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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음악 이야기권태호,「악단잡감」, 『동광』, 10월호, 통권26호, 경성: 동광사, 1931, 7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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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원형 개요
- 용도별 근대음악
- 연령별 근대음악
- 내용별 근대음악
- 작품목록
- 음악일지
- 음악기사
- 유 전,「음악의 효능」, 『대한흥학보』, 4월호, 총2호, 동경: 대한흥학회, 1909, 27-29쪽.
- 홍종인,「용강민요 삼십수」, 『개벽』, 4월호, 총34호, 경성: 개벽사, 1923, 84-88쪽.
- 일기자(一記者), 「경성의 화류계」, 『개벽』, 6월호, 제48호(5권6호), 경성: 개벽사, 1924, 95-100쪽.
- 윤극영,「현하의 악단을 돌아보면서」, 『개벽』, 1월호, 총65호(7권1호), 경성: 개벽사, 1926, 71-78쪽.
- 안자산,「조선의 아악」, 『별건곤』, 제12·13호(3권2호), 경성: 별건곤사, 1928.5, 151-153쪽.
- 관악산인,「윤○덕의 넉두리」, 『별건곤』, 6월호, 제21호(4권4호), 경성: 별건곤사, 1929, 114-117쪽.
- 박경희,「음악광시대」, 『별건곤』, 6월호, 제21호,(1권4호), 경성: 별건곤사, 1929, 33-34쪽.
- 안자산,「조선악과 구자국악」, 『불교』, 10월호, 총64호(6권10호), 1929, 32-35쪽.
- 경성(京城) 라듸오」, 『별건곤』, 3월호, 경성: 별건곤사, 1929, 154-156쪽.
- 안자산,「조선음악과 불교」, 『불교』, 2월호, 총68호(7권2호), 경성: 불교사, 1930, 27-32쪽.
- 안재홍,「유행추수는 결국 불가」, 『학생』, 4월호, 총13호(1권4호), 경성: 개벽사, 1930, 36-39쪽.
- 이하윤,「유행가의 건실화」, 『학생』, 4월호, 총13호(1권4호), 경성: 개벽사, 1930, 37-38쪽.
- 정홍교,「가곡에 대한 세 조건」, 『학생』, 4월호, 총13호(2권4호), 경성: 개벽사, 1930, 39쪽.
- 양우정,「민요소고」, 『음악과 시』, 8월호, 창간호(1권1호), 경성: 음악과시사, 1930, 8-9쪽.
- 신고송,「음악과 대중」, 『음악과 시』, 8월호, 창간호(1권1호), 경성: 음악과시사, 1930, 21-23쪽.
- 이주홍,「음악운동의 임무와 실제」,『음악과 시』, 8월호, 창간호(1권1호), 경성: 음악과시사, 1930, 24-25쪽.
- 홍난파,「중앙 악단의 가을씨슨」,『동광』, 1월호, 제17호, 경성: 동광사, 1931, 83-84쪽.
- 안기영,「조선민요의 그 악보화」,『동광』, 5월호, 제21호, 경성: 동광사, 1931, 66-68쪽.
- 홍종인,「반도악단인 만평」, 『동광』, 6월호, 제22호, 경성: 동광사, 1931, 36-66쪽.
- 권태호,「악단잡감」, 『동광』, 10월호, 통권26호, 경성: 동광사, 1931, 71-73쪽.
- 홍종인,「31년의 조선악단 회고」,『동광』, 12월호, 제28호(3권122호), 경성: 동광사, 1931, 23-26쪽.
- 홍난파,「음악과 계급의식」(1),『동아일보』, 1931년 1월 29일자 4면.
- 홍난파,「음악과 계급의식」(2),『동아일보』, 1931년 1월 30일자 4면.
- 신고송,「음악의 계급의식에 대하여-홍난파씨의 논을 반박함」(상),『동아일보』, 1931년 3월 12일자, 4면.
- 신고송,「음악의 계급의식에 대하여-홍난파씨의 논을 반박함」(하),『동아일보』, 1931년 3월 13일자, 4면.
