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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음악 이야기한국근대음악의 시기구분과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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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음악의 시기구분과 개관

한국근대음악이 전개된 시기는 1860년부터 1945년까지이다. 85년간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일제강점의 충격 속에서 근대성을 모색하며 국권확립과 회복, 합리성과 직관성 추구, 그리고 새로운 경제체제와 시민사회를 지향하려는 음악을 전개하였다.

근대음악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한다. 1860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제국주의 질서편입과정에서 근대화를 모색하며 서양식 군제로서 군대음악, 또 학교와 교회를 통한 학교음악과 교회음악 등 양악이 전통음악과 갈등을 일으키면서 국가적·사회적으로 확립되어 가던 시기이다. 또하나의 시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음악이 강제화되어 가던 일제강점기로서 양악의 제도화가 촉진되는 반면 국권회복으로서 민족음악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 시기이다.

먼저, 1860년부터 1910년까지 50년간은 그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 음악과 음악사회를 변화시켰다. 이 변화는 안으로부터 봉건성의 사회모순을 극복하고 밖으로부터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투에 대한 민족공동체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서양문명과 일본문명의 충격은 전통적인 한국음악이 지속·보존·변형·극복 등의 반응으로 새로운 균형과 조정이 일어났으며, 군대·교회·학교를 중심으로 양악과 일본풍의 음악이 전개된 것도 큰 변화이었다.

1860년을 근대기점으로 설정한 것은 안으로 봉건성의 사회모순과 밖으로 세계제국주의에 의한 위기가 민족공동체를 형성하며 근대를 추구하였고, 그것이 음악인의 신분제 철폐와 음악의 상설무대화로 근대적인 소통체계를 확립하여 한국음악사에서 오랫동안 2분법적인 아악과 민악(민속악)이 이 시기에 모두 대중적인 소통화를 이룩하고, 또 산조음악과 창극 등의 민족음악양식이 새로운 변화로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음악인과 음악들이 외세음악인 서양과 일본음악에 대응하는 민족음악으로서 그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전개할 수 있었던 모든 음악사적 계기가 1860년이었기 때문이다. 1860년의 역사적 계기가 1894년 동학과 갑오농민혁명으로 분수령을 이룬다. 이것은 동학창도와 농민·천민들의 신분제적 토지소유원리 거부와 근대적인 음악전개가 1860년에서 비롯되었고, 또 북경조약체결(중국과 영·프)에 따른 민족적 위기가 본격화하면서 부국강병의 국가시책에 따른 근대 병제 확립과 함께 양악의 국가적인 수용의 계기 역시 1860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1860년부터 안을 인간화 음악으로 이끌어 내고, 밖을 자주적 음악으로 대응하며, 그 음악사 전개를 그 이전 시기와 성격이 다른 민족음악으로서 전개한다는 점에서 1860년을 근대기점으로 구분한다.

1910년부터 음악전개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지금까지의 음악전개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일제강점기는 한국의 음악이 일제에 의하여 예외없이 억압되고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국주의적인 일본음악 강요에 따라 창가(唱歌)·가요(歌謠;대중가요, 시국가요, 애국가요)·가곡(歌曲) 등의 노래가 강압적으로 소통되고 있었다. 한국은 독립운동으로서 항일음악과 3.1운동 후 민요·판소리·창극 등 민족음악의 부활과 창작운동 등의 새로운 민족음악을 전개하는 한편, 양악의 유미주의(唯美主義)적 탐닉에 의한 음악활동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186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근대음악, 곧 전통음악과 양악이 구체적으로 그 전개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모두 9개 항목으로 구분하고 각 항목별 개관과 구체적 전개양상을 살피려 한다. 이러한 항목들은 각각의 본문과 함께 주로 1차 사료에 의한 악보·도상·문헌·음향 자료들을 제공하며 전개된다.

그 9개 항목이란 다음과 같다.

1. 전통음악의 종류와 근대전개
2. 학교음악의 전개
3. 악대의 근대전개
4. 교회음악의 근대전개
5. 대중가요와 예술음악의 전개
6. 독립가와 시국가의 전개
7. 근대의 전통공연장과 신 공연장 변천과 전국적 분포
8. 음악가의 생애와 예술
9. 종교/예술음악

전체개요

전통음악계의 근대의 전개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과 관련 지어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된다. 동학의 신앙가사와 춤의 등장, 민악(民樂)의 예술적 기반 확립과 새로운 역사 평가, 아악의 민간화, 서양음악의 자주적 수용 모색, 전통 군대 악대의 해체해외와 유학생 이은돌의 자주적 군악대 형성 주도 및 부대의 서양식 악대 신설로의 군대 악대의 변천 , 삼현육각 음악의 일반화, 산조의 확립과 다양한 산조의 출현, 신청(재인청)과 예인집단(藝人集團)에 따른 민악의 활성화, 전통음악인들의 신분해방 기획의 실천, 천민 출신인 신청(神廳) 음악인들의 음악활동, 19세기 중엽의 중인(中人) 출신 예술집단의 연행 활성화의 영향에 의한 근대 가곡·가사·시조·영산회상 등의 정악 전승,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형태의 노래운동, 창극(唱劇)의 태동과 그에따른 판소리의 쇠퇴, 왕립군악대의 창설 등의 전통악대의 변천, 관기(官妓)제도 폐지(1908)와 기생조합(妓生組合)의 탄생(1909), 민간 음악교육기관이었던 조양구락부 창립(1909)에 의한 조선음악과 서양음악 전문 교육, 국권회복의 시대정신이 반영된 창극 '최병두 타령' 공연과 조선 성종 때부터 400여 년간 사용된 장악원(掌樂院)의 변천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협률사(1902)와 같은 관립극장과 연흥사, 단성사, 장안사, 광무대 등 여러 사설극장의 건립을 통하여 전통음악의 서구무대화 양상을 띠기도 한다. 전통 음악인들이 무대 중심의 활동을 하게 되며, 무대 활동의 경험자들이 개별 악단을 꾸려 지방 순회공연도 활발히 이루어지게 된다. 전통음악의 무대화는 레퍼토리의 변화도 초래하게 되는데, 주로 서민들의 기호에 맞는 흥행을 목적으로 한 산타령과 남도소리·서도소리·잡가 등이 주로 불리게 되고 가곡·가사·시조 등의 음악은 무대종목으로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하고, 조선정악전습소나 권번 등의 교습과목으로 채택되어 기생과 소수의 음악인들에 의해 전승된다. 1930년대 이후에는 신민요가 등장하여 전통음악 어법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통음악이나 서양의 음악어법을 수용하게 되고, 서양식 작곡 수업을 거친 작곡가들에 의한 신민요곡이 탄생되면서 다양한 음악적 형식과 어법의 신민요가 만들어진다. 전통음악 전공자 가운데 기생들은 신민요로 1930년대 이후 여러 음반 회사에서 녹음음반을 만들기도 하고, 대중음악계로 투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근대의 전통음악계는 경성방송국의 방송 등을 통한 조선음악을 위한 정규 프로그램을 송출하기 시작하면서 전통 음악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수용되는 계기가 마련되며, 1907년 이후에는 외국자본에 의한 상업용 국악음반이 발매되면서 기생(妓生)과 창부(倡夫)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된다. 국악음반의 녹음은 서울의 전통음악계에 서도소리와 남도소리의 음악인들이 흡수되는 변화를 가져오고, 유능한 기생들도 발굴된다. 그러나 외국자본에 의한 국악음반의 발매는 전통음악계가 음반산업의 대상화가 되면서 상업적 성공을 위한 편중된 레퍼토리로 치우쳐지는 경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1920년대에 중반 이후의 음악 공연은 유성기음반회사나 신문사 등이 기획·후원하는 공연이 많이 열리는데, 주로 화려한 음악가들이 총 출현하는 명창대회였다. 그 예로 우미관에서 열린 ‘조선가무대회’(朝鮮歌舞大會, 1927)·조선일보 주최의 ‘팔도명창대회’(八道名唱大會)·시에론 음반회사의 ‘명창대회’(名唱大會) 등이 있었다.

국가 음악기관의 시대적 변천

역대 음률(音律)의 교열(敎閱)을 맡아보던 장악기관(掌樂機關)으로서, 조선시대 예종 때부터 사용되어온 국가음악기관으로는 장악원(掌樂院)이 있었는데 이후 여러 차례의 개칭과 더불어 그 의미 또한 축소된다. 한일합방 이전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데, 국가의 연향·조회·동가(動駕)·군례(軍禮)의 중단과 제례(祭禮)음악의 폐지, 궁중음악인 등의 감소 등이 그 것이다. 조선후기 왕실 예조(禮曹)에 부속된 장악원은 1894년에 창설한 궁내부로 흡수되었다가, 대한제국이 성립되는 1897년 이후에는 장례원 협률과(章禮院 協律課)로 흡수되었고, 이어서 1900년 6월 19일 포달(布達) 제59호 '궁내부 관제 개정'에 의하여 협률과를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된다. 이후 1907년에는 장악과(掌樂課), 1911년에는 이왕직아악대(雅樂隊), 1913년에는 이왕직아악부, 1946년에는 구왕궁아악부로 각각 고쳐 부르다가 1951년에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으로 국가음악기관으로 새로 발족하여 현재에 이른다.
장악원-교방사(1897)-장악과(1907)-장악부(1908)-이왕직아악대(1911)-이왕직아악부(1915)-구황국아악부(1946)-국립국악원(1951)

그 외 음악단체 및 극장의 양상

국가음악기관 이외에도 전통적으로 왕권을 수행한 계급들의 음악계, 즉 사설 악단이 있었다. 이러한 악단에는 시회(詩會), 악회(樂會), 기회(耆會), 그리고 궁정을 비롯하여 지방 관청에 이르는 아악류의 음악단체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음악은 이후 시조와 가곡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60년 이후 근대 음악사에 있어서 기층 민중들의 악단에는 신청(재인청)과 예인집단도 들 수 있다. 신청은 무(巫)를 수행하는 무인(巫人) 조직체로서, 예인집단은 기층민중 출신의 예술인 집단으로서 종합공연예술 형태를 보이는 높은 수준의 예술성을 갖춘 기층 민중 악단의 대표적 예이다. 이들은 성리학적 예악관을 지향한 조선 사회에 전 조선의 민악화(民樂化)를 이루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9년에는 서양음악을 자주적으로 수용하고 조선음악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전문기관의 필요성에 의하여 조선음악과 서양음악을 함께 교육시킬 수 있는 민간 전문 음악교육기관인 조양구락부(朝陽俱樂部)→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가 설립된다. 조양구락부는 경성도동에서 발기(1909년 12월 29일)된 이후 조선정악전습소(1911)로 발전된다.
이 시기 전통 음악 분야에서는 전문 문화 예술의 무대화 프로그램을 개발함에 따라 민간화와 대중화 그리고 예술화를 모색하는 발전적 형태를 갖추게 되는데, 민중들의 새로운 시대의 민족음악 예술의 탄생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상설무대화가 촉진 된다. 서양식 무대 공연장과 예술단체의 역할을 겸비한 새로운 종합예술단으로서 악단이 설립되게 되는데, 1902년에 설립되어 전통음악의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협률사(協律社), 1907년에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1908년에는 협률사가 바뀐 원각사(圓覺社)가 등장하고, 이 밖에 장안사장안사(長安社), 음악사(音樂社), 단흥사(團興社) 등의 사설극장 및 악단이 활동한다. 현대식 극장의 등장과 악단의 활동은 판소리의 창극화와 같은 전통음악의 대중화와 신연극(新演劇)과 같은 극장공연예술의 발전에 새로운 전기 마련, 그리고 음악 수용층의 확대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1920년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여러 창극단이 명멸(明滅)하다가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중심으로 수많은 명창들이 활동하게 된다. 이후에도 여러 창극단이 있었으나, 1940년 중반에 쇠퇴한다. 그러나 1948년 여류명창들로 구성된 여성국악동우회를 시작으로 이후 여러 여성국극단이 출범하면서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맞음과 더불어 창극과 판소리의 쇠퇴를 가져오게도 된다.
해방 직후 1946년에는 민속악인들을 중심으로 대한국악원이 설립되어, 아악류의 음악을 전승하는 이왕직아악부와 다른 줄기로 활동을 하다, 한국전쟁으로 대한국악원은 해산하고 이왕직아악부는 대한민국 직제로 공포되어 국립국악원으로 개칭하여 활동을 잇게 된다.

