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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문호월(文湖月). 1908~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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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월(文湖月). 1908~1952

작곡가. 1908년 9월 7일 경상남도 진주 평안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문윤옥(文允玉)이다. 어린 시절에 경상북도 김천으로 이주해서 성장했다. 1918년에 김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6년 뒤 졸업했고, 이어 1924년에는 서울로 유학 가서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해 1929년에 졸업했다. 별도의 음악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독학으로 음악을 익힌 것으로 보이며, 1930년에 성장지인 김천에서 TH연악회(硏樂會)라는 사설 음악 교육 단체를 지도하기도 했다.

1932년에 오케레코드가 설립될 때부터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1933년 2월 제1회 신보에서 이미 작품이 확인된다. 1933년 연말에는 새로 조직된 극단 황금좌(黃金座) 단원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1934년 1월 현재 최호영(崔虎永)과 함께 오케레코드 음악부 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는 한편 많은 작품을 작곡해 발표하기도 했는데, 특히 신민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33년부터 1938년까지 오케레코드에서 발표한 주요 작품으로는 <장한가>, <섬색시>, <귀향>, <불사조>(이상 1933년), <노들강변>, <봄맞이>, <오대강타령>(이상 1934년), <관서천리>, <앞강물 흘러 흘러>, <장산곳타령>(이상 1935년), <새날이 밝아 오네>(1936년), <인생극장>, <산유화>(이상 1937년), <풍년송>, <덩덕궁타령>(이상 1938년) 등이 있다. 오케레코드 초기에 주요 작곡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친척인 손목인을 소개해 작곡가로 데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오케레코드에서 줄곧 평탄하게 활동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어서, 1936년에는 한때 새로 설립된 밀리온(Million)레코드에 참여하기 위해 오케레코드를 떠났다가 몇 달 뒤에 복귀하기도 했다. 밀리온레코드에서도 <경성 사시(四時)타령> 등 몇몇 작품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는 못했고, 밀리온레코드도 1년이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1938년에는 다시 오케레코드를 떠나 빅타(Victor)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작곡가로 활동했다. 빅타레코드에서 발표한 주요 작품은 <닐니리 새타령>, <행복지대>(이상 1938년), <항구에서 만난 여자>, <추억의 두만강>, <만포선 천리 길>(이상 1939년), <반달 뜨는 밤>, <아리랑 술집>(이상 1940년), <파랑새 우는 언덕>(1941년) 등이다.

1941년 이후로는 음반 생산이 위축됨에 따라 주로 악극 무대에서 활동했다. 1941년에는 손목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신향악극단에서 지휘를 맡았고, 1943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는 반도가극단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1945년 광복 이후로도 계속 무대에서 활동하여 희망악극단, 빅타가극단, 현대가극단, 백조가극단, 나나악극단 등의 광고에서 이름이 확인된다. 6·25전쟁 발발 이후에는 군예대 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1952년 8월 31일에 서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문호월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 뒤인 1982년 12월에는 사실상 고향과도 같았던 김천 남산공원에 문호월 노래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