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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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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광복 이후 오케(Okeh)레코드

오케레코드는 태평양전쟁의 격화로 음반 생산이 중단된 1944년 초반부터 다른 음반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1945년에 광복을 맞아 일본 자본이 모두 물러가면서 데이치쿠(帝蓄)레코드의 경성(京城) 지점으로 존재했던 오케레코드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근거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오케레코드가 1945년 10월에 해산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광복 이전에 존재했던 오케레코드가 광복 이후에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당대 대중음악계를 주름잡은 오케레코드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직접 계승관계는 없지만, 광복 이후에도 오케레코드라는 음반회사가 등장해 한동안 음반을 발매했던 것이다.

광복 이후 오케레코드가 첫 음반을 발매한 때는 1948년 5월이다.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는 대중가요 <울어라 은방울>이 처음으로 발표한 곡인데, 당시 광고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待望 五年! 녯 陣容 그대로 再登場한 오케- 解放 第一聲!!
金海松·曲 노래 張世貞 우러라 銀방울(8151), B面 歲月은 간다 노래 李蘭影
特約店 募集 全羅南北道 忠淸南北道 江原道, 慶尙南北道 總販賣店 豫約濟
서울市 忠武路二街 三O 오케- 레코-드 會社 電(2)三七O五

광복 이후 오케레코드의 첫 음반 발매 시기는 1948년 5월이지만, 회사 자체는 이미 그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7년 4월 무렵에 이미 서울 정동(貞洞)을 소재지로 조선오케레코드주식회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 주는 음악무용연구생 모집 광고가 있고, 같은 해 7월에는 오케의 영문 표기인 Okeh와 유사한 OHKE 명의를 사용한 콩쿨대회 광고가 보이기도 한다. 콩쿨대회 광고의 경우 기존 오케레코드의 명성을 이용한 의도적인 유사상표 사용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음악무용연구생을 모집하는 광고에서는 광복 이후 오케레코드의 흔적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광복 이후 오케레코드에 관한 내용으로는 창설한 사람이 김홍련(金洪煉)이라는 설이 있다.

8·15광복을 기념하는 의미가 담겨 있음이 분명한 오케레코드 제1회 신보의 음반번호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8151, 8152, 8153의 순서로 나왔을 것은 분명하다. 다만, 현재 발견되고 있는 광복 이후 오케레코드 음반 중에는 음반번호가 표기되어 있지 않은 것도 많기 때문에 전체적인 발매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오케레코드 음반 가운데에는 새로 취입해 발표한 곡 외에 광복 이전 오케레코드 음반에 수록된 곡을 복제해 다시 찍어낸 경우도 보인다. 예컨대, 오케레코드 상표로 대중가요 <선창>과 <배표를 사들고>가 앞뒷면에 수록되어 있는 음반을 보면, 제목과 가수 이름만이 육필로 엉성하게 표기되어 있고 음반 제조 상태가 매우 조악하므로, 광복 이후 오케레코드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광복 이전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선창>과 <배표를 사들고>는 원래 서로 다른 음반에 수록되어 있었으므로, 음반번호 체계를 깨뜨리는 이러한 음반이 광복 이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광복 이후 오케레코드가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정황상 6·25로 인해 문을 닫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오케레코드 음반이 전쟁 기간 중에 럭키(Lucky)레코드에서 다시 찍혀 나온 예가 확인되므로, 오케레코드가 영업을 중단하면서 그 음원이 럭키레코드에 인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1958년까지도 이효익(李孝益)이라는 사람이 대표로 있는 오케레코드제작회사라는 업체가 서울 남산동 2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오케레코드의 유산은 여러 차례 모습을 바꾸면서 1950년대 후반까지도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이후 오케레코드에서는 이난영과 장세정 외에도 남인수(南仁樹)·이인권(李寅權) 등 광복 이전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들이 작품을 발표했고, 박재홍(朴載弘)·송민도(宋旻道)·금사향(琴糸響)·황정자(黃貞子)·옥두옥(玉斗玉)·이경희(李璟嬉) 등 신인가수들이 데뷔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향초>를 데뷔곡으로 부른 송민도는 당시 송민숙(宋敏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광복 이후 조선악극단

광복 이후 조선악극단도 오케레코드와 비슷하게 운영 주체나 성격은 다소 바뀌었지만, 한동안 계속 명맥을 유지해 나아갔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에는 작사가 겸 극작·연출가인 조명암(趙鳴岩)을 중심으로 단체가 운영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광복 이전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에서 임원으로 일했던 방예정(方藝汀)이 경영을 맡았다고도 한다.

광복 이후 조선악극단은 원래 조선악극단 전성기 멤버들이 거의 모두 이탈하고 조명암·김형래(金炯來)·황문평(黃文平)·송달협(宋達協)·김백희(金白姬)·고운봉(高雲峰) 등이 중심이 되어 공연을 진행했다. 김백희는 오케음악무용연구소 1기생 출신으로, 이 당시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했으며, 이후 1950년대까지 악극계의 히로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1946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연을 펼친 광복 이후 조선악극단의 주요 작품은 <춘희(椿姬)>, <가면무도회>, <유충렬전>, <열사의 화원>, <그이와 같은 이는 그이뿐이오>, <청사초롱> 등이다. 1947년 4월에는 조선악극단 15주년 기념 공연이 열렸는데, 이는 조선악극단의 역사가 1932년 오케레코드 설립 때부터 시작한다는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47년 이후 조선악극단은 사실상 해산한 것으로 보이나, 1950년 2월에는 왕년의 조선악극단 멤버들이 일시적으로 모두 모여 ‘오케그랜드쇼’라는 제목으로 대규모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의 인적 유산