새로운 음악 양식의 출현

근대의 전통음악계는 전래의 아악류 수용층이 새로운 예술적인 민악류의 욕구와 맞아 떨어지면서 가야금산조를 시발로 하여 산조라는 기악독주곡과 민속 기악 합주곡인 시나위라는 형태가 새로이 출현한다. 산조는 가야금산조의 명인들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거문고산조·대금산조·해금산조·피리산조 등의 여러 악기의 산조와 다양한 유파가 형성된다. 또한 상설무대화에 따른 판소리에서 발전한 성악곡인 창극이 출현하게 되면서 창극은 근대에 탄생된 새로운 성악 양식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고, 창극의 성행과 대조적으로 판소리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시조 또한 우조시조와 같은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지고, 잡가 또한 20세기 벽두에 구가(舊歌, 기존의 잡가와 가곡·가사·시조)와 신가(新歌, 신민요와 창가 등)를 포함한 근대성악곡으로 발전된다.

01.전통음악의 종류

전통음악의 종류는 여러 기준에 의해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는 '가무악 종합예술' '성악' '기악'의 3가지 분류에 의해 살펴보고자 한다.
'가(歌)·무(舞)·악(樂) 종합예술 형태'에는 문묘제례악 · 종묘제례악 · 굿음악 · 범패 · 연희 등을 들 수 있으며, '기악연주 형태'에는 여민락 · 수제천 · 동동 · 보허자 · 보허사 · 낙양춘 · 영산회상 · 자진한잎 · 청성자진한잎 · 취타 · 대풍류 · 산조 · 시나위 · 풍물놀이 · 사물놀이 등을 들 수 있으며, '성악 연주 형태'에는 민요 · 잡가 · 가곡 · 가사 · 시조 · 판소리 · 창극 · 가야금병창 등을 들 수 있다.
분야별 자세한 종류는 표1을 참조.

한국전통음악의 종류
장르 분야 작품명 또는 분야
가 무 악
종합예술
문묘제례악 15궁=황종궁,대려궁,태주궁,협종궁,고선궁,중려궁,유빈궁,임종궁,이칙궁… 등
종묘제례악 보태평(11곡=희문,기명,귀인,형가,즙녕,융화,현미,용광정명,중광,대유,역성)
정대업(11곡=소무,독경,약정,선위,신정,분웅,순응,총유,정세,혁정,영관)
굿음악 서울굿,경기굿,황해굿,진도씻김굿,동해안별신굿,제주영등굿 등
범패 안채비소리,홋소리,짓소리,화청,회심곡
연희악 재인들의 산대, 탈춤, 오광대 등
성 악 민요 경기민요(도라지,양산도,노래가락,창부타령,경복궁타령,한강수타령…등)
서도민요(수심가,엮음수심가,산염불,자진산염불,긴난봉가,자진난봉가…등)
남도민요(진도아리랑,육자배기,자진육자배기,흥타령,농부가,강강수월래…등)
동부민요(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신고산타령,애원성…등)
제주민요(이어도사나,이야홍타령,오돌또기…등)
잡가(좌창) 경기좌창(12곡) 휘모리잡가(6곡)
서도좌창(13곡)
선소리(입창) 경기입창(놀양,앞산타령,뒷산타령,잦은산타령…등
서도입창(놀양,앞산타령,뒷산타령,잦은산타령…등
남도입창(보렴,화초사거리,육자배기,새타령…등
가곡계 남창가곡(26곡) 우조(11곡:초수대엽,이수대엽,중거,평거,두거,삼수대엽…등)
계면조(13곡:초수대엽,이수대엽,중거,평거,두거…등)
반우반계(2곡:반엽,편락)
여창가곡(15곡) 우조(5곡:이수대엽,중거,평거,두거,우락)
계면조(8곡:이수대엽,중거,평거,두거,평롱,계락…등)
반우반계(2곡:반엽,환계락)
가사 12가사(백구사,황계사,죽지사,춘면곡,어부사,길군악,처사가,양양가,매화타령…등)
시조 경제(평시조,중허기시조,지름시조,여창지름시조,엇시조,엇엮음시조…등)
완제(평시조,엮음시조)
내포제(평시조,엮음시조)
영제 (평시조,엮음시조)
판소리 5바탕: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
단가 진국명산,죽장망혜,광대가,만고강산,운담풍경,강산풍월,이산저산,백발가… 등.
병창 단가(죽장망혜,녹음방초,청석령지날제,호남가,공도난이… 등)
판소리대목(가자어서가,고고천변,사랑가,유색황금눈,제비노정기,화초타령등)
기 악 영산회상계 현악영산회상
(9곡=상영산,
중영산…등)
천년만세(3곡=우조가락도드리…등)
별곡(가진회상곡=상영산,중영산…등)
관악영산회상(8곡=상영산,중영산,세령산…등) - 함녕지곡(3곡=삼현도드리…등)
평조회상(8곡=상영산,중영산,세령산,가락덜이,삼현도드리,하현도드리…등)
여민악계 여민락(향피리중심)
여민락만(당피리중심)
여민락령(당피리중심)
해령(당피리중심)
정읍계 정읍(수제천)
동동
취타계 대취타
취타(관현합주)
관악취타 취타,길군악,길타령,별우조타령,군악
취타,길군악,길타령,염불타령,삼현타령,별곡
보허자계 보허사
보허자
밑도드리
웃도드리
양청도드리
우조가락도드리
산조계 가야금산조(성금연류,함동정월류,김죽파류,강태홍류,서공철류 등)
거문고산조(신쾌동류,한갑득류 등)
대금산조(한범수류,이생강류,서용석류,강백천류,원장현류)
아쟁산조(한일섭류,김일구류,박종선류,정철호류,윤윤석류)
해금산조(지영희류,한범수류 등)
피리산조(지영희류,이충선류 등)
시나위계 경기시나위
남도시나위
풍물계 경기충청농악
우도농악(정읍농악,우도농악)
좌도농악(남원농악)
영남농악(삼천포농악)
02.장악원(掌樂院)

장악원(掌樂院)은 조선초기의 음악기관인 아악서(雅樂署)·전악서(典樂署)·악학(樂學)·관습도감(慣習都監) 등의 4개 기관을 합쳐 단일화하여, 조선 예종(睿宗) 원년(1468)년에 통합·개칭되어 한말까지 존속한 국악 장악기관.
국가적으로 치르는 모든 대중소의 행사에 가·무·악(歌·舞·樂)의 장르로 참여하여 예악 문화를 꽃피운 왕립 음악기관으로, 연회[宴享]·조회의식[朝儀]·사대(事大)와 사신접대[待使客]·제사 등의 의식에 참여하였다.
구성은 첫째, 정직(正職)으로서 과거 출신의 양반 관료와 둘째, 잡직(雜職)으로서 중인 출신과 악생·악공 출신으로서의 행정관료, 셋째 음악·정재(呈才)·노래[歌樂] 분야에 실제를 도맡은 궁중음악예술인으로 이루어져있다. 장악원은 승정원·사간원·홍문관·성균관·봉상시·내의원·상의원 등과 더불어 정3품 관청에 속하는 기관으로 나라의 음·악 행사를 도맡았다.
장악원은 근대에 여러 차례의 개칭과 기구의 축소가 이루어진다. 기구의 축소는 한일 합방 이전부터 이미 인원 감소 추세로 알 수 있다. 광무 원년(1897) 교방사 시기 제조 이하 772명의 정원이 1908년 장악부 시기는 그 인원이 그 절반인 305명으로 감소된다. 한일합방(1910) 이후 아악대 시기의 연주인원은 189명으로 줄고 1915년 이왕직아악부 시기는 겨우 57명의 음악인만이 남게 되어 500년 전통의 궁중음악 문화유산이 멸절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후 국립국악원의 설립으로 다시 궁중음악의 명맥을 잇게 된다.
장악원은 예종 원년(1468)년 그 명칭을 얻은 뒤 연산군(燕山君) 11년(1505) 9월에 연방원(聯芳院)으로 개칭하였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다시 장악원으로 바뀐 뒤 한말까지 이 이름으로 존속 한다. 조선후기 장악원은 왕실 예조(禮曹)에 부속되어 있었으나, 1894년에 창설한 궁내부로 흡수되었다가, 대한제국이 성립되는 1897년 이후에는 장례원 협률과(章禮院 協律課)로 흡수된다. 이어서 1900년 6월 19일 포달(布達) 제59호 '궁내부 관제 개정'에 의하여 협률과를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된다. 1905년 장례원이 폐지되고 ' 예식원'(禮式院)이 신설되면서 장례원 교방사는 1907년에 '예식원 장악과'(禮式院 章樂課)로 축소·개편된다. 이후 1908년에는 일제가 기구와 재정을 정비하여 제례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제사제례와 관련된 관제의 개편과 장례원 장악과 악공들과 견내취 소속원들이 실제적으로 해산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장악과'에서 '장악부(章樂部)'라는 이름으로 개칭된다. 장악부는 전통 아악 분야인 '국악' 뿐만이 아니라 양악인 '음악'을 함께 관장하게 된다. 이후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의 법통을 일개 '이왕직(李王職)’으로 전락시키며, 1911년 장악부를 '이왕직아악대'로 바꾸게 하고, 1913년에는 이왕직아악부로 개칭된다. 이왕직아악부로의 개칭은 유구한 민족음악의 전통을 잇는 문화기구로서의 의미는 상실된 채, 이왕가(李王家)만의 축소된 음악기구로 의미가 변질된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왕직아악부는 1946년에는 구왕궁아악부로 이름을 바꾸고 아악의 보급에 힘쓰게 된다. 1950년 대통령령으로 국립국악원 직제가 공포되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1951년에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국립국악원이 드디어 문을 열게 되고 이후 서울로 옮겨와 현재에 이른다.
장악원-교방사(1900)-장악과(1907)-장악부(1908)-이왕직아악대(1911)-이왕직아악부(1913)-구왕궁아악부(1946)-국립국악원(1951)

