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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시놉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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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연보

이철 중심의 스토리
1903~1944, 충남 공주, 본명 이억길
1933 오케 설립 (김성흠 공동), 데이치구 경성임시영업소 사장
1934 결혼 / 현송자 (배정자의 두 번째 남편 현영운의 차녀)
1936 오케 경영난으로 사장 퇴임, 문예부장
1937 제국축음기주식회사 경성영업소로 정식 변경
1938 오케그랜드쇼 발족
1939 조선악극단 출범
1944 사망

연 보

사 건

힛트곡

비 고

1933

오케설립
이난영 입사

일본공연
(태양극장)

1934

고복수 입사

타향

1935

이난영 힛트

목포의 눈물

1936

오케사장퇴임
장세정 조우(11월 평양방송국개국)
남인수 입사

1937

장세정 힛트
제국축음기주식회사경성영업소

연락선은 떠난다

1938

남인수 힛트
김정구 힛트
오케그랜드쇼

애수의 소야곡
눈물 젖은 두만강

만주공연

1939

조선악극단출범(통합)
도쿄 아사쿠사 가케츠(花月)극장 (1939.3.11~21)

일본공연
영친왕알현

1940

콜롬비아악극단
반도악극단(빅타)

1941

태평양 전쟁

선창

1943

이천오백만 감격

1944

이철 사망

상해공연

1932

연희전문을 중퇴한 이철은 재학시절 밴드부에서 알게 된 김성흠과 어울리며 재즈바의 섹소폰 연주자로 고단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가슴 속에는 열정이 넘치지만 너무나 가난한 그에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애인이 있다. 지금은 기울었지만 한 시절을 풍미하던 세도가인 현영운의 딸로서 일본 유학 출신의 신여성인 현송자다. 현영운은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이자 애첩으로 알려진 배정자의 전 남편이며 대한제국 육군참장을 역임한 거물이다. 현송자의 아버지가 감당하기 어려운 거물이라는 점이 한편으로는 마음에 걸리지만 자유분방한 그에게 현송자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철의 소박한 생각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신분과 권력의 문제는 그를 나락으로 밀어 넣는다. 이미 기혼여성이었던 현송자는 당대의 세도가인 윤치오의 부인이지만 아버지뻘인 남편과는 화목하지 못하고 또래인 이철과 교회에서 만나 연인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교회에서 축출당하고 이철은 학교마저 그만두어야 했다. 힘들고 어려운 연주자로서 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철은 연주자로서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풀기 위하여 김성흠과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사업을 찾던 중 세계적으로 음반산업이 활황인 점을 보면서 한국에서 음반사를 설립하면 기회가 올 것 같은 생각을 품는다. 이미 주요한 일본음반사들이 경성에 지사를 설립하고 있다. 하지만 무일푼인 이철은 묘안이 없다. 자존심이 강한 이철로서는 내키지는 않았으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현영운에게 도움을 요청키로 한다.

현영운 또한 이철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자식의 앞날을 외면할 수 없어 일본의 인맥을 소개시킨다. 이를 계기로 이철은 일본 데이치쿠 레코드사의 중역을 만나게 된다.데이치쿠레코드사를 선택한 것은 온전히 이철의 치밀한 계산과 분석을 바탕으로 한 사업적 감각 때문이었다.

1933

데이치쿠레드사는 설립된지 아직 얼마되지 않아 자체적으로 조선에 영업소를 설립할 형편이 아니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레코드 등 선발업체와의 경쟁을 위해서는 공격적인 시장개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있다. 이 점을 이철은 충분한 사전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경험이 일천하고 가난한 이철에게 데이치쿠레코드사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매력적인 시장을 이미 경쟁회사에서 선점하고 있는 상황을 묵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데이치쿠는 현영운의 이용가치를 염두에 두고 경성에 임시영업소를 설립키로 한다. 자금관리는 본사에서 파견하는 일본인 감사 가시오가 맡고 이철은 신인 발굴과 제작에만 관여하기로 한다. 또한 초기 투자비용에 대한 보증을 요구한다. 이철은 대단히 굴욕적인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승낙한다. 다만 상표는 데이치쿠라는 이름이 조선에서 반감을 살 것을 우려해 새로운 상표를 사용키로 합의한다.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이철에게 새로운 상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감이 너무 좋고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희망이 넘쳐 <오케>라는 상표를 음반사업을 구상하던 초기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에서 사용하는 상표라 망설이다 해당회사와는 조선에서 경쟁할 일이 없다는 판단으로 그대로 쓰기로 결정한다.

