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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스카우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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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전쟁

오케레코드는 스카우트를 통해 성장하고 조선 대중음악계를 평정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오케레코드에서 가장 중요한 가수로 꼽을 수 있는 이른바 ‘걸작집 가수’ 여덟 명 가운데 스카우트를 하지 않고 오케레코드가 자체적으로 발굴해 데뷔시킨 가수는 장세정 한 명이 있을 뿐이다.
이철이 진두지휘한 오케레코드의 스카우트 전략은 그만큼 탁월한 바가 있었으나, 언제나 성공을 거두기만 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때로는 오케레코드가 발굴한 가수를 다른 음반회사에서 가로채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이난영

오케(Okeh)레코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스카우트는 1933년 이난영(李蘭影)의 예이다.

이난영은 원래 극단 태양극단에서 무대 막간 가수로 활동하다가 태평(太平)레코드에서 첫 작품 <시드는 청춘>을 1933년 9월 신보로 발표했다. 하지만 바로 한 달 뒤인 1933년 10월에는 오케레코드에서도 <향수(鄕愁)>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태평레코드에서 먼저 데뷔했으면서도 바로 오케레코드로 옮긴 사정에 대해 이난영 본인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래요. 무척 고생도 했어요. 제가 오케에 입사하기 전에는 태양극단이라는 극단의 가수로 있으면서 시골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그것이 오사카(大阪)에 와서 이마자토(今里)에서 조선 연극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들지 않아 불경기가 계속되다가 드디어 해산되고 말았어요. 돌아갈 여비 없고 15세 소녀가 홀로 오사카에 남겨지게 된 때의 처량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어떤 흥업사(興業師)에게 발탁되어 그래도 간신히 변두리의 오두막 같은 공연장에 나가 연명할 수가 있었습니다만 가난과 유혹이 쉴 새 없이 저를 위협해서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했습니다. 그때 이철씨가 조선 레코드를 기획하여 오사카에 왔다가 레코드의 특약점 주인이 저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이서 저를 찾았는데 도대체 행방불명이어서 이씨도 낙심하고 있다가, 우연히도 돌아가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힘없이 걸어가는 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모던일본」 1940년 3월호 「조선악극단 제도(帝都)방문 좌담회」)

하지만, 태평레코드 전속작곡가로 있으면서 이난영을 발굴한 당사자인 작곡가 김준영(金駿泳)의 회고는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이 레코드 예술가를 회사에서 존중히 함은 그들의 판매수가 회사의 성쇠를 좌우하기 때문이며 이곳에서 가수쟁탈전도 생기고 암약도 있게 됩니다. 지금부터 6년 전 여름 일입니다. 나는 내가 T사(社)에 있을 때 신극 형식으로 춘향전 전집을 취입코자 마침 대판(大阪) 공연 중에 있는 태양극단과 교섭이 되어 단원합숙소에서 취입 연습 중 일좌 중에 화형(花形) 아닌 16·7세 되어 보이는 귀여운 소녀가 방 저편 구석에서 무심코 부르는 노래가 나에게 별다른 직업의식을 자극시켜 즉석에서 본인과 단장 P씨의 승낙을 얻어 철야로 작곡편곡을 하여 취입을 한 것이 힛트반이 되어 회사서도 기뻐하여 기후 2개년(二個年)이 있다 본인과 계약을 하였습니다. 아직 연소하고 객지인 때문에 나의 집에 유하게 하여 연습을 시키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오전 2시경 대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어 침의(寢衣)대로 나가 보니 모 사원과 소녀의 오빠가 와서 모사(某社)와 계약이 체결되었으니 본인을 내놓으라 합니다. T사로서도 계약을 하였으니 이중계약이며 선권(先權)이 T사에 있는 이상 이쪽에 취입권이 있음을 주장하여 심야노상에서 어린 소녀를 새에 두고 언쟁을 하여 결국은 미성년자와의 계약이 성립되지 못함을 안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파쟈마만 입은 패장은 자동차 3대로 개가를 올리는 적의 개솔린 냄새에 멍하였습니다. 속말에 닭 쫓던 개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소녀는 지금도 모사에서 인기절정인 R양으로 수일 전에 만나 보니 이제는 소녀는 아니고 성숙한 처녀가 되었습니다.
(「조광(朝光)」 1938년 2월호 「레코드 문예부장의 제작 고심기」)