03.근대의 정악 전승 양상

정악(正樂)은 아정(雅正)한 음악 또는 정대(正大)한 음악의 준말로, 글자의 뜻대로 말하면 올바른 음악이다.
정악이란 용어의 유래는 1911년에 조직된 ‘조선정악전습소(趙鮮正樂傳習所)’의 전신인 ‘정악유지회(正樂維持會)’에서 기원했다. 정악유지회는 풍류방(風流房)에서 노래와 기악을 즐기던 선비나 부유했던 중인 출신의 풍류객들에 의하여 전승되었던 음악문화와 서양음악의 자주적 수용과 교육을 위하여 1909년 설립된 민간 전문 음악 교육 기관이었던 조양구락부의 후원회 이름이다. 정악유지회의 명칭에서 사용된 정악의 개념은 조양구락부의 교과목이 성악부분의 가곡·가사와 기악부분의 거문고·가야금·단소·양금 등의 풍류합주를 위한 악기들이 포함된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 정악의 개념은 풍류방의 음악문화였던 것이다. 풍류방의 음악문화의 대표적인 것에는 성악인 가곡·가사·시조와 기악인 영산회상이 있다.
이후 민속악의 대칭되는 의미로 넓게 아악까지 포함한 의미로 정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곡·가사·시조와 영산회상으로 대표되는 풍류방 음악문화에 한하여 정악의 의미로 한정하며, 근대 정악의 발전 양상을 기술하고자 한다.
정악의 발전은 조선시대 16세기 후반 또는 17세기 초반에 시작되었던 ‘시회’와 18세기의 ‘악회’ 그리고 고려시대 최당의 ‘해동기로회’에서 출발하여 조선후기에 까지 전승된 민간 중심의 동호인 모임인 ‘기회’ 등의 음악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시회’란 중인층을 중심으로 하여 상인(常人)과 천인(賤人)까지 포함하여 꾸린 시 동인 모임체[時社}로 시 창작 중심의 악회(樂會)를 뜻한다. 이들은 17세기 후반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들과 함께 예술의 주요 향유층으로 등장한다. 이 시회는 한시(漢詩)와 시조와 가곡류의 노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이를 통하여 중인들의 시와 노래[歌壇]가 음악사적으로 시조와 가곡 분야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그 예로 『해동가요』를 남긴 김수장(金壽長)은 ‘노가재가단(老歌齎歌壇)’을 주도하였고, 가인(歌人)으로 활동한 김천택(金天澤)도 김수장과 함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을 주도하였는데, 경정산가단의 가객들은 도시의 서리와 일부 중인들로 시조시의 창작자 겸 가창자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퉁소, 가야금, 현금, 비파 등의 악기에도 능하였다. 이들에 의해 도시평민층의 생활정서가 표현되어 현실생활을 보다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는 엇시조, 사설시조와 같은 새로운 형식의 시조들이 창작되었다.
‘기회’(耆會)는 국가 기관이 관료 출신이나 일반 기로(耆老, 예순 살 이상의 노인)들에게 베푼 연회 모임, 또는 민간에서 사대부 출신 기로들의 악(樂)동인[耆社] 모임을 일컫는다.
근대 정악의 발전과 관련이 있는 민간 중심의 동호인 모임인 ‘기회’는 음악 연주와 시 짓기 그리고 활쏘기와 바둑 두기 등 문화 예술을 스스로 즐겼던 모임으로, 이것이 악회나 시회 등의 음악 문화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많은 기회들 가운데 박효관(朴孝寬, 1800~1880)의 기회는 민간 기회의 전통을 몇 백 년 계승해 오면서 음악문학사에 시·가·악에 깊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기회이다. 자산 안확(自山 安廓)이 밝힌 가곡·시조의 계보도(안확, 「歌聖 張竹軒 逝去 百二十年」, 『朝鮮』11월호, 제145호, 京城:조선총독부, 1929, 30~35쪽)에서 시회·기회가 미친 가곡·시조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조선정악연습소의 가곡·가사를 가르쳤던 가악 교사였던 하순일과 학감 및 양금교사, 그리고 분교실인 다동조합인 기생조합의 가곡·가사 교사였던 하규일, 그리고 가야금 교사였던 명완벽 모두는 17세기 이래 중인들의 시회의 전통을 둔 가단(歌壇)과 관계가 있는 장우벽(張友壁, 1730~1809)의 계보로 이어진 사람들이다.
장우벽은 통예관을 맡고 있던 중인 신분으로, 18세기 인왕산 중턱에 가대(歌臺)를 설치하여 매화점 장단을 창안하였으며, 가곡 발달에 큰 자취를 남긴 중인 출신의 인물이다. 장우벽 가단의 계보는 안확의 「가성 장죽헌 서거 120년」에 따르면 중인출신의 풍류객들인 장우벽 이후 오동래(吳東萊)를 거쳐 최수보(崔守甫)- 하중곤(河仲鯤)-명완벽(明完壁)에 이어 전문음악인인 하규일(河圭一)로 이어진 것과 장우벽-오동래-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홍진원(洪鎭源)-추수교(秋數敎)로 이어진다고 밝히고 있다.
하규일·하순일·명완벽은 최수보와 박효관의 뒤를 이은 것이다. 박효관은 가집(歌集) 『금옥총부(金玉叢部)』를 만든 그의 제자 안민영과 함께 인왕산 칠송정(七松亭)을 근처에 필운대(弼雲臺)라는 가대(歌臺)를 만들고, 그곳을 시회와 같은 맥락인 서원시사(西園詩社)라 칭하여 그곳에서『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하였다. 또한 안민영과 그의 스승 박효관은 기회의 하나였던 노인계(老人契)에서도 활동하였던 인물이다.
악회(樂會)는 다양한 계층들이 악(樂)을 지향하며 벌이는 판모임으로, 음악 분야에 악공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의 악회는 경세치용의 실천 원리를 주창한 실학자들이 본래의 악(樂)을 회복하자는 새로운 문화 예술 운동의 일환으로, 홍대용(1731~1783)·박지원(1737~1805)·이덕무(1731~1793)·박제가(1750~1805?)·이규경(1788~?)·최한기(1803~1879) 등의 여러 실학파들의 '개신악학정신(改新樂學精神)'을 통한 악회 운동과 민족음악 전개로 드러난다. 신분적 차이를 넘어 계급 해방의 모습과 시와 악을 본유의 악(樂)으로 회복하려했던 악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예로는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溶)이 자기 집에서 판을 벌려 운영하였던 '유춘오 악회'를 들 수 있다. 이 악회는 홍대용과 같은 양반 신분의 동료 뿐만이 아니라 중인 출신이었던 김억(金檍, 당대 거문고와 양금의 명인), 천민 출신이었던 김성기(金聖器, 당대 거문고 명인)와 보안(普安, 당대 생황과 양금의 명인) 등이 함께 판을 벌였던 것이다. 이러한 악회에 악공들이 함께 참여하여 풍부해진 정악 기악곡은 근대까지 그 맥이 이어져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영산회상 등의 정악기악곡을 가르치게 된다.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가야금교사로 활동하였던 명완벽은 시회와 기회의 전통을 이어 가객으로 계보를 형성한 장우벽 계보에서 박효관의 뒤를 이은 인물로, 그 계보의 다른 인물들이 모두 중인 계층의 풍류객집단이었던 점과는 달리 전문 악생 출신이다.
이는 전문 악공·악생들이 악회를 중심으로 풍류계 음악 활동을 하였으며, 또한 이들은 시회·기회 등에도 참가하여 중인 중심의 풍류음악인 정악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회·기회·악회 등을 중심으로 중인 계층이 풍부화시킨 정악은 근대 조선정악전습소와 기생조합 등에서 그 명맥이 이어지기도 한다.
시회 도상자료 [송석원시사 야연도](松石園時社 야宴圖), 김홍도(1791) --- 근대음악사 309쪽. 기회 문헌자료 -- 안확, 「歌聖 張竹軒 逝去 百二十年」, 『朝鮮』11월호, 제145호, 京城:조선총독부, 1929, 30~35쪽 악회 도상자료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 강세황 --- 근대음악사 307쪽. 캡션 : 병조참의와 한성부판윤을 지낸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지인(知人)들과 한가한 시간을 즐기는 정경을 그린 것으로, 한 켠에 거문고가 그려져 있다. 선비들이 거문고 연주와 더불어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나타낸다.

04.조양구락부(조선정악전습소의 전신)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조선음악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양악을 수용하여 자주적인 음악 교육을 발전시키려는 일환으로 설립(1909년 12월에 발족)된 민간 전문 음악 교육 기관. 이후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로 재조직된다.
처음 발기인은 김경남(金景南)·하순일(河順一)·조남승(趙南升)·한석진(韓錫振)·이병문(李秉文)·백용진(白鎔鎭)·고우경(高禹敬)·한규우(韓圭祐)·김현주(金顯炷)·한용구(韓鎔九) 10인이었다.
조양구락부 발족 당시 사업항목에는 전통음악의 구가(舊歌)에는 남창과 여창의 가곡(우조와 계면조) 및 12가사, 구악(舊樂)에는 거문고, 가야금, 양금, 생황, 단소와 그 밖의 춤 등의 각종음악과 신악(新樂) 즉 서양음악으로는 풍금과 사현금(바이올린)을 주로 하되 악리(樂理)를 서면(書面)으로 교수하고, 그 외에 음악보(音樂譜)를 편찬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조양구락부는 가곡·각종 악기·서양음악의 교육과 악보 편찬 등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교직원을 포함한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소장 : 한석진(韓錫振), 교과감독 : 함재윤, 가악부 교사장 : 하순일, 가악교사 : 신경선·정덕근·이영환, 춤 교사 : 이병문·함화진, 음악부 교사장 : 김경남, 현금교사 : 이병문·조이순, 가야금 교사 : 김진석·이병문, 양금 교사 : 백용진 김현주, 풍금 교사 : 김인식, 조양구락부의 구체적 설립 목적은 이들이 결의한 내용에서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1910년 1월 18일자 『 대한민보 』에 기재되어 있다.



1. 우리 나라 여러 왕조 시대의 임금이 지으신 가곡과 어질고 밝은 이의 지혜가 조화를 이룬 사조를 고치고 르 음율을 익혀 높고 귀하신 성덕과 동열을 전국 인민이 오래도 록 전하여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2. 시기에 적당한 애국가와 민간에 떠도는 노래를 수입하여 국가의 보통 가곡을 만들어 학교로 부터 민간에 까지 보급하기 위하여

3. 친척과 가족간에 정있고 은혜하는 마음과 의리와 도덕으로 서로 즐거워함이 가득 깃 든 가요를 만들어 전국 민족이 집집마다 보통가로 남녀는 물론하고 언제나 서로 부르 게 하기 위하여

4. 나라간의 교제와 구빈 접대에 화락하고 여유 있는 예곡을 만들어 남녀는 물론하고 사 람마다 배우고 익혀 공사연에 응용케 하기 위하여

5. 나라안에 학문이 있게 하고 저 요숙한 부인으로 가악 및 무기(舞技)를 가르치고 익히 게 하여 황국의 큰 연회에도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6. 서양 악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7. 가보(歌譜) 와 악보를 수집 편찬하기 위하여



'조양구락부'의 후원을 위해 '정악유지회'가 1911년 2월에 결성되는데, 이준공(李埈公)·박영효(朴泳孝)·윤택영(尹澤榮)·민병석(閔丙奭)· 조중응(趙重應)·윤덕영(尹德榮)·유길준(兪吉濬)·이지용(李址鎔)·김종한(金宗漢)·민영찬(閔泳瓚)·박기양(朴箕陽)·김승규(金昇圭) 등 발기인은 12명이었다. ‘정악유지회’는 개화파·친일파·독립운동가·종친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조양구락부’가 설립 당시 조선음악의 체계적 교육과 서양악의 자주적 수용 발전을 위한 교육이라는 설립 취지와는 그 후원회가 친일파로 지탄 받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구성 되어 있어 처음부터 국권회복 운동이라는 민족 현실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을 갖고 있었다.
1911년 6월 16일에 정악유지회는 박영효(朴泳孝)의 청원에 의해 왕실(王室) 내탕금(內帑金) 2400원을 보조 받게 되고, 더불어 매달 200원의 지원금을 받기로 약속을 받는다. 이에 조양구락부는 발전적 해산을 하고 조선정악전습소로 재출범하게 된다.

05.조선정악전습소

국악 교육 기관의 하나로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교육하는 민간 음악무용학교. 1911년 6월 16일 정악유지회가 조직됨과 동시에 조양구락부는 발전적 해산을 하고 재조직된 것으로 많은 졸업생을 배출함. 1912년 7월에 여악(女樂)을 교습하기 위하여 한성기생조합원 중 기생을 선발·교습하여 중부 상다동(上茶洞)에 '다동조합(茶洞組合)' 이라는 기생조합을 정악전습소 분교실로 운영하였다. 분교실이었던 다동조합은 1914년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발전하였다가 이후 조선권번으로 개칭된다.
조선정악전습소의 처음 사무소는 광화문 전기로소(前耆老所)를 얻어 수리 또는 신축하여 마련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악기 및 여러 가지 기물(器物)을 구입하고, 부서(部署)·교사(敎師)·학칙(學則) 등을 정비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2년 5월에는 제동(齊洞) 취운정(翠雲亭) 안에 있는 일가정(一可亭)에 사무소를 옮기고 곁방살이를 하다, 1915년 수송동(壽松洞) 경찰기마대 건너편 숙명여자고등학교 서쪽에 있는 집을 사들여 안정적인 사무소를 마련하고 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조선정악전습소는 가요부(가곡부를 일컬음)· 음악부·악구(樂具)제조부의 세 부서를 두고, 가요부와 음악부는 다시 이습과(肄習科)와 교수과(敎授科)로 나누었다. 이습과는 이미 음악을 배운 기성 음악인들이 모여 가곡이나 영산회상, 도드리 등을 주기적으로 모여 합주함으로써 기술을 연마하는 모임이고, 교습과는 초보자를 모집하여 교육을 전담하는 부서였다.그리고 악구제조부는 각종 악기의 제작과 수리를 맡아보는 부서였다.
학과 과정은 갑종(甲種)과 을종(乙種)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졸업기간은 두 학기였다. 지원 입학자의 자격은 중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로 15세 이상의 연령이었다. 전체 생도의 수는 50명이었다. 조선악부는 수시로 모집하였고, 서양악부는 매년 4월 모집이었으나 악기전공은 언제나 입학할 수 있었다. 한편 기악과의 자격조건은 성악과 졸업생이거나 동등 이상의 이론에 대한 학력을 가진 자로 제한하였다.
전공과목은 조선악부에 가곡·현금(거문고)·가야금·양금·단소·생황·취악병(吹樂幷), 서양악과에 성악·악리(樂理)·창가곡조(唱歌曲調)·풍금·사현금(바이올린)이 있었다.
교사에는 하규일(河圭一)·명완벽(明完壁)·함화진(咸和鎭) 등의 아악계 최고 중진과 양악계를 대표하는 김인식(金仁湜) 등이 있었는데, 임원 및 교사의 자세한 구성은 다음과 같다.
소장:한석진, 소감: 홍긍섭, 학감:하규일, 양금교사 겸 사무원:백용지, 생황교사 겸 사무원:한진구, 회계: 유종열, 서기:김효연, 남창·여창 교사 및 분교실 감독:하순일, 남창·여창 교사:이영환, 거문고 교사:김경남, 조이순, 가야금교사: 명완벽·함화진·한규우, 양금교사:김상순, 단소교사:이춘우·조동석, 서양 음악교사:김인식, 서양 음악 보조교사:염광섭·하대홍 조선정악전습소와 동 회원들은 많은 연구 활동을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악학궤범 3책 편집, 거문고보·양금보로 된 남창 가곡과 여창 가곡보 4책 편집, 영산회상과 여민락을 서양악보표 부호로 해등(解登), 1912년 3월 이후 이상준 편 조선 속곡집·신구 속곡집·신구 잡가·신유행 창가·보통악전 대요 등을 출판, 1914년 3월 오선보로 채보한 김인식 편 영산회상(양금보) 출판.
조선정악전습소는 ‘정악유지회’의 후원으로 창설 이후 6~7년 동안은 윤택하게 운영되었으나, 1916년 이후 초창기 공로자였던 함석진·홍긍섭·하규일·한진구 등의 결별과 내부불명예 사건, 그리고 후원회의 재정지원의 약화와 관심 소홀로 인하여 1915년 이후 위축되기 시작한다.
1935년 조직된 수요회로 인하여 4~5년간 활력을 얻기는 하나, 다시 재정란으로 흐지부지 된다. 1943년까지 겨우 몇 명 개인의 개인교습서로 명맥을 유지하다 1944년에 폐소(廢所)된다. 김인수의 노력으로 1945년 8월 이후 재개되고, 1947년 11월에 사단법인 한국 정악원으로 재출발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06.창극(唱劇)

