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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국내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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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극장

명치좌

명치좌(明治座)는 1936년에 일본인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가 경성 명치정(明治町) 2정목에 세운 극장이다. 1935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936년 10월 8일에 개관했다. 3층으로 지어졌고, 객석은 1400~1700석 정도를 갖추었다.

원래 영화 전용 극장으로 개관했고 주로 일본 영화사 쇼치쿠(松竹)의 작품을 개봉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무대 공연, 특히 조선인 단체의 공연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쇼치쿠와 조선악극단이 제휴를 맺으면서 어트랙션 쇼 형태로 영화 사이사이에 공연을 하게 되었고, 명치좌의 운영을 맡았던 다나카 히로시(田中博)가 한때 조선악극단을 운영하는 조선연예주식회사의 임원을 맡기도 했다(1941년 8월).

1941년 5월에 조선악극단의 자매단체인 오케싱잉팀이 명치좌에서 첫 공연을 했고, 이어 6월에는 조선악극단도 무대에 올랐다. 조선악극단의 공연은 이후 1941년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에도 매달 상연되었고, 당시 조선악극단 소속 기타 연주자로 활동했던 작곡가 손석우(孫夕友)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년 12월 7일) 소식을 명치좌에서 들은 바 있다고 술회했다.

이후 쇼치쿠와 제휴가 끝나면서 조선악극단 공연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1943년 6월에 다시 명치좌 무대에 등장했다. 광복 전까지 1944년 12월, 1945년 3월에도 조선악극단 출연이 확인된다.

광복 이후 1946년 1월에는 명치좌의 이름이 국제극장으로 바뀌었고, 이후 시공관(市公館), 시립극장, 국립극장, 명동예술극장 등으로 이름이 계속 바뀌면서 공연장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증권사에 매각되었다. 한때 철거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2009년 6월에 내부를 개조하여 다시 공연장으로 문을 열었다.

약초극장

약초(若草)극장은 1930년 5월에 경성 약초정(若草町) 41번지에 세워진 극장이다. 원래는 오카모토(岡本)라는 일본인이 대정관(大正館)이라는 이름으로 개관을 했는데, 오카모토의 아들 대에 와서 낡고 협소한 대정관 건물을 허물고 같은 자리에 다시 약초극장을 건립했다. 3층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로 객석은 약 1300석 정도였다. 주로 영화를 상영할 목적으로 만든 극장이므로 무대는 협소한 편이었다.

조선악극단은 1939년 10월에 영화 상영 사이사이에 어트랙션 쇼 형태로 처음 공연을 했다. 이후 1940년 2월, 1941년 4월, 5월, 1945년 7월에도 약초극장 무대에 오른 사실이 확인된다.

약초극장에서 조선악극단 공연이 활발하지 않았던 이유는 1941년 4월에 약초극장 전속으로 약초악극단이 결성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조선악극단은 독자적인 극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요 극장들과 별도의 계약을 맺고 공연을 해야 했으나, 약초악극단은 전속극장으로 약초극장을 확보해 놓고 공연을 할 수 있었다.

1943년 말부터는 김해송(金海松)·이난영(李蘭影) 부부를 중심으로 조선악극단의 주축 멤버 일부가 조선악극단을 탈퇴하고 약초악극단으로 옮겨 활동하기도 했다.

1945년 이후로는 수도극장, 스카라극장 등으로 이름이 바뀌며 주요 영화관으로 계속 존속했으나, 2005년 12월에 건물이 철거되고 말았다.

