로 후대 문집에 좋은 모범이 되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1961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처음으로 영인하여 소개되었고, 그 뒤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여 출간되었다.

참고문헌: 국역성소부부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