여러 사람이 배역을 나누어 무대에서 연기를 하며 판소리가락으로 대본을 얹어 부르는 음악극. 서양의 오페라와 같은 형태의 음악극과 비교할 수 있는 전통적인 판소리로 노래하는 한국적 음악극.
판소리 선율로 짜여지며, 반주는 국악관현악 형태로 이루어진다.
창극은 고종 광무 6년(1902)에 대한제국이 조직한 협률사(協律社)라는 국립극장 시절 처음으로 일인다역(一人多役)의 단창(單窓) 형태로 공연하던 판소리를 연극처럼 여럿이 등장인물의 역할을 나누어 연기를 하며 판소리를 부르면서 시작된 음악극 형태로, 이 때 창극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게 된다.
초창기의 창극은 제대로 된 무대배경을 갖추지는 못하고 흰색 광목을 두르는 정도에 역할을 나누어 판소리를 연기와 더불어 하였기에 엄밀히 말하면 분창(分廠) 또는 입체창(立體唱)에 더 가깝다. 무대미술사에 의해 원근법이 적용된 무대장치를 갖춘 창극은 1935년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춘향전> · <심청전> · <흥보전> 등에서 그 형태를 찾을 수 있다. 이후 부민관(1935) 시대에는 소리 위주로만 극을 전개하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연극적이면서도 노래 · 무용 등 볼거리가 풍성한 음악극 형태가 시도된다.
협률사 때 공연되었던 초기 창극으로는 당시 판소리 명창이었던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박기홍(朴基洪)·정정렬(鄭貞烈)· 이화중선(李花中仙) · 김초향(金楚香) · 김추월(金秋月) · 신금홍(申錦紅) · 박녹주(朴綠珠)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춘향가>(1903년)·<심청가>(1904년)·<흥부가> · <화룡도> · <수궁가> 와 같은 판소리 다섯 마당이 있었다. 이외에도 <최병두타령>(1905)과 같이 대본을 새로 만들어 판소리 가락으로 얹어 부르는 창작(創作) 창극도 공연되었다.
창극 연주는 협률사가 해산된 이후에도 여러 민간단체에 의해 계속되는데, 1907년 김창환이 조직한 협률사, 송만갑이 조직한 협률사 등 두 협률사에 의해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910년대 중반에는 장안사 · 연흥사와 같은 극장과 광주에서 조직된 협률사에 의해 지속된다. 1920년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설립된 여러 창극단에 의해 공연되다, 1930년대에는 1933년에 발족된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의해서 수많은 명창들에 의해 공연되고, 1935년 서울에 건립된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춘향가>가 크게 성공한 이래 조선일보사가 창극 후원에 앞장서게 된다. 동양극장 이외에도 제일극장 · 서울극장 · 부민관 등에서 여러 창극이 공연되면서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방에서도 좀 더 큰 규모의 창극 공연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1930년대 말에는 화랑창극단 · 동일창극단 등에 의해 공연된다. 1940년대부터는 창극이 대중들의 인기를 얻는데, 해방 이후에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높은 인기를 얻어 서울을 기점으로 30개 도시의 극장 무대에서 창극공연이 이루어진다. 40년대 여러 창극단체에는 1946년 <대춘향전>으로 크게 성공한 대한국악원(1945년) 소속 창극부와 1947년에 김연수창극단 · 임방울(林芳蔚) 일행 국극사(國劇社) · 국극협회(國劇協會) 등에 의해 창극이 공연되어진다. 1948년에는 여류명창들로 구성된 여성국악동우회에 의해서도 공연되어진다.
1940년대의 여러 창극단의 공연은 창작 창극을 많이 선보이게 되는데, 김연수창극단의 <장화홍련전> · <선화공주> · <사육신> 등과 국극사의 <서동요>·<만리장성>, 동일창극단의 <일목장군>, 조선창극단의 <호동왕자>, 여성국악동우회의 <옥중화와 해님달님> 등이 그것이다. 1950년대 초기 들어서면 배역을 여성만으로 구성한 여성국극단이 성행하였고, 1950년 중반에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는 1961년 국립극장이 생기고 창극 <대춘향전>이 공연되어 성공하였고, 이어 국립극장 창극단이 창립되어 더욱 활발하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개발하며 오늘날까지 창극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07.협률사(協律司, 協律社)

고종 광무 6년(1902년) 8월에 고종 황제 등극 40주년 기념 축하공연을 위하여 대한제국이 조직한 최초의 서양식 관립극장. 3년 반 만인 1906년에 패관하고 1907년 고급관리들의 사교장 역할을 하였던 사설극장인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 로 이용되다, 1908년 민간극장 ‘원각사’란 이름으로 다시 개관.
협률사는 야주개(夜珠峴, 현 신문로 새문안교회 자리)에 벽돌조와 목조로 지어졌다. 구조는 지하와 지상 2층, 옥탑이 곁들여진 건물이고, 규모는 공간 수용 능력은 600~1000석 정도이다. 벽열등이 켜 있는 1층 무대 전면과 계단식 횡렬좌석·일반좌석·2층 특석의 3면관람석을 두고 있는데, 남녀 좌석을 구분하였다. 그 외 시설은 매표구·매점·끽다소(喫茶所) ·변소·신발장·소도구실·의상실 등을 갖추고 있다.
협률사는 궁내부 소관으로 칭경례식(稱慶禮式, 고종황제의 등극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축하의식)을 위하여 동서 각 조약국의 군주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그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건립된 신식 극장이다. 칭경례식 축하공연을 위하여 신문 광고를 내고 전국의 공연 예술인들을 초청하였다. 설립당시는 궁중의 여악(女樂)인 관기를 동원하였으나, 10일이 지나 민간의 기생(妓生)과 판소리 가객이나 성악인과 기악인 등의 민악인(民樂人)을 전국적으로 모집하여 연습시켜 특별공연을 준비하였다. 협률사에 모집된 판소리 남녀 창악(唱樂)인들은 270여명이었는데, 김창환(金昌煥) · 송만갑(宋萬甲) · 박기홍(朴基洪) · 정정열(鄭貞烈) · 이동백(李東白) 등이 중심이 되었고, 그 외에도 이화중선(李花中仙) · 김초향(金楚香) · 김추월(金秋月) · 신금홍(申錦紅) · 박녹주(朴綠珠) 등이 있었다.
칭경례식 행사가 콜레라의 유행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연기되면서. 협률사는 일반 오락 기관으로 기생 · 창우(唱優) · 무동(舞童) 등의 연예를 주로 상연하게 된다. 이들이 공연화한 것은 아악권이나 민악권 모두의 음악 예술로서, 궁정 춤인 정재(呈才)에 속하는 가인전목단(佳人剪牧壇) · 선유락(船遊樂) · 항장무(項莊舞) · 포구락(抛毬樂) · 무고(舞鼓) · 검무(劍舞) · 사자무(獅子舞) · 학무(鶴舞) 등과 정재반주음악이 있었고, 민악류의 땅재주와 판소리와 무동과 풍물 등 기악 공연들을 함께 무대화하였다. 이 가운데 협률사의 주요 레퍼토리는 판소리였고, 폐관까지 가장 인기 있는 장르였다.
협률사는 이후 광무 7년(1903)에도 또 영친왕(英親王)의 두후(痘候, 천연두)와 그 해 가을 흉년이 들고, 게다가 일본과 러시아의 풍운(風雲)이 험악해지면서 칭경례식 축하공연은 치루어지지 않고 주로 창극 공연장이 되다시피 하였는데, 주요 관람객은 주로 젊은이와 학생들이었다. 그러던 중 광무10년(1906년)에 봉상시(奉常司, 奉常寺) 부제조(副提調) 이필화(李苾和)의 건의에 의하여 칙령(勅令)으로 극장 운영이 폐쇄되었다가 1908년 이인직 등이 극장을 대여 받아 원각사라는 이름의 극장으로 운영된다.
궁정이나 지방 관아에서 특정 정치권이 아니고서는 접할 수 없었던 정재와 아악이 협률사를 통하여 일반인들에 공개되고, 이를 통하여 대중화될 수 있었던 점은 이전과는 다른 시대적 흐름의 결과이다.
특히 국가 공인 기관으로서의 협률사가 민악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민악을 공연한 점은 이전 성리학적 예악관이라는 정치적 이념에 따른 아악권 이외의 음악에 대해 속악이라 하여 속된 음악으로 홀대해 오던 것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에 의해 협률사를 포함하여 원각사, 광무대 등의 여성 음악 예술인들이 '기생 산업'의 계획 속에 대상화되기도 한다.

08.원각사(圓覺社)

1906년 패쇄된 협률사(1902년 설립된 단체) 자리에 세워진 사설극장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를 이인직(李人稙)이 인수하여 1908년(융희2) 7월에 설립한 민간 서구식 원형극장. 위치는 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이며, 주로 창극공연을 하였음.
원래 원각사는 고종 광무 6년(1902년)에 궁내부 소관으로 칭경례식(稱慶禮式, 고종황제의 등극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축하의식 )을 목적으로 건립된 협률사(協律社, 協律司)였으나, 콜레라가 퍼지는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행사가 연기되어. 일반 오락 기관으로 기생 · 창우(唱優) · 무동(舞童) 등의 연예를 주로 상연하게 된다. 그러다 광무10년(1906년)에 봉상시(奉常司, 奉常寺) 부제조(副提調) 이필화(李苾和)의 건의에 의하여 칙령(勅令)으로 극장 운영이 폐쇄되었던 것을 1908년 이인직 등이 극장을 대여 받아 원각사라는 이름의 극장으로 운영된 것이다.
원각사의 창립목적은 신역극 상연을 위한 경비조달로써, 이를 위하여 판소리를 무대화하여 창극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창극의 시초가 되었다.
각사는 1908년 개관 이후 가기(歌妓) 20명과 창부 김창환 등 40명이 전속해 있었다.
공연 종목에는 이인직의 <은세계>, <수궁가>와 같은 신연극을 비롯하여, 판소리 다섯마당을 소재로 한 구극(舊劇)과 정재 등이 있었다. 구극 공연형태는 춘향가(1903년) · 심청가(1904년) · 흥부가 · 화룡도 · 수궁가 같은 판소리 다섯 마당을 배역을 나누어 분창(分唱)을 하였고 무대장치를 갖추고 있어 창극형태의 시초가 되었다. 이러한 분창 형태의 판소리 공연은 이후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양극장과 같은 연극전용무대의 건립으로 점차 무대 미술가들의 배경 제작·설치와 더불어 대중적인 음악극 형태의 창극으로 발전된다. 한편 원각사는 기존의 판소리 다섯 마당 이외에도 최병두타령(1905)과 같은 창작창극도 공연하였다.
이인직에 의해 주도되었던 이러한 창극활동은 일제의 창극대본의 사전검열과 의도적인 일본 신파극 공연 권장 등과 같은 민족문화에 대한 탄압 등에 의하여 원각사가 창립된 1908년 7월 이후부터 1909년 11월까지 일 년 남짓 계속되다가 1912년 재정난으로 원각사는 폐지되고 그와 함께 공식적인 막을 내린다. 원각사에 소속된 창악인들은 이후 지방 협률사로 흩어져 지방 순회 공연을 하거나 연흥사·단성사·광무대 등의 사설극장 등에서 활동하게 된다.