금천대좌

금천대좌(金千代座)는 1926년에 개관한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의 대표적인 극장이다. 1926년 5월에 신축 공사 도중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26년 말에 개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 수정(壽町)에 위치해 있었고, 반목조(半木造) 2층 규모에 객석은 일본식 다다미로 꾸며져 있었다. 객석이 다다미로 되어 있었던 이유는 일본 전통극 가부키(歌舞技) 등을 공연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후반에 다다미를 모두 의자로 교체했으나, 건물 자체는 개관 당시 형태를 유지했다. 객석 규모는 1400석 정도였다. 처음부터 영화가 아닌 무대 공연 중심으로 설계된 극장이었으므로 무대 시설이 좋은 편이었다. 회전무대를 갖추고 있었고, 분장실 시설도 수준급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평양은 당시 경성에 버금가는 큰 공연 시장이었으므로, 평양을 대표하는 금천대좌는 지역 극장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춘 공연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미 오케(Okeh)연주단 시절인 1933년 12월부터 금천대좌에서 공연한 사실이 확인되며, 1937년 3월에도 공연 기록이 보인다. 명확하게 극장이 표기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평양 공연 자체는 매우 빈번했으므로, 그때마다 대개 금천대좌를 무대로 사용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1940년 10월에 가수 남인수가 공연 도중 피를 토하며 쓰러진 곳도 금천대좌로 알려져 있다.

이후 분명하게 금천대좌 공연 사실이 확인되는 예는 1943년 7월이며, 조선악극단의 자매단체인 신생극단도 1943년 6월, 12월, 1944년 4월, 1945년 1월에 금천대좌에서 공연을 했다.

1945년 이후 북한에서도 한동안 공연장으로 활용되었으나,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부민관

부민관(府民館)은 경성부(府)에서 건립한 다목적 공연장이다. 1934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이듬해 12월에 준공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3층 건물로, 객석은 1800석 정도가 있었다. 남쪽 구석에는 6층 높이로 탑 형태의 공간을 올리기도 했다. 부민관 건립에 든 비용은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대부분 부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경성의 전차 영업권을 지키기 위해 당시로서는 대단한 거금인 백만 원을 냈다고 한다.

상업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공연장은 아니었으나, 무대 시설은 양호한 편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말기에 몇 차례 치러진 연극경연대회도 부민관 무대에서 진행이 되었다.

조선악극단은 다른 어떤 공연단체보다도 부민관에서 공연을 많이 했는데, 규모나 시설이 조선악극단의 대형무대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기도 했고, ‘경성의 명물’로 부각된 조선악극단 공연을 경성부에서 건립한 부민관 무대에 올림으로써 도시의 문화적 이미지를 고양시키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케(Okeh)그랜드쇼 시절인 1938년 4월에 첫 공연 사례가 확인되면, 이후 1938년 12월, 1939년 2월, 6월, 9월, 1940년 2월, 4월, 6월, 9월, 1941년 1월, 9월, 10월, 1942년 6월, 9월, 1943년 1월, 7월, 1944년 6월, 1945년 6월에도 부민관에서 조선악극단 공연이 열렸다.

그밖에 오케레코드 신인가수 선발 콩쿠르대회(1940년 5월), 오케싱잉팀 창립 공연(1940년 6월), 이철(李哲)이 회장을 맡은 조선연예협회 결성식(1941년 1월), 오케음악무용연구소 제1회 발표회(1941년 2월), 조선악극단의 자매단체인 신생극단 창립 공연(1943년 6월) 등도 모두 부민관에서 열렸다.

1945년 이후 경성부가 서울시로 바뀌면서 부민관 역시 자연스럽게 서울시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고, 국회의사당, 시민회관 별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서울시 의회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앙극장

중앙(中央)극장은 1922년에 경성 영락정(永樂町) 1정목(丁目)에 건립된 극장이다. 당초 명칭은 중앙관(中央館)이었고, 오이시(大石)라는 일본인이 운영했다. 처음에는 2층 목조건물이었으나, 1934년에 벽돌로 개축을 했고, 그와 함께 명칭도 중앙극장으로 바꾸었다. 약 6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고, 무대도 비교적 큰 편이었다. 무대 여건이 되었으므로 주로 연극이나 영화 재상영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1944년에는 조선악극단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김상진(金尙鎭)이 운영권을 인수해 악극 중심 극장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이때 객석도 800석 정도까지 증설한 것으로 전한다. 중앙극장은 조선악극단의 주요 무대는 아니었으나, 다른 공연장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종종 사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확인되는 바로는 1944년 9월, 11월, 12월, 1945년 4월, 6월에 공연이 이루어졌고, 이는 역시 김상진의 중앙극장 운영권 인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이후에도 그대로 중앙극장이라는 이름을 유지했고, 1950년 2월에 조선악극단 멤버들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오케그랜드쇼 오케걸작집’ 공연이 열리기도 했으나, 이후로는 주로 영화관으로 이용되었다.

