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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고복수(高福壽). 1912~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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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수(高福壽). 1912~1972

가수. 1912년 11월 29일에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났다. 울산에서 보통학교 4학년 때까지 살다가 1922년에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수안동으로 이사를 갔다. 동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약 2년 동안 서양인 선교사 부인에게 음악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부산실업학교에 입학한 뒤 1933년 무렵부터 경상남도 일대에서 촉망 받는 가수로 공연 활동을 시작했고, 그해 11월에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에서 주최한 신인가수 선발대회에서 경상남도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4년 2월 서울에서 열린 최종 결선에도 출전했으나, 콜럼비아레코드에서는 정식으로 활동하지 않고 오케(Okeh)레코드에 스카우트되어 5월에 전속가수로 입사했다.

1934년 6월에 오케레코드에서 데뷔곡으로 발표한 <이원애곡>과 <타향>이 크게 히트하면서 일류 가수로 인정받았고, 이후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1935년에 잡지 「삼천리」에서 발표한 가수 인기투표 결과에서 남자가수 3위로 뽑히기도 했다. 데뷔 이후 1939년까지 오케레코드에서 발표한 주요 작품으로는 <이원애곡>, <타향>, <불망곡>, <휘파람>(이상 1934년), <사막의 한>, <꿈길 천리>(이상 1935년), <새날이 밝아 오네>, <울며 새우네>, <밀월의 대동강>, <고향은 눈물이냐>(이상 1936년), <짝사랑>, <흑장미>(이상 1937년), <마차의 방울소리>, <풍년송>(이상 1938년), <산호채찍>, <제2 타향>(이상 1939년) 등이 있다. 1938년 5월에는 <고복수 걸작집>이 발매되었는데, 이는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첫 번째 가수 걸작집 음반이었다.

1939년 봄 조선악극단 일본 공연 당시에도 고참 가수로 인기를 모았으나, 그해 말 출연 계약 문제로 이철과 갈등을 빚어 1940년 2월에 김능자(金綾子), 김정구(金貞九), 남인수(南仁樹) 등과 함께 해약을 당했다. 다른 가수들은 곧 복귀했으나, 고복수는 혼자 복귀하지 못하고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을 떠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음반을 발표하지 못했고, 무대를 통해서만 가수 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조선악극단을 떠난 고복수는 우선 1940년 3월에 조직된 반도(半島)악극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반도악극좌는 주로 빅타레코드 소속 가수들이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거기서 빅타(Victor)레코드 전속가수였던 황금심을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고복수·황금심 부부는 반도악극좌의 후신인 빅타가극단에서도 함께 활동했고, 1943년에는 새로 창립된 제일(第一)악극대에도 함께 가입해 무대에 섰다. 광복 직전에는 유성(流星)연예대로 옮겨 활동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예전처럼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1950년대 중반까지 여러 공연단체를 오가며 무대에 섰고, 1957년에 은퇴공연을 가졌다. 은퇴 이후에는 공연 수익을 기반으로 여러 사업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1972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