09.이은돌

신호나팔로써 서양음악 제도와 문화를 한국에 소통시킨 최초의 양악인(洋樂人). 그의 이름은 이은석(李殷石) 또는 이은석(李銀石) 등의 여러 이름으로 잘못 불리기도 하였다.
1860년대의 실학파에 의한 개화운동(開化運動)과 1876년(고종13년) 한일조약(韓日條約)체결로 조선 정부의 군대 근대화 추진에 의해 최초의 현대식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1881년 음력 4월에 창설된다. 이에 이은돌은 개화당의 근대적인 군제(軍制) 개혁에 필요한 새로운 신호체제인 나팔을 도입하기 위해 1881년 11월 일본으로 유학 보내진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이은돌은 1882년 나팔수를 전문적으로 교육시킬 뿐만 아니라, 육군에서 유일하게 '교도단 군악 기본대(敎導團 軍樂 基本隊)'라는 군악대가 있는 교도단(敎導團)에 입학하여 전문적인 군악교육을 받았다. 이은돌은 육군 교도단 군악 교사로 1872년 9월부터 1883년 여름까지 지도한 프랑스인 찰스 다르롱(Charles Dagron)에게 프랑스식 나팔 교육과 군악 교육을 받게 된다. 찰스 다르롱 이외에도 교도단의 나팔교관으로부터 신호나팔에 대한 주법과 악보읽기·리듬치기·행진법 등과 서양음악의 여러 가지 이론적적인 것을 익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은돌은 7개월의 교육기간을 갖는 교도단 전 교과과정을 5개월 만에 이수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고 1882년 8월에 졸업한다. 졸업 당시 국내에서는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인해 별기군이 해체되고 조선의 군제가 다시 구제(舊制)로 복귀되어 있어서, 이은돌은 귀국을 미루고 대신 개화당 인사 즉 윤웅열(尹雄烈)·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 등을 만나며 도쿄에 머무르다 1882년 10월 22일에 조선의 개화운동을 위해 귀국한다.
이후 1883년 5월14일에 정부로부터 무관(武官) 자격을 받고, 신복모(申福模)와 함께 광주(廣州) 유수인 박영효를 찾아가 신식 군대 양성에 힘을 쏟는다.
특히 이은돌은 직접 나팔을 불거나 소수의 나팔수를 양성하는 등 나팔음악을 소통시켰다. 이러한 신식 훈련을 받은 광주부 남한 병대는 이후 어영청(御營廳)으로 옮겨져, 이들 중 500명은 전영(前營)에 나머지 일부는 우영(右營)에 재편성된다. 이은돌은 신복모와 함께 전영에서 훈령을 시켰는데, 전영의 교련 상태가 청국식 기예로 훈련된 좌·우영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고 한다.
이은돌에 의한 신식 군대 훈련과 나팔수 양성은 한국에 최초로 서양 음악 문화의 의미 체계를 도입·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 주목할 수 있다.

10.산조(散調)

한 사람의 독주자가 다양한 장단에 맞추어 여러 악장을 계속해서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기악 독주곡.
산조는 '허튼가락', '허드레가락'으로도 불리웠는데, 이는 본래 산조가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민간의 여러 음악, 즉 민요 판소리 시나위 등의 선율들을 새롭게 엮어 짠 음악이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기층민(基層民)에게 널리 향유되었던 산조는 판소리와 더불어 민속음악의 대표적인 음악양식이며, 오늘날 기악독주곡으로서는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음악이다. 산조는 무속음악에 뿌리를 둔 시나위나 민중예술로 등장한 판소리와 같은 기층음악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현재까지 논의된 바로는 산조의 어의가 우리말의 '허튼가락'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산조의 원형을 민간의 여러 가지 허튼가락, 또는 허드레가락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허튼가락은 민요 시나위 판소리가락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특히 판소리와 시나위의 허튼가락이 산조의 유래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허튼가락은 19세기 이후 음악적으로 체계화되어 하나의 독립된 기악독주곡으로 발전되었다.
최초의 산조는 19세기 말엽에 형성된 가야금 산조에서 출발하여 여러 유파(流派)를 형성시켰고, 가야금 이외에도 거문고·대금·해금·아쟁·피리 산조가 생기면서 모든 악기를 막라한 하나의 음악적 양식을 이룩하게 된다. 가야금 산조의 시조는 김창조(金昌祖)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시대에 전라도에서는 한숙구(韓淑九)와 박창옥(朴昌玉), 충청도에서는 이차수(李且守)와 심창래(沈昌來)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조를 어느 한 개인의 음악양식이 아니라 그 시대의 양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거문고 산조는 백낙준(白樂俊, 1884~1934)에 의해 창시되고, 백낙준의 문하에서 신쾌동(申快童, 1910~1978) · 김종기(金宗基) · 박석기(朴錫紀) 세 사람이 거문고산조를 전수하였고, 이들은 주로 일제시대에 활약하였다. 대금산조는 박종기(朴鍾基)에 의해서 창시되었고, 그의 산조는 한주환(韓周煥)을 거쳐서 한범수에게 전승되었다. 그 외에 경상도 지방의 강백천(姜白川)은 독특한 대금산조를 만들었고, 이충선(李忠善)과 김광식(金光植)도 가야금산조를 모방하여 새로운 대금산조를 만들었다. 해금산조는 지용구(池龍九)가 창시했다고 하며, 그의 산조는 지영희(池瑛熙)에게 전승되었다. 피리 산조의 창시자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충선과 최응래(崔應來) 등이 유명하였고, 이충선의 피리산조는 정재국(鄭在國)에게 전승되었다.
산조의 장단은 판소리 장단과 같은 진양·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휘모리 등이 있는데, 이는 장단명과 함께 악장의 명칭도 겸하고 있다. 산조의 기본장단은 진양·중모리·자진모리이며, 각 산조마다 중중모리·엇모리·굿거리·단모리·휘모리 등을 삽입하여 전체적으로는 느린 장단에서 점차 빠른 장단으로 계속 몰아가는 형식이다.
산조의 조는 계면조(界面調)·평조(平調)·우조(羽調)로 구성되며, 이는 판소리와 같다. 조에 따라서 음의 구성도 다르며, 이 때문에 가락에서 전달되는 느낌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조의 느낌은 꿋꿋한 힘이 솟는 가락, 평조는 화평하고 평안한 흥이 배인 가락, 계면조는 애절한 한(恨)이 담긴 가락이다. 산조는 이 중에서도 계면조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남도음악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가야금 산조에는 위의 세 가지 조 이외에도 설렁제(덜렁제)·석화제·경드름(경조)·강산제 등이 있으며, 이것의 음악적 특징은 판소리와 같거나 전용되어 사용된다.

11.삼현육각

(1) 향피리 2·대금 1·향피리 2·대금 1·해금 1·장구1·북1 이상 6가지 악기로 편성되는 우리나라 악기 편성법의 한가지. 일명 육잡이·육잽이라고도 하며, 주로 무용 반주음악을 위해서 쓰였다.
삼현육각은 무용 외에 민속극(인형극 가면극 탈춤)·굿·행악(行樂) 등에서도 쓰였는데, 이러한 음악에서는 6개의 악기 편성 형태가 가감(加減)되기도 한다.
삼현육각의 기본 악기 편성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 무동 」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의 「쌍검대무」 기산(箕山) 김준근의 「광대줄타고 」 등의 풍속도(風俗圖)와 여러 감로탱의 신청예인 집단의 굿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현육각의 편성으로 연주되는 악곡으로는 관악영산회상(管樂靈山會相)·염불·타령·굿거리 같은 무용곡과, 길군악·길타령·길염불 같은 행악곡이 있다. 이외 무당의 굿에서도 무당 춤과 무가(巫歌)의 반주에 쓰였고, 「양주별산대놀이」·「봉산탈춤」·「은율탈춤」 등에서도 반주용으로 사용되었다.

(2) 삼현육각 편성에 의한 음악. 넓은 의미로는 옛날 연회 때 연주하던 음악인 거상악(擧床樂)과 무용 반주음악, 행진음악 모두를 포함하며, 좁은 의미로 자진한잎과 대풍류와 같은 거상악을 이른다.
삼현육각은 관아(官衙)나 사가(私家)의 연향, 지방 향교의 제향, 굿의식, 가무(歌舞)의 반주, 귀인의 행차 등에 널리 쓰였으나, 지금은 삼현육각이 주로 무용 반주로 쓰인다.
거상악의 자진한잎은 삼현육각으로 연주하는 가곡(歌曲)을 가리키며, 대풍류는 삼현육각으로 연주하는 영산회상을 가리키는데 삼현풍류라고도 한다.
행진음악으로 사용되는 삼현육각에는 취타·길군악·길타령·별우조타령·별곡(군악) 등이 있다.
무용반주음악으로 쓰이는 삼현육각에는 상령산·세령산·삼현도드리·염불·타령·긴염불 반염불·허튼타령·굿거리·당악 등이 있다.

12.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판소리·산조·잡가 등의 남도음악에 관한 연구·공연 및 후진양성을 위해 1934년 5월 11일에 조직된 남도전문음악단체.
조선성악연구회는 원래 전라도 순천(順天)의 유지 김종익(金鍾翼)이 서울 익선동에 장소를 후원하여 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한성준(韓成俊)·정정렬(丁貞烈)·오태석(吳太石)·심상건(沈相健)·김종기(金宗基)·김초향·박록주(朴綠珠)·김채련(金彩蓮) 등이 조선성악원(朝鮮聲樂院)으로 설립되었던 것으로, 새롭게 그 운영방식과 사업방향 등을 정하여 조선성악연구회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여 정식으로 창립된다.
조선성악연구회는송만갑(宋萬甲)·김용승(金容承)·김동강(金東岡)·강태홍(姜太弘)·이동백·김창룡·정정렬·한성준·오태석·김종기·박록주·김채련·심상건 등 13명이 발기 하였고, 회원 38명으로 시작하였으며, 이사제로 운영되었다. 조직으로는 성악연구부·기악연구부·교습부·흥행부·외교부 등이 있었다. 초대 임원들을 열거하면, 이사장에 이동백, 상무이사에 정정렬, 회계에 한성준, 그리고 서무에 김용승이었다.
조선성악연구회는 남도음악의 학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후진 양성을 하게 되는데, 이로써 1930년까지 서울의 권번에서 남도음악이 공식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던 당시 서울에 남도음악교습을 위한 공식적인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어 남도음악의 서울 정착이 이루어지게 된다. 학생의 교습에는 이동백·송만갑·정정렬 등의 원로명창들이 맡았다.
조선성악연구회는 회원이 늘어, 1936년에 회원 수 300여명을 넘게 되며, 다양한 인사들로 구성된 후원회까지 결성된다. 그리하여 1936년에는 창극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선성악연구회 회원으로 구성된 전속 국악단 창극좌(唱劇座)를 조직하게 된다. 창극좌에 의해 일제시대 창극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이전의 협률사(1902)에서 시작된 초기 창극형태는 원각사(1908) 시대에 이어 일제시대 창극 공연의 줄기를 잇게 되고, 이후로는 국립창극단까지 창극운동의 명맥을 잇게 된다.
이 집단의 구성은 20세기 초 상경하여 활동한 이동백·김창룡·한성준·송만갑과 같은 원로 명창들과 1930년대 이후 상경한 정정렬·정남희·조상선·오태석·박록주·김소희·임소향 등과 같은 소리명창들로 이루어져, 원로 명창와 신진 명창들이 함께 활동하였던 것이다.
새롭게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의 회원이 된 신진 명창들은 서울에 남도음악의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된다. 특히 정정렬은 창극활동을 주도하여 창극 재기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서울에 서편제 소리를 확산시킨다. 이외 병창(幷唱)의 정남희·오태석도 남도 출신으로서 서울에서 성공하여 남도 소리의 확산에 그 힘을 더하게 된다. 또한 성악 이외에 기악 부분에서도 정남희·김종기·강태홍·신쾌동·박종기 등이 활동하여 남도 기악음악도 서울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한편 조선성악연구회는 설립초기부터 여성명창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이후 이들의 활동 폭이 더욱 넓어 졌으며, 1936년 3차 정기총회 이후부터는 여성이사가 다수 선출되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1930년대 이후 상경한 여성 소리꾼은 지방에서 음악성이 뛰어난 기생들이었던 것이다.