막상 음반사를 설립해서 몇 장의 음반을 발표했으나 성과가 신통치 않아 새로운 스타를 찾는 한편 음반의 저가정책을 본사에 설득한다. 이전까지 음반의 주요고객이 고가의 축음기를 소유한 부유층이었지만 이제는 저가의 축음기 보급이 일반 대중에게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타음반사와 달리 가장 먼저 저가음반의 출시를 결정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향후 자립을 위하여 매부인 김성흠을 일본 본사에 파견하여 프레스 일을 배우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에 있는 김성흠에게 편지를 받고 이난영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김성흠을 만나러 일본에 건너가 태양극장의 단원으로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이난영을 보게 된다. 이난영의 노래를 듣고 한 눈에 대성을 짐작한다. 이철은 매우 정성스럽게 이난영을 태양극장에서 오케로 스카웃한다.

1934

회사설립 초기의 어려움은 재정적인 문제와 더불어 소속 예술인들의 부족이 겹쳐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것이었다. 이철로서는 조바심이 더할수록 냉철한 판단과 추진력을 필요로 하는 시점이었다.

이난영을 스카웃하여 음반을 발표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시장의 반응이 차갑다. 만담의 대가인 신불출의 음반 또한 회사의 재정을 튼튼하게 할 만큼의 판매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돌파구를 고민하던 중 회사 설립부터 같이 해 온 작곡가 문호월의 사촌 동생인 손목인을 알게 된다. 마침 콜롬비아 노래자랑 결선에서 2등으로 입상한 고복수가 눈에 띠게 된다. 콜롬비아에서 음반발매를 미루고 있는 사이 손목인을 시켜 좋은 노래를 취입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스카웃한다.

고복수를 빼 오기는 했으나 당장 취입시킬 곡이 없다. 그러던 차에 사회적으로 일제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나라를 버리고 오로지 식량을 위해 대거 만주로 이민을 떠나거나 화전민이 된 수가 200만을 넘어서 이슈가 되고 있었다.

이철은 예감하듯 손목인을 시켜 고향을 떠나 타지를 떠도는 유랑민의 노래를 만들게 한다. <타향>은 발표되자 마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오케의 살림을 안정적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노래의 원래 제목인 <타향>보다 노래의 첫구절인 <타향살이>로 더욱 알려지게 된다. 드디어 성공의 희열을 맛본 이철은 현영운에게 당당하게 자신감을 비치면서 현송자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1935

결혼과 함께 오직 성공과 행복만을 꿈꾸는 그에게 더불어 기회가 찾아 온다.조선일보와 공동으로 제1회 향토찬가 공모전을 거쳐 1등에 당선된 <목포의 노래> 내용이 너무 좋아 마땅한 곡만 있으면 히트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고복수의 신곡을 준비하던 손목인을 불러 가사를 보여주고 이에 맞는 곡을 당장 만들라 한다. 손목인은 이미 만들어 고복수에게 연습시키던 <갈매기항구>를 <목포의 노래> 가사로 변경하여 연습시킨다.

이철은 고복수의 노래를 듣다 뭔가 부족한 느낌을 갖는다. 마침 오래 전에 스카웃하였으나 아직 스타로서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이난영을 불러 대신 부르게 한다. 고복수보다는 이난영의 목소리에 어울린다는 판단을 한다. 더구나 작사자와 가수의 고향이 목포라는 사실로 노래제목과 더불어 삼박자가 맞아 떨어진다. 성공을 예감한 이철은 노래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꿔 취입시킨다.

음반은 대성공을 거둔다. 레코드점마다 음반을 사려는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제 이철에게 본사에서 파견한 일본인 감사 가시오는 이미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이에 가시오는 가슴 깊이 앙심을 품는다.

1936

비로소 성공의 길을 확신한 이철은 일본자본의 간섭을 배제할 목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기로 모색하기로 하고 프레스 기술을 배우러 도일한 매부 김성흠을 불러들인다. 한편으로는 투자자를 찾는다.

흥행의 마술사라는 인식으로 여러 곳에서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보내오는 상황에서 일본인 감사 가시오가 이철의 독자적인 움직임을 본사에 보고한다. 데이치쿠에서 이철을 소환하여 초기투자비용의 환수 및 향후 영업 손실에 대한 배상을 요구한다.

이철이 황당한 본사의 요구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데이치쿠에서 일방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한다. 이철은 가수의 발굴에만 관여하는 문예부장으로 강등되고 임시 사장으로 감사인 가시오를 앉힌다.

