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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오케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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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

오케(Okeh)레코드는 1932년에 설립된 음반회사로, 당시 이른바 5대 음반회사 가운데 가장 출발이 늦었다. 정확한 설립 시기나 경위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 ‘조선악극단 15주년’ 기념 공연이 1947년 4월에 열린 것을 감안하면 1932년 4월 무렵 설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설립 당시 정식 명칭은 일본오케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였고(곧 이어 경성지점으로 바뀌었다) 운영은 조선인 이철(李哲)이 맡았던 것이 분명하나, 자본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자료는 없다. 녹음이나 프레스를 일본 데이치쿠(帝蓄)레코드에 의존했던 것은 분명하므로, 처음부터 데이치쿠레코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철의 부인 현송자(玄松子)가 일본 유학 당시 인연을 맺은 학교 동창의 부친이 데이치쿠레코드의 중역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연결고리 삼아 데이치쿠레코드의 지점으로 설립될 수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오케레코드의 제1회 신보는 1933년 2월에 나왔고, 이후 1943년 말 또는 1944년 초까지 약 11년 동안 계속해서 신보를 발매했다. 신보 발매 규모는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에 이어 제2위에 해당하며, 특히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다른 음반회사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우세를 보였다.

1936년 전반까지도 주로 일본 데이치쿠레코드 스튜디오를 이용해 녹음했던 오케레코드는 1936년 후반 무렵 경성(京城), 즉 서울에 독자적인 스튜디오 시설을 설치해 경성 녹음 시대를 열었다. 오케레코드는 일찍부터 음반 제작뿐만 아니라 무대 공연에도 주력해 당시 가장 우수한 밴드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경성 녹음이 본격화되면서는 다른 음반회사와 달리 대중음악의 편곡과 반주도 모두 조선인 손으로 하게 되었다.

1937년으로 접어들면 데이치쿠레코드에서 지점장 이무라 료즈이(井村良瑞)을 파견해 이철이 행사하던 운영권을 인수했고, 이때부터 회사 정식 명칭이 데이치쿠레코드 경성지점으로 바뀌게 되었다. 1936년 12월에 전격적으로 일어난 쿠데타와도 같았던 이 변화로 인해 이철은 문예부장으로 강등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대외적으로는 이철이 오케레코드의 ‘사장’으로 인식되고 있기도 했다.

1941년에는 1월에 발생한 화재를 계기로 새로운 사옥 건립이 추진되어, 그해 5월 중순에 스튜디오와 각종 시설을 완비한 사옥이 완공되었다. 오케레코드의 마지막 음반이 언제 발매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943년 말까지는 꾸준히 신보를 발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4년부터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고, 해방 이후 일본 자본의 철수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1948년 8월에 <울어라 은방울> 등의 음반을 발매하며 다시 등장한 오케레코드는 회사 이름은 같지만 전혀 별개의 존재이다. 오케레코드가 남긴 일종의 유산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