13.기생조합(妓生組合) / 권번(券番)

일제에 의해 매춘녀인 창기(娼妓)와 창녀(娼女)의 사회적 공식화(1904년 10월 10일) 및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여악의 폐지(1905년), 관기(官妓)의 폐지(1908년 7월), 기생 및 창기 단속령(1908년 9월 15일)과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1909년 4월) 등에 의해 일관되게 한국에 적용한 일제의 한국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말하는 것으로,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 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3~1914년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불렀다.
일제의 공창화 정책에 의한 최초의 기생조합은 ‘경성유녀조합’(1908년 6월)이다. 이 조합은 경시청에 의해 당시 시곡동(詩谷洞, 현재의 을지로 2·3가에 해당)의 김명완(金明完)을 중심으로 최명석·홍흥석·김중엽 등 47명으로 하여금 ‘경성유녀조합 설립청원서’를 경시총감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 에게 청원토록 조정하여 허가를 내 준 것이다. 일제의 경성유녀조합 제도 개편에 대한 명분은 “시곡 하교(詩谷河橋)를 중심으로 삼배(三配)·갈보(蝎甫) ·주막 부녀 등 매춘부들의 건강진단을 위한 조합 설립으로 유독(有毒)을 치료하여 공중 위생을 확립하고 풍기문란을 바로 잡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식 공창 제도의 조선 이식으로 조선에 진주한 일본 군대와 일본 거류인들의 ‘성욕 배설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일제 경시청은 기생들을 시곡동(또는 詩洞이나 시궁골)에 상화가(賞花家)나 상화실(賞花室) 이란 이름으로 집단 거주케 하여 직접적으로 통제 관리하면서 공개적으로 ‘유곽화(遊廓化)’시킨다.
이후 경시청은 1909년 4월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을 정하여 시행하면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은 경시청의 단속령에 따라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에 조직되었다. 이에 1909년 8월 20일 경시청 관내에 있는 경성(京城) 창기 303인과 용산의 17인을 묶어 한성창기조합이 탄생되는데, 이들은 경시청이 지정하는 남부 훈도방(熏陶坊) 시곡 41통 1호에 있는 창기건강진단소에서 집회를 갖고 창립 총회를 갖고 그 활동을 시작한다. 한성창기조합은 자체의 음악과 무용을 곁들인 활동을 하면서 1900년대 신설한 각종 극장과 연관하여 공연 활동이 잦아지자 이들의 기예 요구에 부합하기 위하여 1909년 12월에 발기한 ‘조양구락부(1911년 조선정악전습소로 발전)’와 연계하여 교육 체제를 갖추게 되는데, 경시청의 명령으로 금지된다.
이후 기생 단속령은 1910년 8월 13일 통감부 경무총감부령으로 확대되어 전국에 적용·조치가 단행되어, 1910년대 이후부터는 삼패(매음하는 유녀(遊女))는 물론이고 퇴역관기 츨신 및 지방 기생까지 기생조합으로 통제되기에 이른다. 1910년대 초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여러 기생조합이 생기고 없어지는데, 1913년에는 조선정악전습소(1911년)의 분교실로 운영된 기생조합인 ‘다동조합(茶洞組合, 1917년 전후 대정권번으로 이름이 바뀜)’이나 광교 조합(이후 한성권번으로 바뀜), 등으로 1914년 전후에는 신창조합(新彰組合, 1917년 이후 경화권번으로 바뀜)과 창기조합(娼妓組合) 분화·발전된다. 일제 총독부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면서 기생조합의 명칭이 일본식 교방의 이름인 권번(券番)으로 바뀌게 된다. 1917년에는 광교조합이 한성(漢城)권번으로 바뀌고, 1917년 전후로 다동조합은 대정권번으로 바뀐다. 또 1917년에는 경상도 기생을 중심으로 전라도 기생까지 포괄한 한남(漢南)권번도 창립된다. 1923년에는 대정권번이 조선권번으로 바뀌어 창립되면서 본격적인 ‘권번(券番)’ 시대를 맞게 된다. 이후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소위 4대 권번 즉 한성·한남·대정·조선권번 등으로 기생조직이 안정화 된다. 1935년에는 서울 낙원동에 종로(鐘路)권번이 생긴다. 또한 일제시대 지방의 권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권번으로는 평양의 기성(箕城)권번이 있었는데, 뛰어난 일패기생들을 길러내던 곳이었다. 1940년 일제 말기에는 한성권번·조선권번·종로권번이 삼화(三和)권번으로 통합되었다가 해방을 맞게 된다.
한편 서울에서 기생양성소가 제도적으로 공식화 된 것은 1914년 이후였는데, 서울기생양성소의 공식 프로그램은 전통적인 서울중심의 음악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하였지만, 공연계에서 서도소리가 흥행하자 서도음악이 페러토리에 추가 된다. 이외에 일본 악기인 샤미센도 사용하면서 기생의 레퍼토리는 점차 확장된다.
기생조합과 음악계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실제로 기생조합에서 하규일·장계춘(張桂春) ·안춘민(安春民) 등과 같은 풍류계 음악가들이 공식적인 교사로 활동한 점과 서도창부 역시 일시적으로 교습에 참여한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기생학교는 공식적으로 창부들의 활동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1921년(대정 10년)의 ‘기성권번(箕城卷番) 학예부 규칙의 교과과정 가운데 음악과 관련된 교과목에 성악으로 시조·가곡과 무용으로 검무·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와 기악으로 거문고·가야금·양금 등이 포함되어 있고, 조선정악전습소 분교실에서도 기생들에게 시조, 잡가, 법무, 승무, 거문고, 가야금, 양금, 생황, 단소, 내디춤, 샤미센 등의 학습이 과정에 있었던 점을 보아 근대 기생조합이 전통음악의 전승에 일부 역할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기생들은 방송국 활동이나 유성기음반의 취입 등으로 방송과 음반을 통한 전통음악의 확산에도 큰 역할을 미치게 되는데, 가사, 가야금병창, 경기고잡가, 경기잡가, 남도잡가, 단가, 사설시조, 서도잡가, 경기유행가, 신단가, 신민요, 유행소곡, 유행잡가, 판소리 등의 성악곡과 가야금병창, 가야금 산조 등의 기악곡 연주 등이 음반에 취입되었고, 방송으로는 가사·가곡·경기소리·남도소리·서도소리·판소리·가야금산조와 병창 등의 다양한 곡들이 사용되었다.
한편 기생의 연주 레퍼토리는 원래 서울 중심의 것들이 사용되었으나 남도나 타 지방의 기생출신들이 서울 권번에 입적하면서 서울음악계에 자신들의 출신 음악을 추가 하면서 서울음악계에 지방 음악의 확대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기생조합은 그 학습을 위하여 기생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창부를 선생으로 초대하고, 기생조합 주변에 기생을 위한 사설학습장이 형성됨으로써, 창부들의 참여의 기회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조합출신 기생들의 음반 취입과 방송 활동 등의 개인음악활동의 확장으로 인하여 여창가곡·시조·민요·잡가 등의 전통음악의 전승과 대중음악의 저변확대라는 점에서 근대 음악계의 성장에 직·간접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14.신청(재인청)

무속(巫俗) 음악인인 당골 악인(樂人)들의 조직체나 그 공동체를 대표하는 청사(廳舍)를 말함.
무인들의 조직체 본부였던 신청은 각 도시나 마을의 당골 사회에 대하여 감독과 제반 사무를 관장하였는데, 그 지역과 기능 그리고 국가기관이 관계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함경도는 스승청, 노량진은 풍류방, 경기도는 재인청(才人廳), 전라도는 신청, 제주도는 슨방청이나 심방청이라 불렸다. 그 외에 화랑청, 장악청(掌樂廳)·악공청(樂工廳)·공인청(工人廳)·공인방(工人房) 이라고도 불렀으며, 때로는 섞어 말하기도 하였다.
신청은 무인들 조직체를 관장하며 계통을 이어가는 역할과 노래·춤·곡예·미술·기악 독주와 합주 판을 펼치는 악회의 판벌림 그리고 굿 수행의 이론과 실제 교육, (음)악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조직체의 대표기관이었다.
신청 악인들의 역할은 조선시대의 가장 낮은 사회적 신분에 속해 있으면서, 기층민중들에겐 무속의식에서 인간조건의 해방이라고 하는 자아초월의 체험으로 이끌어간 주체로서 선생 역할과 마을 공동체는 물론 국가 기관의 믿음 치례와 여러 행사 치례를 (음)악으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민악(民樂)계와 아악(雅樂)계를 중개하며 모든 계층의 음악감수성을 민악화(民樂化)하여 우리 나라 전음악사를 민족음악 역사로 이끌어 온 민중음악계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집단이다.
신청의 조직은 주로 무당(남자의 경우는 박수라 일컫고, 무당과 박수를 통틀어 무격(巫覡)이라 함)과 무당의 남편인 무부(巫夫), 그리고 그 가족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집단적인 공동 사회를 형성하고 있어서 ‘당골네’라고도 불린다. ‘당골네’의 당골이라는 명칭은 일반인이 어떤 특정 무인(巫人)에게 믿음 치례를 자주 부탁하면서 그 무인을 당골 무당, 그 집을 당골집이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당골네’라는 명칭은 줄여서 당골(堂骨) · 단골(檀骨)·감골(甘骨) · 단골(斷骨) 등으로 부른다.
무부는 그 역할에 따란 다른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소리꾼은 광대(廣大), 악기 잽이(연주자)는 악인(樂人)이나 공인(工人)·고인 또는 악공(樂工)이라 하였고, 줄타기나 땅재주 등 연희판에서 연행을 주도하는 사람은 재인(才人), 풍물패가 되어 결립을 하는 경우는 신청 걸립패 혹은 재인 걸립패라 하였다. 무부들이 연주한 장르는 이와같이 악기연주 뿐 만이 아니라 연희에서 사용된 줄타기나 땅재주 등의 재주나 풍물에 이르기 까지 종합예술의 형태를 띄었다. 무당 또한 노래와 춤과 악기를 통합적으로 다룬다. 즉 신청 집단이 연행한 장르는 성악과 기악 음악의 전분야와 춤·재주·연극·종교성의 종합적 기술로 종합예술이었다.
신청의 조직은 8도의 행정조직에 따라 도 →주(州)·부(府)·군(郡)·현(縣)→면(面)→리(里)에 걸쳐 전국적인 규모의 강력한 조직 체계를 완비하고 있었고, 그 조직원은 경기도의 경우 4만 여명에 이르렀으며, 마을마다 20~30여 호 등으로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신청은 조선 최대·최고의 음악 예술 공급처의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들의 음·악 예술은 관(官)·군(軍)·민(民) 사회 조직 모두의 필요에 의해 공급되었는데, 이로 인해 신청 출신의 음악인들은 아악류와 민악류에 걸친 2중 음악성을 갖추게 된다. 관의 경우 무녀(巫女)는 궁정이나 관청의 여악(女樂)이나 간호일을 맡은 의녀(醫女)와 의복 장식 일을 맡는 침선비(針線婢), 때로는 군대에 징발되었고, 무부는 궁중의 장악원과 행정기관인 각 지방의 관아와 나례청의 악공들로 소속되어 각종 행사를 치렀다. 군의 경우도 중앙과 지방의 각 병영의 조라치와 태평소에 의한 취타수와 삼현육각 편성을 골격으로 한 세악수들을 이들 신청 출신에서해결하였다. 민의 경우도 민중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일·놀이·믿음 치례에 이들 신청 음악인들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참여한 구체적인 행사의 예를 들면 음력 섣달 그믐 밤에 궁중이나 민가에서 치렀던 마귀와 사신(邪神)을 쫓는 의식이나, 중국의 칙사들을 위한하기 위해 베푼 공연들, 왕의 행차나 신임 감사의 영접 행사와 공연들 곧 나례에도 동원되었다. 나례의 경우 처용무 춤에 악공과 기녀가 사용되고, 곡예나 희학지사(戱學之事)에는 재인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민간 소속의 예인집단(예인집단 항목 참조)의 주요 구성원으로서도 활동한다. 또한 근대 20세기 초반기에는 협률사·광무대·연흥사·단성사·장안사 등 근대적인 종합예술단을 구성하여 한국음악의 서양무대 공연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15.예인집단