다시 장인의 도움을 고민하지만 민족적인 감성에 의지한 노래의 성공으로 입지를 굳힌 마당에 일제에 협력적인 장인의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좋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여 자력으로 극복하기로 한다. 그러나 마땅한 돌파구가 없다.

문예부장으로 소일하던 그에게 평양방송국 개국쇼의 초대장이 온다. 머리를 식힐 겸 갓 입사하여 노래를 연습 중이던 남인수와 작곡가인 박시춘, 김해송, 조명암 등을 대동하고 평양을 방문한다. 이 자리에서 장세정을 보고 첫 눈에 반한다. 곧바로 서울로 대동하여 음반 취입을 준비하게 한다.

1937

다재다능한 김해송에게 새 노래를 건네받은 후 힛트를 예감한 이철은 장세정의 극적인 등장을 위하여 신인가수 발굴 콩쿠르에 장세정을 참가시킨다. 뛰어난 외모와 노래실력으로 1위에 입상한 장세정은 이미 준비 중이던 <연락선은 떠난다>를 발표하면서 단번에 최고의 인기가수로 자리 잡는다. 연이어 김정구와 남인수의 힛트곡이 이어지면서 이철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성공의 희열을 느끼나 경제적인 보상이 전혀 없자 실망한다.

회사에서 점차 입지가 줄어든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절망감과 소외감으로 장세정과의 사랑에 몰두하고 기생들과의 염문을 뿌리며 방황한다.

1938

점차 황폐해져가는 이철에게 박시춘 등이 조언하자 다시 업무에 매진하기로 한다.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과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 연이어 대히트하여 자신감을 회복하자 입지가 좁은 회사를 벗어나 공연을 중심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을 품고 오케그랜드쇼를 기획한다.

데이치쿠에서는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려는 이철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미 증명된 탁월한 기획자인 이철을 매어두려는 생각에서 회유책을 쓴다. 쇼단의 설립 자본금을 회사에서 투자하고 쇼단의 수익금은 이철에게 주기로 한다. 다만 신인 발굴 및 쇼단 소속 가수의 음반 제작은 본사에서 맡기로 제안한다. 회사에서는 감각과 기획력을 갖춘 두려운 경쟁자보다는 이익을 보장하는 협력자를 원했고 이철로서는 쇼단의 흥행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모험에 일정부분 위험요소를 줄일 수 있다는 조건이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인다.

회사는 제국축음기주식회사로 체제를 갖추는 한편 오케를 임시 영업소에서 경성영업소로 정식 출범시키고 일본인 이무라 료즈이(井村良瑞)를 사장으로 임명한다.

오케그랜드쇼는 이철의 열정과 새로운 기획력을 바탕으로 봉천공연에서 성공한다.

1939

만주공연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이철은 데이치쿠와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하여 조선연예주식회사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한다. 오케와의 협력관계는 유지하지만 쇼단의 운영 및 소속가수의 계약은 이철이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비로소 이철이 꿈꾸던 자신만의 회사가 설립되었다.

이철은 기존의 오케그랜드쇼를 확대 개편하여 일본공연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철의 성공이 마냥 반갑지 않은 데이치쿠의 입장에서는 더욱 이철을 묶어 두어야 한다는 절박성에 당면하고 있었다. 회사가 다르니 경영권에 관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미 대중들에게 익숙한 오케라는 상표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주장한다.

이철은 상표를 자신이 만들었다는 주장으로 항변하지만 초기의 모든 자본은 본사에서 투자했기에 상표의 권리 또한 회사에 있다는 말에 접점을 찾지 못한다. 이미 공연계약은 완료된 상태에서 오케라는 이름을 버리고 흥행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고민을 거듭한다.

결국 오케그랜드쇼단을 <조선악극단>으로 변경하여 공식출범한다. 또한 이미 계약된 도쿄공연을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관중들은 오케라는 이름보다 이철이라는 이름에 신뢰를 보냈고 객석을 가득 메운 도쿄공연은 열흘간 연장공연에 돌입하면서 대성공을 거둔다. 영친왕은 친히 조선악극단을 초청하여 망국의 설움을 토로하며 격려한다.