광복 이전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에서 무명의 연주자 또는 연구생으로 활동하던 인물 가운데에는 광복 이후 대중예술계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는 몇몇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손석우(孫夕友. 1920~)
전라남도 장흥(長興) 출신으로,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1941년에 작곡가 김해송(金海松)의 소개로 조선연예주식회사에 입사해 기타 연주자로 활동했다.
당시 오케레코드에서는 태평(太平)레코드 전속으로 있던 가수 백년설(白年雪)의 스카우트에 성공했는데, 태평레코드의 반발 때문에 바로 음반을 발매할 수 없어 일단 공연으로만 백년설을 선보였다. 손석우는 조선연예주식회사에 입사하자마자 평양에서 공연 중이던 백년설 일행과 합류해 첫 무대에 섰고, 백년설의 오케레코드 입사곡인 <천리정처> 등의 녹음에도 참여했다.
이후 한동안 음악활동을 중단했다가 광복 이후 김해송이 이끈 K.P.K악단에 가입하여 다시 연주 활동을 시작했고, 6․25전쟁 중에 대중가요 작사·작곡을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방송국 악단을 지휘하고 음반회사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나 하나의 사랑>, <청실홍실> 등 새로운 경향의 대중가요를 많이 발표했고, 직접 운영한 비너스(Venus)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1961년에 크게 인기를 끌면서 한국 대중가요사에 일대 획을 그었다.
부인 최옥녀(崔玉女)는 오케음악무용연구소 연구생 출신이다.

김백희(金白姬. 1926(?)~2005(?))
출생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오케음악무용연구소 1기생 출신이며, 뛰어난 가창력으로 광복 이전에 이미 조선악극단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조선악극단에서는 프리마돈나로 활약했고, 이후 1950년대까지 대표적인 악극배우로 각광을 받았다.
음반도 약간 발표했는데, 1948년 무렵 나온 <아내의 노래>(김다인(金茶人)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가 대표곡이다. <아내의 노래>는 이후 가사가 바뀌어(유호(兪湖) 작사) 1952년에 오케음악무용연구소 후배인 심연옥(沈蓮玉)의 노래로 음반이 다시 나오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악극 공연이 쇠퇴하자 연예계를 떠나 농촌에서 생활했다.

강윤복(康允福. 1924~)
평양 출신이며, 어려서 서울로 이주해 성장했다. 숙명여고에 다니던 중 오케음악무용연구소 1기생 모집 광고를 보고 면접에 응시해 선발되었다. 무용에 두각을 나타내어 2기생 주리(朱莉)와 함께 자주 무대에 섰고, 일본·중국·만주 등 조선악극단의 해외공연에도 참가했다. 조선악극단 단장 이철(李哲)이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조선악극단에 남아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새롭게 개편된 조선악극단과 그 뒤를 이은 장미악단에서 대표적인 무용가로 활동했고, 김해송(金海松)이 이끌던 K.P.K악단에 가입해서도 안무와 무용을 맡았다. 1950년대에는 미8군쇼 무대에서 활동하며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부대에까지 공연을 가기도 했다. 이후 베트남전쟁 당시 파월(派越)장병위문공연에 참가했고, KBS에서 안무와 무용지도를 맡아 활동하다가 은퇴했다.

심연옥(沈蓮玉. 1928~)
서울 출신이며, 오케음악무용연구소 2기생 출신이다. 광복 이전에는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광복 이후 김해송이 창설한 K.P.K악단을 통해 가수 겸 연기자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난영(李蘭影), 장세정(張世貞) 등과 함께 K.P.K악단에서 공연한 악극의 히로인으로 활동했다.
1947년 무렵 첫 음반 <흘러온 남매>를 고려레코드에서 발표한 이후 1960년대까지 <한강>, <아내의 노래> 등 인기곡을 발표하며 꾸준히 인기를 모았다. 1955년에 가수 백년설과 결혼했고, 1978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백설희(白雪姬. 1927~)
서울 출신이며, 오케음악무용연구소 3기생 출신이다. 1944년 조선악극단 중국 공연 당시 연구생 신분으로 참여했다가 상하이(上海)에서 처음으로 솔로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조선악극단을 떠나 라미라(羅美羅)가극단, 새별악극단 등을 거쳐 K.P.K악단에 가입했다. 1950년 1월에 상연된 악극 <칼멘환상곡>에서 주연을 맡아 주목을 받았고, 이어 <꾀꼬리 강산>이라는 곡으로 데뷔 음반을 내기도 했다. 6·25전쟁 발발 직전에는 국도(國都)악극단으로 옮겨 악극 <일곱 난쟁이와 백설공주> 주연을 맡았다.
전쟁 기간 중에는 주로 군예대에서 활동했고, 휴전 이후 유니버살레코드에서 <아메리카차이나타운>, <봄날은 간다> 등을 발표해 일약 톱가수가 되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빅토리레코드, 미도파레코드, 신세기레코드, 지구레코드 등에서 인기가수로 활동했다. 액션배우로 유명한 황해(黃海)와 결혼해 1970~80년대에 가수 겸 배우로 크게 활약한 전영록(全永祿)을 아들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