예인집단이란 기층 민중 출신의 예술인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노래, 악기 연주, 춤, 인형극, 곡예(줄타기, 접시돌리기, 땅재주, 장대타기 등)와 재담 등의 예술장르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전문종합예술단체의 성격을 띄었다.
이들은 경제적인 생활 근거지로 분류하면 '떠돌이 예인집단'과 '붙박이 예인집단'으로 구분되며, 예인집단의 구성원과 장르로 분류하면, 사당패, 걸립패, 솟대쟁이패, 광대패, 남사당패, 대광대패, 풍각장이패, 초라니패, 중매구패, 얘기장수 등으로 구분된다.
예인집단이 직업적으로 형성된 것은 조선후기 인데, 사회적 신분은 천민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도시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19세기에는 독자적인 전문 예인집단으로 발전하면서 점차 지위가 향상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으로 민족 사회가 굴절되자 1930년대에는 대체로 전승의 맥이 끊기고 해체되어 갔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예인집단의 놀이는 근대 새롭게 등장한 사설극장이나 지방을 근거지로하여 연행활동을 지속한다.
남사당패의 놀이 가운데 발탈(족탈)의 경우는 1900년대 직전에 박춘재(朴春載)에게 독자적으로 이어져 1907년부터는 광무대를 중심으로 공연되다가 이동안에게 전수된다.
그리고 남사당패나 솟대패의 줄타기 종목은 1900년대 직전에 김관보와 이봉운으로 이어지다가 임상문과 이동안으로 전승되어 역시 광무대의 주요 공연 종목으로 연행된다.
1920년대까지 남사당패는 30명 정도의 규모로 바닥에 자리를 깔아 놓아 만든 가설공연장에서 때 묻은 공연복을 입고 ‘상두놀이’를 비롯한 가무(歌舞)를 했는데, 관람객은 땅바닥에 앉아 관람하였다. 관람객은 주로 아이들과 노동자 그리고 약간의 여자들이었지만, 만원사례를 이룰 만큼 대 성황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20세기에도 19세기와 마찬가지로 광장이나 가설무대 등에서 활동하면서 옥내극장으로 적극 진출하지 못해 도태된다.
중들로 구성되어 차림새를 변장하고 법고와 징을 치며 고사를 비는 굿중패는 각 촌마을의 집을 돌며 고사반(집주인이 내놓는 선반으로, 상쇠가 고사와 범패로 복을 빌어주는 것에 댓가로 재물을 헌납하는 고사의식)에 만족하지 않고, 공연 종목을 늘려가다 20세기 전후로는 또 다른 남사당패처럼 발전하여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장대타기와 탈놀음이 주 종목이었던 대광대패도 강의 하역장으로 객주집과 거상들이 상주한 밤마리 지역을 중심으로 1930년대까지 연희를 펼쳤다.
신청 출신의 무부(巫夫)들이 떠돌이 예인집단으로 전환한 광대패도 1890년대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의 그림에서 줄타기나 칼춤 공연 장면으로 그들의 성행을 짐작할 수 있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판굿 전문 연행패로 조직된 걸립패도 남사당패와 같은 종목으로 발전하여 ‘영남걸궁패’의 경우는 1930년대 이후까지 그 명맥을 유지한다. 솟대처럼 굵고 긴 장대를 세우고 쌍줄을 양쪽에 매달아 놓고 매단 줄 위에서 여러 가지 놀이를 하였던 솟대쟁이패 또한 1918년 경 이후까지 경상도 진양에서 이우문 솟대쟁이패가 활동하였다.
사당패는 20세기 초까지 연행활동을 하였는데, 19세기 전라도 지방에 있던 근거지로는 창평(昌平)·담양(潭陽)·옥천·정읍(井邑)·동막·함평(咸平) 등이 있었고, 경강(京江)이나 장시(場市) 줍ㄴ에도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걸립패와 남사당패가 1930년대에 합류되자 이후 이들의 종목은 남사당패에 흡수되고 사당패는 없어지게 된다.
한편 사당패 가운데 19세기에 들어와 서울 같은 상업 도시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예인집단인 붙밭이 예인집단의 하나인 선소리패는 20세기 초까지에는 뚝섬패, 과천패(과천 방아다리패), 호조(戶曹)다리패(진고개월선이패), 청패(靑牌), 쇠봉구패, 한강패, 서빙고패, 왕십리패, 용산 삼개[마포(麻浦)]패, 동막패(東幕牌), 자문밖패, 성북동패, 배오개 마전다리패, 무아간패, 애오개패 등이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이 가운데 뚝섬패(또는 뚝섬 산타령패)와 과천패가 유명하였다. 그 외 평양의 선소리패도 1907년 원각사와 같은 정식 극장무대가 출현하면서 평양 출신 사당패 계승자인 선소리패 ‘날탕패’가 성공을 거두어, 서도 산타령과 서도잡가 등을 서울에 확산시키게 된다. 1915년 이후에는 기생조합에서도 평양 날탕들의 기생교습이 이루어질 정도로 날탕들은 1920년까지 큰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 예로 시동 예기(藝妓)와 하교의 예기들과 관계하여 한성창기조합의 주된 공연 종목으로 잡가를 불렀다. 잡가는 선소리패에 의해 20세기 벽두에 당대의 모든 성악곡을 지칭하는 용어와 내용으로 근대성악곡으로 발전된다.
선소리패 외에 평양의 날탕패와 서울의 사계축과 그 밖의 경상도 지역의 각 지역 탈춤패가 붙박이예인집단으로 활동하였다.
서울의 사계축은 계승자들은 서울잡가뿐만이 아니라, 가곡과 가사 시조 등도 담당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장계춘(張桂春)은 사계축의 대가 추교신의 제자로 가곡·가사에 능하여, 권번의 취체로 활동하면서 제자를 양성한다. 또한 우조시조를 만든 최상욱(崔相旭)도 가곡·가사·시조에 능하여 무대에는 서지 않고 교습활동을 주로 하였다. 그 외에 사계축 출신 창부들은 서울잡가 외에도 서도소리나 산타령·서울무속계음악과·남도소리 등도 그들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사계축 출신이 원래 사당패의 레퍼토리인 산타령을 한 것은 사당패의 해체로 그 음악을 가져다 부른 것이다. 사계축 집단은 1920년대까지 주요 레퍼토리에 따라 다른 활동을 하면서 사계축집단이 몰락하게 되는데, 일부는 일반 음악계에서 연주활동을 , 또 다른 일부는 음악교육계에서 교습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인집단의 근대 활동은 새로운 서구식 극장의 출현으로 극장 무대화되기도 하는데, 1902년 협률사의 공연에서도 땅재주와 무동놀이, 풍물, 평양날탕패의 탈놀이 등이 사용되고, 1935년에는 줄타기 명인 임상문의 부친인 임종원에 의해 조직된 대동창극단의 공연에서도 줄타기 등이 공연되었다. 1907년부터 광무대에서도 솟대장이·죽방울놀이·쌍줄타기·발탈놀이 같은 각종 연희종목이 공연되었다. 단성사(1907)에서도 무동놀이와 날탕패의 탈놀이가 공연되고, 연흥사(1908)에서도 무동놀이가 공연된다.
그러나 예인집단의 20세기 초의 전반적인 활동은 평양 날탕패의 극장 무대 진출의 일부 성공이 있기는 하나, 이것도 극장 무대로의 개별적인 활동에 그치었고, 예인 집단별로 적극적인 무대공연화를 꾀하지 못하면서 점차 도태되어 집단의 해체와 더불어 음악계에서 그 명맥을 잇지 못하게 된다.

16.근대 국악음반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 최초의 상업용 유성기 음반이 만들어지면서 제작 · 발매된 국악음반. 전통음악과 유행가, 신민요 등의 대중화와 음악수용층의 확대, 기생 음악활동의 폭 확대와 기생들의 독립 음악가로의 성장 등의 전통음악계에 일련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당시의 국악음반은 외국(미국, 일본)자본에 의한 상업용으로 제작되면서, 대중들의 기호에 맞춘 상업성이 있는 레퍼토리로 주로 이루어졌다. 음반녹음의 주된 활동자로 통속음악의 주요 담당자였던 기생들과 창부들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면서 유능한 기생들이 발굴되기도 한다. 기생들이 주요 녹음자가 될 수 있었던 점은 당시 기생들이 권번(券番)을 통해 조직화되어있어 인력 공급이 원활했기 때문이며, 또한 기생들이 당시 구매자의 기호에 맞는 잡가를 전문적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1907년 이후 전기녹음(1928년)이전까지 음반회사에는 최초 미국 콜럼비아(Columbia)사·미국 빅타(Victor), 뒤이어 1907년 설립된 일미축음기제조회사가 사세를 확장하여 1910년 10월에 재출범한 일본의 일본축음기상회(日本蓄音機商會)·일동축음기주식회사(日東蓄音機株式會社)·합동축음기주식회사(合東蓄音機株式會社) 등 다섯 개의 외국 음반사가 음반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일본축음기상회는 한일합방 직후 한반도에 진출하여 1911년 9월 17일 경성(京城)에 개점하여 이후 전통음악을 취입한 많은 음반 발매를 시작한다. 이 회사는 1928년 일본 콜럼비아로 개칭되기 이전까지 18년 동안 전통음악 및 대중음악과 관련된 많은 유성기 음반을 제작 · 판매했다.
1928년 전기녹음이 시작된 후에는 미국 콜럼비아사로부터 도입한 전기녹음기술을 바탕으로 설립된 일본 콜럼비아사·일본의 제국축음기회사에서 세운 오케(Okeh)축음기상회·일본 동경에 설립된 폴리돌(Polydor)축음기상회·太平(Taihei)·미국의 빅타사가 1927년 일본에 현지법인으로 설립한 빅타사 등이 있었다.
일본 콜럼비아사는 1929년부터 한국음악 음반을 제작 · 발매하기 시작하는데, 해방이전까지 1,500여종의 음반이 제작· 발매되었다. 일본 빅타사는 1928년 6월 기술진을 서울로 파견하여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를 위시한 한국음악의 녹음을 시작으로 그 후 800여종의 음반을 제작 · 판매했다. 폴리돌축음기사회도 1932년부터 한국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하여 650여종의 음반을 발매했다. 오케축음기상회도 1933년부터 한국음악을 담은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하여 총 1,300여종 음반을 제작·발매했다. 이외에도 20여개의 레코드회사가 더 있어 한국대중음악을 전파하였다.
음반에 녹음된 성악곡 레퍼토리로는 가곡·가사·시조·서울잡가·서도잡가·남도잡가·신식잡가·판소리·병창·산타령·일본가요 등이 있다. 기악곡으로는 가야금(가야금 병주, 가야금병창, 가야금산조 포함)·양금·장구 등이 있다. 1910년대까지 음반에 녹음된 기생의 레퍼토리는 서울과 서도소리가 중심이었고, 1920년대 초부터는 남도 잡가가 녹음된다. 1930년대에는 신민요와 유행가가 주를 이루게 되고, 창극의 취입이 증가하면서 창극조(唱劇調)의 성악도 두각을 띠게 된다. 그 외 이러한 국악음반의 레퍼토리 구성은 서울의 전통음악계에 서도소리와 남도소리가 추가되면서 서울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이 전 지역의 음악권에서 흡수된다. 그러나 외국자본에 의한 국악음반의 발매는 전통음악계가 음반산업의 대상화가 되면서 상업적 성공을 위한 편중된 레퍼토리로 치우쳐지는 경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음반녹음에 참여한 대표적인 국악인은 다음과 같다. 1910년대까지 음반회사별로 보면 콜럼비아의 경우는 한인오와 관기 최홍매 외 3명의 가사·시조·서울잡가 등이 있고, 빅타의 경우는 김창환·이동백·김봉이의 판소리, 박팔괘의 가야금 병창 그리고 대구 기생의 <륙자백이> 등이 있다. 1920년대부터 전기녹음 이전까지에는 일본축음기상회의 김연연·박채선·신옥란·신옥연·신옥진·강소춘·권금주·길진홍·김계월·김추월·이난향·신금홍·심매향·조모란·김연옥 등의 여성음악인과 김창기·김창룡·김택준·김계선·김창근·박춘재·심정순·심상건·송만갑·이동백·이홍원·한성준·홍재유·지용구 등의 남성음악인 등이 있다..이후 1930년대에는 콜럼비아사의 고일심·김명숙·김소향·문명옥·박녹주·박산월·배설향·손진홍·신해중월·이화중선·왕수복·이옥란·한농선·함동정월, 오케사의 김소희·김초향·김추월·박녹주·신금홍·신해중월·이금옥·이은파·이화자·이화중선·장채선·조금옥·홍소월 등이 있다. 폴리돌사의 곽산월·김성파·김소운·김옥엽·박녹주·왕수복·이영산홍·표연월 등이 있고, 太平사의 김남주·김옥엽·김추월·이소향·이영산홍·이은파·이진봉·주란향 등이 있다. 빅타사의 고연옥·김란홍·김복희·김소향·김소희·김여란·김해선·박녹주·손금홍·손진홍·이금옥·이진홍·이화중선·장학선·조금옥·하농주 등이 있다.