김준영의 회고에 나오는 ‘T사’는 태평레코드, ‘P씨’는 박승희(朴勝喜), ‘모사’는 오케레코드, ‘R양’은 이난영, 그 오빠는 이봉룡(李鳳龍)이다. 즉, 이난영을 둘러싼 태평레코드와 오케레코드의 대결에서 민첩함과 치밀함에서 앞선 오케레코드가 압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후 이난영은 1943년 말에 약초(若草)가극단으로 옮길 때까지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의 주역으로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고복수

1934년에는 가수 고복수(高福壽)가 오케(Okeh)레코드에 스카우트된다. 이때 상대는 오케레코드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였다.

고복수는 원래 경남 일원에서 촉망받는 가수로 활동하다가, 1933년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전국적으로 실시한 신인가수 선발 콩쿠르대회에 출전해 입선을 했다. 남자 가수들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성적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때문에 콩쿠르대회 당선자로 방송 출연까지 했는데, 그 방송을 끝으로 오케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전속가수로 입사하게 되었다.

콜럼비아레코드에서는 고복수가 아직 녹음도 하지 않은 신인이어서 오케레코드의 스카우트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고복수는 데뷔곡 <타향살이>를 크게 히트시켜 콜럼비아레코드의 안목이 오케레코드에 못 미쳤음을 입증해 보였다.

고복수는 이후 1940년에 이철(李哲)과 갈등을 빚어 오케레코드를 떠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오케레코드의 발전에 기여했다.

남인수와 김정구

1936년에는 고복수(高福壽)의 뒤를 이어 오케(Okeh)레코드를 대표하는 남자 가수가 된 남인수(南仁樹)와 김정구(金貞九)를 스카우트하게 된다.

두 사람의 영입은 이난영(李蘭影)의 경우와 같은 잡음을 일으키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남인수가 처음 데뷔한 시에론(Chieron)레코드와 김정구가 처음 데뷔한 뉴코리아(New Korea)레코드가 스카우트 무렵 이미 사세가 많이 기울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소속 가수를 빼앗기는 것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시에론레코드에서 본명 강문수(姜文秀)로 활동하고 있던 남인수는 오케레코드에 입사하면서부터 남인수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해 새로운 출발을 했고, 김정구 역시 오케레코드로 옮겨 자타가 공인하는 만요(漫謠) 가수로 인기를 얻으면서 형 김용환(金龍煥)의 아류라는 초기의 평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화자

1938년 가을에는 이난영(李蘭影)에 버금가는 거물급 여자 가수를 스카우트하는 데 또 성공하게 된다. 김정구(金貞九)와 함께 1936년 뉴코리아(New Korea)레코드에서 데뷔했다가 포리돌(Polydor)레코드로 옮겨 신민요의 여왕으로 인기를 얻은 이화자(李花子)가 오케(Okeh)레코드 전속으로 오게 된 것이다.

포리돌레코드는 이른바 일제시대 5대 음반회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곳이었으므로 뉴코리아레코드나 시에론레코드와는 비교가 안 되는 대형 음반회사였지만, 이화자가 오케레코드로 전속을 옮길 때인 1938년에는 공교롭게도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때문에 포리돌레코드의 주축 가수들이 거의 모두 다른 음반회사로 빠져나가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 틈을 타 오케레코드에서도 이화자를 손쉽게 스카우트할 수 있었다.

이화자는 오케레코드로 옮긴 이후 더욱 성가를 높여 한때 이난영을 능가했다 할 정도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현재 이화자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작품들도 거의 모두 오케레코드 입사 이후 발표된 것이다.