동양극장

동양(東洋)극장은 무용가 배구자(裵龜子)의 남편 홍순언(洪淳彦)이 자본금 5만 원으로 1935년에 현재 서대문구 충정로1가에 건립한 극장이다. 1934년 가을에 공사를 시작해서 10개월 만인 1935년 11월 1일에 개관했다. 지상 3층 규모에 객석은 800석을 갖추었다. 연극 전용 극장을 염두에 두어 지하실에 회전무대를 사용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었지만, 영화 상영도 가능했다. 전속극단으로 청춘좌(靑春座), 호화선(豪華船), 동극좌(東劇座) 등을 두고 가장 영향력 있는 대중극 극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조선악극단은 1942년 8월에 처음 동양극장에서 공연을 했고, 이후 1942년 9월, 10월, 1943년 9월, 12월, 1944년 1월, 2월, 3월, 4월, 5월, 9월, 12월, 1945년 5월, 7월, 8월에도 동양극장 무대에 올랐다. 특히 1944년 9월 공연은 앞서 6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조선악극단 단장 이철(李哲)을 추도하는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조선악극단의 사실상 마지막 공연이라 할 수 있는 1947년 4월 ‘조선악극단 15주년’ 기념 공연이 동양극장에서 열렸다. 조선악극단의 자매단체인 신생극단 또한 1943년 10월, 12월, 1944년 8월, 10월, 1945년 2월, 5월에 동양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연극보다 영화를 상영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고, 새로운 극장들의 등장으로 쇠락하다가, 1990년에 철거되었다.

제일극장

제일(第一)극장은 경성부 종로 5정목에 위치한 극장으로, 최초 건립 시기나 형태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910년대에 동대문시장 일대에서 활약하는 재인(才人), 기생, 광대들이 출연하는 극장으로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1년 이전에는 관상장(觀商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일본인이 인수해 운영하게 되면서 미나토자(港座)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 무렵 벽돌로 된 2층 건물에 900석 규모 좌석을 갖추고 있었다. 1941년에 제일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주로 연극이나 악극, 영화 재상영 위주로 운영되었다.

제일극장은 조선악극단보다는 주로 자매단체인 신생극단이 이용한 공연장이었다. 조선악극단의 경우 1945년 2월 한 차례 공연만 확인될 뿐이며, 신생극단은 1943년 11월, 12월, 1944년 1월, 2월, 7월, 12월, 1945년 1월, 6월, 7월에 공연을 했다.

1945년 이후에는 평화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승만(李承晩) 정권과 유착한 것으로 유명한 연예사업가 임화수(林和秀)가 인수해 운영을 했다.

대륙극장

대륙(大陸)극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영화관 단성사(團成社)가 일제시대 말기에 잠시 사용한 이름이다.

단성사가 개관한 때는 1908년 7월로, 경성 수은동(授恩洞)에 위치했다. 1914년에 약 천 석 규모로 건물이 다시 세워졌다. 처음 주인은 조선인이었으나, 1917년에 일본인 다무라(田村)가 인수했다. 1918년에는 박승필(朴承弼)이 다시 인수하여 조선인들이 주로 관람하는 경성 북촌(北村) 제일의 영화관이 되었다. 1934년 12월에는 철근을 사용한 3층 건물로 신축되었고, 이때 마련된 객석은 약 750석 정도였다. 1939년 6월에 일본인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가 인수했고, 이어 7월에 대륙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 주로 영화관으로 사용된 극장이므로 1930년대에는 오케(Okeh)연주단이나 조선악극단의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1941년 8월에 첫 공연이 확인된다. 이어 1941년 9월, 10월, 11월, 12월, 1942년 2월까지 지속적으로 조선악극단이 대륙극장 무대에 올랐다. 이후 한동안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43년 1월에 다시 한 차례 조선악극단 공연이 확인된다.

광복 이후 1946년 1월에 단성사라는 이름을 회복했고, 건물은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으나 지금까지 계속 영화관으로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