17.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호출부호 JODK, 출력 1KW, 주파수 690KHz로 일본인에 의해 서울 정동(貞洞)에 1926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
비영리적인 사업을 전개하는 것을 설립 취지로 하여 방송 편성에 있어서 보도 · 교양 · 오락을 고르게 배치한다는 세부 규칙을 두었다.
처음에는 우리말과 일본어 방송시간 비율이 1:3이었으나, 그 해 7월에 2:3의 비율로 바꾸어 교대로 방송했다. 방송은 주로 일본어 방송인 경제시황보도와 우리 말 방송의 물가시세· 일기예보 · 공지사항 등이었다. 그러다가 일본 동경방송국과 중계방송망을 구축하여, 1929년 9월부터는 일본방송을 그대로 중계하고, 우리나라의 국악과 기상통보 및 물가시세만 추가 편성했다. 그나마 1930년 말까지는 전일방송이 아닌 오전에 몇 시간을 방송하고, 저녁에 다시 방송을 하였는데, 모두 생방송으로 이루어졌다. 6여년에 걸친 일본방송의 단일방송은 청취자들의 불만을 초래하게 되고, 수신기보급의 부진과 경영난을 초래하게 된다. 그 당시는 고가(高價)의 라디오 수신기를 소유한 사람이 드물어 방송이 일반화 되지 못했다. 당시 일본인과 한국인 중 부유층만이 라디오 수신기를 통한 방송을 청취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단일방송과 관련된 청취자 불만과 경영난을 해소하고자 독립적으로 계획된 우리말 방송 즉 이중방송을 추진한다. 이리하여 1933년 우리말로 방송하게 된다.
이어 1935년 7월에는 경성방송국을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1 · 2차 방송망 확충계획을 수립하고, 그 해 9월의 부산방송국의 개국에 이어 평양 · 청진 · 이리(지금의 익산) · 함흥 · 대구 · 광주 · 대전 · 원산 · 해주 · 신의주 · 목포 · 마산 · 춘천 · 성진 · 강릉 · 청주에 지방방송국을 1945년까지 10여년에 걸쳐 개국시켰다. 경성방송국은 개국 초기 대중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으나, 이후 지방방송국과 라디오 보급의 확대로 많은 청취자를 확보하게 된다.
전통음악 예술인들에게 경성방송국의 설립은 유성기음반 취입의 활동과 더불어 방송국 활동으로 인하여 1930년대 이전보다 더욱 활발한 음악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국악방송은 특히 1933년에 이중방송(二重放送)이 실시되어 음악연예 방송시간이 하루 30분에서 2시간으로 확장되어 ‘각곡의 밤’·‘명창의 밤’·‘구조경기가요(舊調京畿歌謠)의 밤’등의 국악대형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경성방송국 국악방송곡 목록에 나타난 음악 갈래에는 가곡 · 가사 · 시조 · 가야금병창 · 경기가요 · 남도가요 · 남도단가 · 남도속요 · 남도잡가 · 남도합창 · 남창지름시조 · 단가 · 민요 · 서도가요 · 서도단가 · 서도민요 · 서도소리 · 서도속요 · 서도입창 · 서도잡가 · 서도좌창 · 속요 · 잡가 · 재담 · 창극조 등으로 남도와 서도의 성악곡이 주를 이룬다.
경성방송국에서 활동한 명인들 가운데에는 기생들이 많았다. 여창가곡(女唱歌曲)에는 조선권번의 김수정(金水正) · 서산호주(徐珊瑚珠) · 이난향(李蘭香) · 안학선(安鶴仙) · 김초홍(金蕉紅) 등의 기생들이 활동하였으며, 남·여창 가곡에는 하규일과 김수정 · 서산호주 · 안학선 등이 있다. 가사(歌詞)에는 한성권번의 기생들이 주로 방송했는데, 최정희(崔貞嬉)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기생은 경기소리 · 남도소리 · 서도소리 · 판소리 · 가야금산조와 병창 등의 갈래에서 다양한 방송활동을 전개한다.
경성방송국은 다양한 전통음악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전통음악 이외에도 신민요와 유행가 등의 대중음악 활성화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경성방송국은 태평양 전쟁(1941년 12월) 전 후에는 일본군가와 나니와부시 등을 주로 방송하였고, 아주 드물게 서양 고전음악을 방송하였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인수하게 되어 하루 종일 재즈 음악이 주를 이루면서 국악방송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18.판소리

한 명의 소리꾼이 한 명의 고수(鼓手)의 북 장단 반주에 맞추어 서사적인 긴 이야기를 소리[唱, 노래]와 아니리[白, 말]와 발림[科, 몸짓]으로 엮어나가는 극적음악. 조선 중기 이후에 정착된 우리나라 고유의 독창적인 극(劇) 음악이다. 판소리란 말은 ‘짜여진 한 판의 노래’와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이어서 부를 때 판소리라고 했고, 일부분만 떼어서 부를 때는 토막소리 또는 그냥 소리라고 했는데, 요즈음은 토막소리를 ‘판소리 ○○ 중에서 ○○ 대목’이라고 한다.
판소리의 기원은 전라도 지방의 서사무가(敍事巫歌) 유래설과 연희(演戱) 형태에서 추론한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 유래설이 있다.
판소리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큰 잔치· 마을 굿· 큰 장이 서는 날 등에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넓은 대청이나 넓은 마당에서 공연되었다. 노래하는 사람은 두루마기나 창옷을 입고 갓을 쓰며 손에는 부채를 들고 서섯 소리하되 판소리가 극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앉기도 하고 고수에게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하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몸짓과 우스갯말을 곁들여 소리하기도 한다. 고수는 소리꾼의 흥을 돋우고 판의 흥미를 끌기 위하여 ‘얼씨구!’ ‘좋다’ ‘잘한다’ 등의 추임새를 넣는데, 관객도 소리꾼의 소리에 추임새를 넣어 소리꾼과 고수와 함께 청중도 판을 이끌어 나가는데 참여한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 훨씬 이전부터 불려졌을 것으로 짐작하나 정확한 연대를 알 수 는 없다. 18세기 초경(숙종 말엽)에 판소리가 틀을 잡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하며, 이후 경종 · 영조 · 정조시대(1720~1800)에 이르는 동안 판소리 12마당의 사설과 창(唱)가락으로서의 더늠이 차차 다져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활약했던 명창으로는 우춘대(禹春大) · 하은담(河殷潭)· 최선달(崔先達) 등이 있다. 18세기 말엽까지의 100년 안팎을 판소리의 형성기로 본다. 이후 순조(1801~1834)부터 헌종 · 청종 · 고종 초엽까지인 19세기는 판소리의 전성기로서, 송흥록(宋興祿) · 모흥갑(牟興甲) · 고수관(高秀寬) · 박유전(朴裕全) · 권삼득(權三得) · 염계달(廉啓達) · 김제철(金濟喆) · 신만엽(申萬葉) 등의 8명창이 활약을 했다. 이 시기를 8명창시대라고도 하는데, 이 때 판소리의 동편· 서편의 유파가 나눠졌고, 명창들에 의해 판소리가 음악적으로 더욱 세련되어지고 다듬어진다. 19세기 중엽에는 판소리가 신재효에 의해 6마당으로 정리되었는데, 이때부터 판소리에 중인(中人)이상의 상류계층의 기호가 적극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에는 사대부 계층뿐만이 아니라 대원군, 고종 등의 왕가에서도 판소리를 애호하여 후원자가 되었으며, 명창들에게 관직까지 하사하게 된다. 이렇듯 이 시기는 양반들의 판소리 애호에 따라 판소리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20세기 초반에는 1902년 관립극장인 협률사 설립 이후로는 사회적 변동으로 판소리가 쇠퇴하면서 서구식 무대 공연 형식인 창극이 성행하게 된다. 전승되어 오던 판소리 여섯마당 중에서 춘향가 · 수궁가 · 흥보가 · 적벽가 · 심청가 이상의 다섯 마당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며, 당시를 송만갑 · 이동백 ·김창환 · 김창룡· 정정렬 등의 5명창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 새롭게 탄생한 창극은 1인 다역(多役)의 판소리와는 달리 극의 등장인물을 배역을 나누어 1인 1역으로 소리를 진행하는 것으로, 무대 배경 장치까지 갖추어 서양의 오페라에 비유할 수 있는 음악극이다.
이 시대에 활약한 명창은 김창환(金昌煥) · 송만갑(宋萬甲) · 김채만(金采萬) · 이동백(李東伯) · 정정열(丁貞烈) · 김창룡(金昌龍) 등이다. 이후에는 장판개(張判介) · 김정문(金正文) · 공창식(孔昌植) · 임방울(林芳蔚) · 이화중선(李花中仙) · 박녹주(朴綠珠) 등이 활약했다. 이들 전문 소리꾼들은 그들의 음악적 스타일로 동편제(東便制) · 서편제(西便制) · 중고제(中高制) 등으로 나뉘어 판소리를 전승하였다.
이 시기 판소리 창자들은 현대식 관립 극장인 협률사에서 창극 활동을 하였는데, 협률사가 문을 닫자 서울무대에서의 경험이 있던 김창환과 송만갑 등은 1907년 이후 김창환협률사(1907), 송만갑협률사(1908) 등과 같은 민간협률사를 조직하여 순회 공연을 하기도 하고, 원각사를 비롯한 연흥사 · 광무대 · 장안사 등의 사설극장을 중심으로 창극활동을 하기도 한다.
또한 1910년 대 중반부터는 사설극장이 하나씩 폐쇄됨에 따라 창부들의 활동이 더욱 줄어들면서 한강 이남의 판소리꾼들은 서울음악계에 활동할만한 안정된 기반이 사라진다. 이에 1915년에는 김창환 · 이동백 · 김인호 · 김봉이 등이 참여하여‘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을 설립하여 극장의 구속에서 벗어나 음악 활동을 한다는 기치를 내세운다. 이 단체는 중진의 남자 판소리꾼과 나이어린 여성 판소리꾼으로 구성되었으며, 설립 초기에는 다동조합과 연합하여 활동하기도 했지만 주로 단성사를 배경으로 창극활동을 하다 이후 광무대 및 다른 극장으로 전전긍긍하게 된다.
또한 이 단체는 전통적 창극과 더불어 <장화홍련전>·<사씨남정기>와 같은 신파극을 공연하기도 한다.
1920년대의 판소리계는 각종 명창대회를 통하여 판소리 공연을 하게 되며, 각 음반회사를 통한 음반활동도 하였다.
1930년대는 남도음악 전문 집단인 조선성악연구회(1934)가 설립되어 공연과 학습 등의 활동을 통하여 판소리 중심의 남도 소리 활동을 펼치면서 그 동안 침체되었던 창극의 재기를 이루기도 한다.
근대 조선후기 성행하였던 판소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창극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파생시키며 전통 판소리는 침체 국면을 맞이하고 창극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