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인간관계 및 사건

연관목차보기

인간관계 및 사건

오케(Okeh)레코드, 조선악극단 관련 인물들의 다양한 인간관계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한 많은 인물들은 단순히 같은 조직에서 활동했다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개인적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혈연이나 결혼으로 맺어진 친인척 관계도 있고, 서로 협력하는 관계도 있고, 경쟁하거나 갈등을 이루는 관계도 있다. 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다소 은밀한(?) 관계도 있었다. 그러한 다양한 인간관계를 유형별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부부

결혼관계, 즉 부부로 인연을 맺은 대표적인 인물은 이철(李哲)·현송자(玄松子), 김해송(金海松)·이난영(李蘭影), 고복수(高福壽)·황금심(黃琴心), 봉일(峯一)·서봉희(徐鳳姬) 등이다. 이철과 현송자의 결혼은 오케레코드를 존재하게 한 단초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결혼 전에도 음악전문출판사를 운영하는 등 사업 수완을 발휘한 이철이었지만, 그가 오케레코드를 설립하게 된 데에는 부인 현송자을 통한 인맥의 활용이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즉, 현송자가 결혼 전 일본에서 유학을 할 때 사귄 일본인 친구의 아버지가 데이치쿠(帝蓄)레코드에서 영향력 있는 중역이었기에, 데이치쿠레코드의 협조를 얻어 오케레코드가 음반을 발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송자는 이후 이철이 오케레코드 운영 일선에서 물러나 1938년에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할 때에도 임원으로 참여했다. 물론 서류상으로만 이름을 올리고 실제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기는 하지만, 이철이 사업의 동반자로서 부인 현송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3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한 김해송과 이난영은 당대를 대표하는 스타커플로 애증과 영욕이 교차하는 15년을 보냈다. 임신한 상태에서 결혼했고, 이후로도 거의 해마다 아이를 낳아 모두 12남매를 두기도 했지만, 이난영은 1940년에 같은 조선악극단 단원(누구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과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기도 했고, 1948년에는 춘천 소양강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김해송의 외도, 즉 무용가 홍청자(洪淸子)와의 관계가 자살 시도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광복 이전 조선악극단과 광복 이후 K.P.K악단에서 무대음악가로서 천재적인 역량을 선보였던 김해송은, 1950년 6·25전쟁 와중에 북한군에게 끌려가게 되면서 이난영과의 관계를 비극적으로 끝맺고 말았다.

김해송·이난영 못지않은 스타커플인 고복수·황금심 부부는 결과적으로 보아 오케레코드·조선악극단과 그다지 좋은 관계로 끝을 보지 못한 경우이다. 황금심은 오케레코드에서 1937년에 먼저 발굴을 했지만 빅타(Victor)레코드에서 가로채는 바람에 결국 오케레코드를 떠났고, 고복수는 최초의 걸작집 가수로 한때 오케레코드의 간판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1940년에 계약 문제로 이철에게 도전하다가 결국 사실상 쫓겨나고 말았다. 오케레코드에서 물러난 고복수는 바로 빅타레코드와 관련이 있는 공연단체인 반도악극좌에 참여했고, 거기서 황금심과 재회해 결혼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달리 보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것도, 다시 재회하게 된 것도 어쩌면 오케레코드 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회 오케레코드 콩쿠르에서 입선한 봉일과 조선악극단의 마스코트 저고리시스터즈의 막내로 활동한 서봉희는 화려한 스타는 아니었지만, 신진 연예인 커플로 주목 받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두 사람은 광복 이후 사실상 연예계를 완전히 떠나고 말았는데, 봉일의 집안이 원래 부유한 편이었기에 가업 또는 다른 사업을 하느라 가수 활동을 그만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제자매

오케레코드·조선악극단 소속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형제자매는 이봉룡(李鳳龍)·이난영(李蘭影) 남매이다. 이봉룡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사실상 이난영의 보호자 역할을 했고, 이난영이 오케레코드에서 가수로 데뷔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난영이 처음 음반을 녹음한 곳은 태평(太平)레코드였지만, 당시 미성년자였던 이난영을 법적으로 대리할 수 있는 보호자 이봉룡이 오케레코드를 선택해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이난영은 그러한 오빠를 언제나 각별하게 생각해 이봉룡이 가수로 데뷔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고, 이봉룡의 데뷔곡 <고향은 부른다>를 함께 녹음하기도 했다. 가수로서 소질이 없었던 이봉룡은 이후 연주가·작곡가로 전향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이난영은 남편 김해송(金海松)에게 부탁해 이봉룡의 음악적 성장에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인수(南仁樹)와 쌍벽을 이루었던 남자가수 김정구(金貞九)와 그의 형 김용환(金龍煥)도 함께 오케레코드에서 활동한 경우이다. 단, 김용환은 오케레코드 전속으로 있지는 않았고, 김영파(金玲波)라는 예명으로 작곡을 해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김정구의 많은 히트곡 중에는 형 김용환의 작품이 적지 않는데, 영화 <思ひつき夫人>에 출연해서 부른 <돈타령>도 바로 김용환이 작곡한 것이다.

