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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해외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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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진출

조선악극단의 동북아 무대 진출

오케(Okeh)레코드를 모체로 조직된 공연단체인 조선악극단은 오케연주단·오케그랜드쇼 단계를 거쳐 1939년 3월 일본 공연을 하면서부터 조선악극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첫 출발부터 조선을 대표하는 공연단체로 해외 진출을 중시했던 입장을 볼 수 있다.

조선악극단으로 재출발하기 전인 1936년 2월에도 이미 오케연주단이 일본 무대에 진출한 바 있으므로, 동북아 국제무대 진출을 향한 조선악극단 단장 이철(李哲)의 집념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 일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후 조선악극단은 조선은 물론 일본, 중국, 만주 등 동북아 일대를 순회하며 국제적인 공연단체로 성장해 갔다. 현재 확인되는 조선악극단의 동북아 일대 공연 실적은 다음과 같다.

1939년 3월 ~ 5월 제1회 일본 공연: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교토(京都), 오쿠라(小創), 규슈(九州) 일대 순회.

1939년 11월 ~ 1940년 2월 제2회 일본 공연: 도쿄, 오사카, 교토 일대 순회.

1940년 4월 ~ 5월 제1회 중국 공연: 베이징(北京), 텐진(天津), 지난(濟南),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대련(大連) 일대 순회.

1940년 8월 ~ 9월 제1회 만주 공연: 신경(新京), 길림(吉林), 대련, 하얼빈, 치치하얼, 봉천(奉天), 도문(圖門), 용정(龍井) 일대 순회.

1941년 4월 제2회 만주 공연: 신경, 봉천, 대련, 안동(安東) 일대 순회.

1942년 5월 제3회 만주 공연: 신경, 안동, 대련, 봉천, 자무스, 도문, 연길(延吉) 일대 순회.

1943년 1월 제4회 만주 공연: 안동, 봉천, 신경, 하얼빈, 목단강(牧丹江), 도문 일대 순회.

1943년 2월 ~ 6월 제3회 일본 공연: 도쿄, 오사카, 나고야, 교토, 고베(神戶), 히로시마(廣島), 시모노세키(下關) 일대 순회.

1943년 11월 ~ 12월 제5회 만주 공연: 안동, 봉천, 대련, 신경, 하얼빈, 목단강, 자무스, 용정, 연길, 도문, 혼춘(琿春) 일대 순회.

1944년 6월 ~ 9월 제2회 중국 공연: 텐진, 베이징, 지난, 쉬저우(徐州), 상하이, 난징, 쑤저우(蘇州) 일대 순회.

1944년 중국 공연 이후로는 해외 공연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의 패전이 임박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1944년 6월 이철의 사망으로 인해 더 이상 해외 공연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해외 공연은 현지 흥행업체나 극장과 사전 협의를 충분히 해야 진행에 차질이 없으므로, 조선악극단의 동북아 무대 진출은 주로 요시모토(吉本)·쇼치쿠(松竹)(일본의 경우), 만주연예협회(만주의 경우) 등 현지 흥행업체 또는 단체와 제휴를 통해 이루어졌다. 중국 공연의 경우 일본군 위문공연을 명목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군부대와의 협의가 중요하기도 했다. 일본인 사토 쿠니오(佐藤邦夫)가 조선악극단 총무를 맡게 된 이유도 일본군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이철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악극단 외에 다른 공연단체들도 일본이나 만주 공연을 했지만, 그 규모나 호응도 면에서는 역시 조선악극단의 실적을 능가하지 못했다.


오케(Okeh)레코드 가수들의 일본 진출

1939년에 조선악극단이 단체로서 일본 무대에 정식으로 등장하기 전에 몇몇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들은 개인적으로 일본 대중가요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물론 그 사례가 극히 적은 편이므로 진출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현재 일본 대중가요 음반에 이름을 남긴 것으로 확인되는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는 세 명이다. 윤백단(尹白丹)은 1930년대 초에 크게 활동한 이애리수(李愛利秀)나 강석연(姜石燕)처럼 배우와 가수를 겸했던 인물로, 1932년에 태평(太平)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발표했다. 이어 1933년에는 주로 오케레코드에서 음반을 냈고, 1935년에는 태평레코드의 자매상표인 기린(麒麟)레코드를 통해서도 음반을 발표했다.

대략 30곡 가까이 음반을 발표한 윤백단은 일본 대중가요 음반으로 1933년에 <ふるさとの唄> 한 곡을 데이치쿠(帝蓄)레코드를 통해 발표했는데, 이 노래는 그가 앞서 오케레코드에서 발표한 <그리운 고향>과 같은 곡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오케레코드는 데이치쿠레코드의 시설을 이용해 녹음을 하고 음반을 제작했으므로, 녹음을 위해 일본으로 간 윤백단이 일본어 음반도 하나 낸 것으로 보인다.

1936년에는 평양 기생 출신 가수 김연월(金蓮月)이 하나이 오토마루(花井音丸)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음반을 냈다. 1935년에 <섬색시>로 데뷔한 김연월은 약 1년 반 정도 오케레코드에서 가수 활동을 했는데, 최소한 1936년 여름까지는 오케레코드가 일본에 가서 녹음을 했으므로, 역시 간 김에 일본어 음반을 낸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확인되는 작품은 일본 가수 기네후치 이치로(杵渕一郞)와 듀엣으로 부른 <娘おはら> 한 곡이다.

1936년에는 또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李蘭影)이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 대중가요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1933년에 태평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발표한 이난영은 같은 해 오케레코드로 옮겨 이후 계속 전속가수로 활동하면서 일제시대에 활동한 대중가요 가수로서는 가장 많은 210곡 정도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난영의 일본어 음반은 1936년과 1938년 두 차례 발표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한국 민요나 대중가요 번안곡도 있고 일본 작곡가의 작품도 있다. 일본 데뷔곡인 <春の歡喜>는 문호월(文湖月)이 작곡한 <봄맞이>이고, <別れの船唄>는 대표작 <목포의 눈물>이다. 또 이시이 가쿠테이(石井岳亭) 작곡으로 되어 있는 <感傷の秋>는 한국에서 먼저 발표한 <감상의 가을>과 제목이 같으므로, 이시이 가쿠테이는 <감상의 가을> 작곡자 염석정(廉石鼎)의 필명이 확실시된다.

그밖에 이난영이 오카 란코 이름으로 일본에서 발표한 작품으로는 <アリランの唄>(<아리랑>), <海のふるさと>, <螢草の唄>(스즈키 테쓰오(鈴木哲夫) 작곡), <夕波歌えど>, <合歡の木蔭で>(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작곡), <月見草の歌>(사토 아키오(佐渡曉夫) 작곡), <白薔薇の乙女>(사토 아키오 작곡) 등이 확인된다. <合歡の木蔭で>는 이후 고가 마사오가 다시 다듬어서 <新妻鏡>으로 발표해 크게 히트했다.

데이치쿠레코드 녹음대장에 의하면 <淚の連絡船>(김해송(金海松) 작곡. <연락선은 떠난다>로 추정) 등도 이난영이 녹음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앞으로 음반 자료 발굴에 따라 추가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