- 홍난파,「음악의 계급의식에 대하여-신고송씨의 반박에 답함」(1),『동아일보』, 1931년 3월 17일자, 4면.
- 홍난파,「음악의 계급의식에 대하여-신고송씨의 반박에 답함」(2),『동아일보』, 1931년 3월 19일자, 4면.
- 구왕삼,「민요합창곡집」,『조선일보』, 1931년 8월 10일자.
- 최영환,「조선민요론」,『동광』, 5월호, 제39호,, 경성: 동광사, 1932, 82-89쪽.
- 이병기,「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1월호, 1권1호, 경성: 진단학회, 1934, 119-144쪽.
- 김관,「음악비평과 연주자」,『조선문단』, 4월호, 4권2호, 경성: 조선문단사, 1935, 137-141쪽.
- 송석하,「처용무, 나례, 산대극의 관계를 논함」,『진단학보??, 4월호, 제2권1호, 경성:진단학회, 1935, 87-114쪽.
- 김관,「음악비평과 연주자」,『조선문단』, 5월호, 4권3호, 경성: 조선문단사, 1935, 137-141쪽.
- 호암(湖岩),「오영(五營) 중에 독존(獨存)한 금위영(禁衛營)」, 『조선일보』, 1935년 7월 24일자.
- 함화진,「조선음악론」,『조광』12월호, 제14호(2권12호), 경성: 조광사, 1936, 138-147쪽.
- 한성준,「고수오십년」,『조광』제18호, 4월호, 3권4호, 경성: 조광사, 1937, 127-134쪽.
- 백화랑,「업서진 민속 사당패」, 『조광』, 제2권 제8호, 경성:조광사, 1936, 171-175쪽.
- 조풍생(嘲風生),「유행가의 정화」, 『조선일보』, 1937년 4월 6일자.
- 계정식, 「아악공개연주회를듣고」, 『조광』, 12월호, 제38호(4권12호), 경성: 조광사, 1938, 215-217쪽.
- 「조선무용의 새 진로-“나는 어째 조선무용을 추는가” 무용가 조 씨의 포부」, 『동아일보』1938년 11월 23일자, 3면.
- 조윤제, 「시조의 본령」, 『인문평론』3월호, 경성: 인문사, 1940, 18-34쪽.
- 이동백·한성준, 「가무의제문제」, 『춘추』3월호, 제2권2호, 경성: 조선춘추사, 1941., 147-153쪽.
- 함화진, 「학교신설을건의함-삼백만원만 있으면 조선음악도 살려갈 수 있다」, 『춘추』, 4월호, 제2권3호, 1941, 경성: 조선춘추사, 127-129쪽.
- 고위민, 「조선민요의분류」, 『춘추』, 4월호, 제2권3호, 경성: 조선춘추사, 1941, 180-188쪽.
- 김사엽, 「농민과 민요」, 『춘추』, 4월호, 제66호, 제7권4호, 경성: 조선춘추사, 1941, 162-171쪽.
- 김계선, 「나와대금」, 『조광』, 66호, 7권4호, 경성: 조광사, 1941, 258-261쪽.
- 「악단 신체제운동 음악협회 발기인회」, 『매일신보』, 1941년 1월 12일자, 석간, 2면.
- 김재훈,「총후엔 건전한 음악, 지나사변일을 맞으면서」(上), 『매일신보』, 1941년 7월 2일자, 조간, 4면.
- 박용구, 「음악계의 파행성-악계의 일년」, 『춘추』, 제12월호, 경성: 조선춘추사, 1942., 136-138쪽.
- 계정식,「후생실내악단 제2회 공연평」, 『매일신보』, 1942년 12월 31일자.
- 함화진,「반도음악소사」, 『반도사화와 낙토만주』, 신경: 만선학해사, 1943, 350-355쪽.
- 평간문수,「김천애 독창회」, 『매일신보』, 1943년 4월 6일자(화), 조간, 2면.
- 박용구,「연주소론」①, 『매일신보』, 1945년 3월 17일자, 2면.
- 공연재현
권태호,「악단잡감」, 『동광』, 10월호, 통권26호, 경성: 동광사, 1931, 71-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