무용가로 조선악극단 무대에서 인기를 모았던 김능자(金綾子)의 언니는 역시 무용가로 활동한 김소군(金小君)이다. 김소군은 조선악극단 이전 단계인 오케연주회에서 주로 활동했고 김능자는 조금 늦은 1930년대 후반부터 주로 활동했으므로, 자매가 함께 조선악극단 무대에 선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형제자매 관계로 역시 빠뜨릴 수 없는 예이다. 조선악극단 무용가로 활동한 진수방(陳壽芳)·진수영(陳秀暎)도 역시 자매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친인척

촌수가 비교적 먼 친척관계나 혼맥으로 연결된 인척관계도 다양하게 확인된다. 가장 중요한 인척관계는 바로 이철과 김성흠(金星欽)이다. 연희(延禧)전문학교 재학 시절 밴드부원으로 서로 알게 된 두 사람은 이후 오케레코드 설립 과정에서 사업상의 동지가 되었고, 나아가 이철의 여동생 이은숙(李恩淑)이 김성흠과 결혼하면서 처남매부 사이가 되기도 했다. 이철이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바탕으로 대외적 업무를 관장한 반면, 김성흠은 꼼꼼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해 회사 내부 업무를 챙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성흠은 직접 일본 데이치쿠(帝蓄)레코드에 가서 음반 제작 기술을 익히고 관련 기계를 사 모으기도 했다. 김성흠 그러한 노력은 데이치쿠레코드에 의존하지 않고 오케레코드가 직접 음반을 제작하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1936년 말에 오케레코드가 전격적으로 데이치쿠레코드 지점으로 바뀌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성흠의 기술은 광복 이후 럭키(Lucky)레코드 설립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철·김성흠 못지않은 밀접한 처남매부 관계는 이봉룡(李鳳龍)·김해송(金海松)의 경우이다. 이봉룡의 여동생인 가수 이난영(李蘭影)은 193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김해송과 결혼을 했다. 이봉룡은 김해송과 인척관계를 맺은 이후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적 성장을 이루었고, 1940년대 이후 성공적인 작곡가로 많은 활약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봉룡이 김해송의 도움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김해송이 1943년 말에 조선악극단을 떠나 약초(若草)가극단으로 옮길 때나 1945년 말에 새로 K.P.K악단을 창설할 때 이봉룡이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다. 1950년에 김해송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이봉룡은 아버지 없는 조카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고, 자신의 딸인 이민자(李民子)와 김해송의 딸인 김숙자(金淑子)·김애자(金愛子)를 묶어 김시스터즈가 구성될 수 있도록 했다.

많이 알려진 예는 아니지만 가수 송달협(宋達協)과 최병호(崔丙浩)도 처남매부 관계이다. 최병호는 송달협의 누이동생과 결혼을 했다고 한다.

관계가 다소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작곡가 손목인(孫牧人)과 문호월(文湖月)은 사촌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씨를 따져 보았을 때 과연 사촌지간이 맞는지 의문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손목인이 일본 유학 도중 방학을 맞아 돌아왔을 때 오케레코드에 작품을 내서 작곡가로 데뷔하게 된 데에는 사촌형 문호월의 권유와 추천이 결적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협력관계

위에서 본 부부·형제자매·친인척 관계도 기본적으로 긴밀한 협력을 이룬 예이지만, 그러한 배경 없이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경우가 있다. 우선 학연을 배경으로 한 예는 이철·김성흠과 작사가 김능인(金陵人)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이철과 김성흠이 연희(延禧)전문학교 밴드부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는 점은 앞서 본 바인데, 김능인 또한 같은 시기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김능인은 밴드부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오케레코드 창설 당시부터 문예부장을 맡아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초기 오케레코드의 대표적인 작사가로 활동하는 한편, 직접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새로운 민요 자원을 발굴하는 데에 힘쓰기도 했다. 또 조선어교육레코드 제작을 주도하는 등, 오케레코드가 다른 음반회사와 구별되는 콘텐츠를 갖출 수 있도록 이철을 보좌했다.