박향림

또 다른 ‘걸작집 가수’ 박향림(朴響林)은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쳐 오케(Okeh)레코드의 스카우트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37년 무렵 가수 지망생이었던 박향림은 마침 고향 주을(朱乙)온천을 찾은 오케레코드 연주단을 찾아가 테스트를 자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케레코드에서는 가수로 발탁이 되지 못했고, 그해 가을에 태평(太平)레코드에서 박정림(朴貞林)이라는 이름으로 <청춘극장>, <서커스 걸>을 불러 데뷔해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어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에서 1년 동안 활동한 뒤 다시 태평레코드로 복귀한 박향림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오케레코드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데뷔 이전에 오케레코드에서 한번 거절을 당한 바 있는 박향림은 스카우트 제의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박향림이 오케레코드에 합류한 때는 1939년 가을로, 전속 기념 첫 작품으로 발표한 <코스모스 탄식>이 크게 히트하면서 오케레코드의 스카우트 전략이 적중했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하게 되었다.

백년설

1941년 가을에는 스카우트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백년설(白年雪)의 입사였다.

1939년 벽두에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백년설은 어딘가 부족한 듯하면서도 독특한 창법으로 순식간에 조선 대중음악계를 평정했다. 1940년에 고복수(高福壽)를 떠나보내기는 했지만 남인수(南仁樹)와 김정구(金貞九) 투톱을 위시해 든든한 남자가수 진용을 구축하고 있었던 오케(Okeh)레코드도 백년설의 등장 앞에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년설 노래 한 곡의 매상이 다른 가수 노래 열 곡의 매상을 압도할 정도였다는 상황 속에서 오케레코드는 결국 백년설과 대결하기보다는 백년설을 끌어오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고, 오랜 물밑 접촉 끝에 1941년 가을 백년설을 스카우트하는 데에 성공했다.

공식적인 비용만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5천 원이 들었다고 하는 스카우트의 성공으로 오케레코드는 백년설을 앞세운 마지막 도전자 태평(太平)레코드마저 꺾고 조선 대중음악계를 완전히 평정하게 되었지만, 반대로 집 전체를 떠받치는 기둥이 뽑힌 격이 되어 버린 태평레코드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태평레코드의 강력한 항의에 따라 백년설의 신곡 발매는 몇 달 동안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42년에 들어서야 백년설의 신곡이 오케레코드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태평레코드 시절 못지않은 그의 활동으로 오케레코드의 전략은 역시 성공을 거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채규엽

오케(Okeh)레코드의 스카우트 작전이 언제나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시도를 하기는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 대표적인 예가 채규엽(蔡奎燁)의 경우이다.

채규엽은 ‘유행가의 패왕(覇王)’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를 누린 1930년대 최고의 가수였다. 1930년에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에서 데뷔한 그는 1935년에 잡지 「삼천리」 주최로 실시된 가수 인기투표에서 단연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음반회사라면 어디라도 탐을 내지 않을 수 없는 가수였으나, 당시 업계 1위인 콜럼비아레코드와 맞서 채규엽을 감히 스카우트하려고 시도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콜럼비아레코드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오케레코드의 이철(李哲)은 은밀히 채규엽과 접촉해 전격적으로 스카우트하는 데 성공했다. 1936년 2월 오케레코드는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채규엽이 새로 입사해 <울며 새우네>를 신곡으로 발표한다고 선전했다. 채규엽을 위해 음반번호 체계까지 특별히 새로 만들 만큼 ‘패왕’에 대한 대우는 각별했다.

그러나, 채규엽의 이적은 기존 콜럼비아레코드와의 계약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사건은 결국 법적인 분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당시는 아직 오케레코드의 사세가 콜럼비아레코드를 훨씬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채규엽은 오케레코드에서 단 네 곡만 발표한 뒤 다시 콜럼비아레코드로 복귀했다.

채규엽이 남기고 간 <울며 새우네>는 몇 달 뒤 고복수(高福壽)의 노래로 다시 발표되었다. 오케레코드로서는 과감한 시도였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 스카우트였다.

왕금심

오케(Okeh)레코드가 다른 음반회사에 오히려 가수를 빼앗긴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황금심(黃琴心)의 데뷔를 둘러싼 빅타(Victor)레코드와의 분쟁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사건의 직접 당사자였던 작사가 이부풍(李扶風)의 회고를 참고할 수 있다.

