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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이철(李哲). 1903~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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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李哲). 1903~1944

오케(Okeh)레코드·조선악극단·조선연예주식회사 운영자. 1903년 6월 9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억길(李億吉)이며 1938년에 이철로 개명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아오야마 테쓰(靑山哲)이다.

1916년에 공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1925년에 배재(培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928년에 졸업했다. 배재고보 입학 전에는 극장 악사 등으로 일했다는 설이 있다. 배재고보 재학 중이던 1927년에 음악서적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백장미사(白薔薇社)를 설립했고, 배구자(裵龜子)음악무용회(1928년 4월), 전(全)조선현상가무대회(1928년 10월)를 주최하기도 했다. 1928년에 연희(延禧)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고, 극장 악사로 일한 경험을 살려 1929년 연희전문학교 밴드부 설립을 주도했다. 당시 밴드부 지도는 현제명(玄濟明)이 맡았고, 나중에 이철의 매부이자 사업 동료가 된 김성흠(金星欽)도 밴드부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이철은 1927년 무렵부터 서울 안동(安洞)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1928년 이후 같은 교회 선교모임에서 만난 현송자(玄松子)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30년 여름 무렵 교회 안에서도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복잡한 문제가 생겨 두 사람은 함께 안동교회를 떠나 사실상 부부로 생활하게 되었다. 교회를 떠나게 된 사건의 여파로 인해 연희전문학교도 연말에 그만두게 되었다.

현송자는 일찍이 니혼(日本)여자대학 부속 고등여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일본 유학 당시 사귄 동창생의 아버지가 일본 데이치쿠(帝蓄)레코드의 중역이었다고 한다. 데이치쿠레코드는 1934년에 주식회사로 정식 출범했으나, 주식회사가 되기 이전에도 이미 음반 제작을 하고 있었다. 이철은 데이치쿠레코드와 연결된 현송자의 인맥을 동원해 음반회사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고, 1932년에 일본오케(Okeh)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곧 이어 경성지점으로 명칭 변경. 이하 오케레코드)를 설립해 소장(지점장)으로서 운영을 맡았다. 오케레코드는 음반 녹음 및 제작 공정을 모두 데이치쿠레코드 위탁해 처리했던 것으로 보이나, 자본 구성 등의 문제는 경위가 현재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1933년 2월에 오케레코드의 첫 음반을 발매하는 한편, 오케연주단을 조직해 같은 해 연말부터 본격적인 공연 활동도 전개했다. 이때 이철은 때로 직접 밴드의 일원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오케레코드가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선 1935년에는 한학수(韓學洙)가 출자해 건립한 한청(韓靑)빌딩 운영을 맡았다. 당시 한청빌딩은 역시 조선인이 건립한 화신(和信)빌딩과 함께 종로 네거리의 랜드마크였다.

1936년 들어 이철의 오케레코드 운영은 더욱 빛을 발해 조선어교육레코드 발매, 오케연주단의 일본 공연, 서울에 녹음 스튜디오 건립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36년 연말에는 데이치쿠레코드에서 오케레코드의 운영권을 직접 행사하기 위한 조치를 전격적으로 단행하여 이철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936년 연말의 사건이 일어난 이유와 경위는 아직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 결과 오케레코드의 정식 명칭이 일본오케축음기상회 경성지점에서 제국축음기(帝蓄)주식회사 경성영업소로 바뀌고, 이철도 오케레코드 운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로도 오케레코드 운영에 어느 정도 간여하기는 했던 것으로 보이나, 1938년 1월에 조선연예주식회사(설립 당시 명칭은 조선녹음주식회사였으나 이후 변경)를 설립한 뒤로는 공연 기획에 보다 주력하게 되었다.

오케연주단을 확대하여 오케그랜드쇼를 조직했고, 1939년 3월 일본 공연부터는 조선악극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오사카 공연에서는 승무를 무대에 올리면서 태극 문양을 사용한 것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했다고 문제가 되어, 책임자로 지목된 이철이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40년부터는 일본에 이어 중국 공연도 성사시켰고, 이후 조선악극단은 조선․일본․만주․중국을 넘나드는 대형 공연단체로 성장해 갔다.

1940년 9월에는 대중예술 교육기관으로 오케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광복 이후 많은 활약을 하게 되는 김백희(金白姬), 강윤복(康允福), 심연옥(沈蓮玉), 주리(朱莉), 백설희(白雪姬) 등을 양성했다. 조선악극단과는 별도로 오케싱잉팀(1940년), 신생극단(1943년) 등도 조직해 운영하여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예사업가로 활동했다.

조선 연예계를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었기에, 1941년 1월에 사실상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조선연예협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했고, 이어 7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예술부문 연락계를 맡았다. 그러한 가운데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대규모 종합무용극 <부여회상곡(夫餘回想曲)>(이서구(李瑞求) 원작, 조택원(趙澤元) 안무․연출, 유자후(柳子厚) 시대고증)을 기획하여,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1941년 5월에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1944년 6월에 중국 공연 성사를 위해 상해(上海)로 출장을 다녀왔는데, 출장 직전 받은 치과 치료 때문에 생긴 상처가 과로 등으로 인해 패혈증으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의사의 오진으로 치료시기를 놓쳐 버리는 바람에 1944년 6월 20일에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