일본공연의 성공을 지켜본 데이치쿠에서는 이철과의 협력을 위하여 오케라는 상표를 계속 사용해도 좋다는 조건 아래 음반발매는 오케레코드에서 할 수 있도록 요청한다. 이철은 자신이 설립한 레코드사이기도 하지만 그동안의 모든 열정이 담긴 삶의 공간이었기에 거부할 수 없어 계속 협력하기로 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경성공연에서 이철은 자랑삼아 “일본인은 조선인을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를 언급하여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연행된다. 정국은 중일전쟁의 분위기에 내몰리면서 더 큰 전쟁을 암시하는 암울한 먹구름이 몰려온다.

이미 깊은 좌절과 시련을 경험한 이철은 난국을 타개할 방편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악극단 소속가수들의 군국가요 취입에 협조하게 된다. 군 위문공연단을 별도로 운영하는 한편 조선악극단의 순회공연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1940~1943

일본공연에서 성공한 조선악극단의 공연을 계기로 경쟁적인 악극단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그러나 차별화된 조선악극단의 공연프로그램은 경쟁단체를 압도하여 흥행의 마술사로서 이철의 입지는 더욱 강건해진다.

타 악극단의 프로그램이 가수 중심의 버라이어티 쇼에 중심을 둔 반면 조선악극단의 프로그램은 창작 뮤지컬과 버라이어티 쇼로 구성되었으며 국내활동은 각지의 관객요청을 감당하기 위하여 팀을 나누어 남북을 동시에 순회할 정도로 바빠졌다. 또한 일본과 중국공연 등에서는 조선의 특색을 강조하는 전통춤과 전래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 단골로 공연되었다.

조선악극단의 산하에 신생극단과 오케싱잉팀을 별도로 구성하여 공연할 정도로 바빠진 이철은 관객의 요청에 부응함은 물론 공연의 질적인 수준을 향상시키고 지속적인 예술인들의 배출을 위하여 오케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한다. 자질을 중심으로 선발한 연구생들에게는 수업료의 면제는 물론 졸업반은 조선악극단의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와 함께 생활비의 지원까지 제공한다.

그러나 이철의 성공은 한편으로는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총력적인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되고 징용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과 위안부로 차출되는 시골처녀들로 인하여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제는 모든 예술인들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공연 시 반드시 일장기를 게시하고 군국가요를 프로그램에 포함하도록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이철은 가장 인지도 높은 연예사업가라는 이유로 대중예술인들의 총체적인 조직인 조선연예협회의 회장에 선출되어 일제에 협력하게 된다. 대중예술사업가로서 역할과 일제에 동원되어야 하는 현실 사이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를 타개할 묘책으로 박향림을 스카웃하여 <코스모스 탄식>을 발표하고 고운봉의 <선창>, 그리고 당대의 떠오르는 최고스타인 백년설을 스카웃하여 <더벙머리 과거>를 연이어 히트시킨다. 그러나 더욱 전쟁의 광기는 더해가고 이에 부응하는 군국가요의 양산과 위문공연의 수는 늘어간다.

흥행의 성공과는 무관하게 정신적인 공허함은 커져가고 이를 메우려는 듯 이 시기에 장세정과 사실적인 부부관계에 접어들어 아들을 얻는다.

1944

모든 음반의 발매는 중지되고 정국은 총력태세로 전쟁에 임하게 되면서 악극단은 군 위문공연 외에 일체의 활동이 제약된다. 이철은 위문공연을 하면서 향후 다가올 일본의 패망을 예감한다.

조선악극단의 예술인들은 일본의 패망 이후를 대비하여 고민을 한다. 일부는 좌익을 다른 일부는 일본으로의 탈출을 이야기한다. 이철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결의를 보이며 오로지 조선악극단의 존재이유와 흥행의 성공을 위하여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을 주장한다.

전쟁은 말기의 광증을 보이는 가운데 이철은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한다. 대중 속에서만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마침 상해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현인의 소문을 접한다.

이 시기 경성이 악극의 도시라면 상해는 재즈의 도시로 알려질 만큼 서양음악이 유행하고 있었다. 현인의 노래가 기존의 음악과 다른 유럽스타일이라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태까지 자신이 발굴한 모든 스타의 경우처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을 갖는다. 더욱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번화한 신문물의 집합소인 상해에는 서양의 공관들이 많아 일제와의 치열한 정보전쟁 장소이기도 했다. 전쟁의 말기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악극단의 수많은 예술가들의 운명이 결부되어 있었다. 어떤 시기보다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고 더불어 스카웃을 위한 이점까지 있어 상해를 방문하기로 한다. 이 길에는 장세정만을 대동한다.

상해출장길에서 그동안의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고 각혈한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장세정을 떠나보내기로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