전수린(全壽麟) 작곡의 <알뜰한 당신>, <외로운 가로등>을 불러 첫 데뷔 때부터 히트를 한 황금심을 오케(Okeh)레코드에 있는 박시춘(朴是春)에게서 몰래 빼내오던 때의 일이오. 그때 황금심은 나이가 16세의 아직 어린 소녀였소.
“따르릉 따르릉”
전화가 왔소. 받아 보니 오케레코드에 계신 김상진(金尙鎭)씨였소. 곧 좀 오라는 말이었소.
김상진(한국 영화 초창기에 힘썼고 중앙극장을 경영)이 내게 가사를 부탁한다고 내어놓은 것은 박시춘 작곡의 악보였소. 박시춘과 함께 그 자리에서 가사를 붙이고, 마침 그 노래를 부를 가수가 와 있다기에 연습실에서 <왜 못 오시나>라고 내가 붙인 가사로 노래를 부르게 했소. 가수는 아직 어린 소녀인데 특이한 음성에 노래의 구김살에 독특한 점이 있어, 적이 나를 놀라게 했소. 박시춘이 처음 발견해서 첫 취입을 한 곡조 시키려고 한 것이오.
그 당시에 가사를 빅타에만 내게 되어 있었으나 다른 이름으로 오케에는 조금 가사를 내었소. 쉽게 말해서 뒷구녁 장사라고 할까.
회사에 돌아온 나는 전수린을 설득하고 북의 명인인 한성준(韓成俊) 선생을 찾아 알아보고, 피리의 명수인 이병호를 만나 수소문한 결과 황금심의 집주소를 알아냈소. 그날 밤에 전수린과 함께 황금심의 큰 언니를 찾아 만났소. 그래서 비밀리에 황금심을 빅타에 끌어들이게 하고, 그 뒤에 교섭이 진행될 즈음은 나는 모르는 체 쑥 빠졌소. 황금심은 정식으로 빅타에 계약이 되었소.
<알뜰한 당신>이 세상에 나올 때 황금자(黃錦子)란 이름을 황금심(黃琴心)으로 해서 내어보냈소. 오케서는 <왜 못 오시나>를 본명인 황금자로 내보내고 시비를 벌이려 하나 이미 계약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소.
여러 십년이 흘렀건만 지금에도 문득 박시춘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나서 미안하다는 맘이 드오.

이부풍의 회고에 의하면, 오케레코드가 태평(太平)레코드에서 이난영(李蘭影)을 스카우트할 때와 거의 유사한 상황이 거꾸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발굴은 오케레코드가 먼저 했지만, 유효한 계약을 빅타레코드가 먼저 하는 바람에 오케레코드로서도 결국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빅타레코드에서 데뷔한 황금심은 데뷔곡 <알뜰한 당신>부터 히트를 치기 시작해 이철(李哲)의 입을 더욱 쓰게 만들었다.

이인권

황금심(黃琴心)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해 역시 빅타(Victor)레코드에 빼앗길 번하다가 다시 찾아온 경우로는 이인권(李寅權)이 있다.

이인권은 오케(Okeh)레코드 연주단이 함경북도 청진에 공연을 갔을 때 무대 뒤로 직접 찾아와 테스트를 자청해 가수로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가창력으로 인정을 받은 이인권은 오케레코드에서 데뷔곡 <눈물의 춘정>을 녹음했으나, 발매를 눈앞에 둔 시점에 빅타레코드에서 먼저 임영일(林榮一)이라는 이름으로 <얄궂은 운명>을 발표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케레코드로서는 바로 1년 전 황금심을 빼앗긴 악몽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이인권의 계약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으나, 결국 빅타레코드에서는 몇 곡만 발표한 뒤 오케레코드 전속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오케레코드에서 이인권은 <꿈꾸는 백마강>을 비롯한 많은 히트곡을 발표해 정상급 가수로 자리를 잡았다.

개인 걸작집을 내지 않은 가수로서 <오케가요걸작집>에 참여한 가수는 이인권이 유일한 데에서도 그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