오케레코드의 황금기를 이끈 조명암(趙鳴岩)·박시춘(朴是春)·남인수(南仁樹) 트리오도 대표적인 협력관계로 볼 수 있다. 조명암과 박시춘은 오케레코드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이며, 남인수는 작품 전체 수에서는 선배 이난영 등에 조금 뒤지지만 인기도 면에서는 1941년에 백년설(白年雪)이 입사하기 전까지 남자 가수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세 사람은 절묘한 호흡으로 숱한 걸작을 발표했는데, 조명암의 섬세한 가사, 박시춘의 감각적인 잔가락, 남인수의 정치(精緻)한 창법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수 있었기에 그러한 연속적 히트가 가능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태평(太平)레코드의 전성기를 이끈 박영호(朴英鎬)·이재호(李在鎬)·백년설 트리오와 대비해 볼 수 있다.

오케레코드 초기를 대표하는 김능인·손목인(孫牧人)·고복수(高福壽) 트리오도 절묘한 호흡으로 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특히 손목인과 고복수의 관계는 유달리 돈독했는데, 단순히 작곡가와 가수로 수평적인 협력을 한 것이 아니라 고복수가 손목인을 스승으로 대우하는 관계였다. 나이는 고복수가 오히려 더 많았지만, 데뷔곡을 작곡해 준 스승이라는 이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고복수는 손목인에게 하대(下待)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립관계

오케레코드·조선악극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립관계는 아무래도 본사 역할을 한 데이치쿠(帝蓄)레코드에서 1937년에 지점장으로 파견한 이무라 료즈이(井村良瑞)와 그 때문에 오케레코드 운영권을 내놓아야 했던 이철(李哲)의 관계라 할 수 있다. 1936년 오케레코드는 최초의 일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영화 <노래 조선>을 제작하고, 조선어교육레코드를 제작하고, 서울에 스튜디오를 설치하는 등 왕성한 기세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이철의 위상도 당연히 강화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본사 역할을 하던 데이치쿠레코드는 거기에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철의 입지가 강화될수록 영업상 독자적인 행동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결국 1936년 연말에 전격적으로 이철의 경영권이 박탈되고 말았다. 오케레코드는 정식 명칭이 데이치쿠레코드 경성지점으로 바뀌었고, 지점장은 일본에서 파견된 이무라 료즈이가 맡게 되었다. 이철은 경영권을 내놓고 문예부장으로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철이 그대로 이무라 료즈이에게 밀렸던 것은 아니니,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1937년부터 가사지 발행인이 이무라로 바뀌기는 했으나 1938년에는 다시 이철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후 이무라와 이철의 경쟁·대립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철이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해 조선악극단 운영에 주력하면서 자연스럽게 역할분담이 정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철에게 도전한 사람은 이무라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1940년에는 조선악극단에서 일대 계약파동이 일었으니, 무단으로 공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복수(高福壽), 김정구(金貞九), 남인수(南仁樹), 김능자(金綾子) 네 사람이 이철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고복수를 제외한 세 사람은 곧 이철과 화해를 하고 조선악극단으로 복귀했으나, 고복수만은 끝까지 이철과 화해하지 못하고 결국 조선악극단을 떠났다. 조선악극단을 떠난 고복수는 곧 새로 설립된 반도악극좌에 참여했고, 거기서 평생의 반려인 황금심을 다시 만나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다.

연인관계

오케레코드·조선악극단에서 가장 은밀하면서도 사실상 공개적이었던 연인은 바로 이철(李哲)과 장세정(張世貞)이었다. 15년이 넘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또 이철이 현송자(玄松子)라는 부인을 엄연히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940년 무렵부터 사실상 부부와 다름없는 관계로 공인된 사이였다. 당시 장세정은 오케레코드의 중역이자 이철의 매부인 김성흠(金星欽)의 집에 기거하며 이철과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현송자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장세정이 이철의 아이를 낳게 됐을 때에는 유학을 명목으로 잠시 일본으로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장세정은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유명 성악가 하라 노부코(原信子)에게 성악 개인교습을 받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조선악극단 내에서 장세정의 위상이 각별해지자, 오케레코드에서 가장 고참 가수인 이난영(李蘭影)이 거기에 신경을 쓰는 바람에, 한때 두 여가수의 관계가 냉랭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장세정은 이철의 아들을 둘 낳았는데, 둘째 아들은 1944년 6월에 이철이 사망한 직후에 유복자로 낳았다. 광복 이후 장세정은 연주가 한두식(韓斗植)과 결혼했고, 이철의 두 아들은 한씨 성을 따르게 되었다. 둘째 아들 한웅(韓雄)은 1960년대의 대표적인 그룹사운드 히파이브(He5)에서 리드보컬로 활동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