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중국의 아리랑

해설-중국의 아리랑

중국 동포사회의 아리랑은 오히려 국내보다도 더 의미 있게 인식되어 왔다. 우리가 말 하는 ‘중국동포사회'란 대개 오늘날의 조선족 자치주 거주 동포들을 말 하는 데, 이 곳이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의 거점이었기에 항일의식이 유별난 곳이기에 아리랑 역시 단순한 노래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다. 대개 1930년대 이후 일제에 의해 만주개척을 목적으로 치밀하게 기획된 반강제적인 집단 이주민들이기 때문에 같은 철지를 주 내용으로 한 영화 <아리랑>이나 연극 <아리랑 고개>의 정서와 맡 닿아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주제가<아리랑>이 국내에서와 같이 모든 아리랑의 대표로 불렸다. 당연히 주제가<아리랑>의 일반화에 따른 결과인 것이다.
이는 중국동포사회에서 “본세기 20년대 조선반도를 뒤흔들며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던 유명한 영화 한 부가 있다. 이 걸작이 바로 당시 조선민족의 고난사를 진실하게 반영하여 영예와 찬양 속에 전해내려 온 <아리랑>이다.”라고 하는 인식에서 알 수 있고,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남녀로소, 상하귀천 없이 불러 온 민요이다. 들어도 들어도 실치 않은·····”노래로 인식한 것에서 알 수가 있다.
과연 중국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어떤 기능으로 불렸을까? 이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을 통해 확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군 빨지산 활동상의 일단이다. <중국민족학교> 황유복 교수의 저작물 《중국의 한인들》에서 일부를 인용 한 글이다.

“일본 관동군 ‘토별대'들이 산골짜기에 들어선다. 앞장에 선‘길 안내자'는 흰옷을 입은 조선족 노인이었다. 주위의 산봉우리를 둘러보던 노인은 목청을 뽑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이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미구에 노인은 일본군인의 군도아래 쓰러지고 포위망을 늘인 항일유격대들의 분노의 총소리는 노인이 못다 부른 아리랑의 노래 가락을 이어갔다.……. 중국 조선족 가운데 널리 알려진 항일투쟁 이야기이다.”


이 내용은 연변의 대표적인 작곡가 김관봉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증언에 따르면 1955년부터 10여 년간 우리역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는데, 중국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1966~1976)이 들이닥쳐 그간 알게 된 사실들을 입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라고 했다. 2005년 4월 12일 연길 정암촌 답사에서 증언한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노인을 왜놈 토벌대가 들이닥쳐 빨지산을 대라고 하며 끌고 갔는데, 노인은 약속한 장소로 가서 의연하게 아리랑을 불렸다 말입니다. 그것은 신호입니다. 그런데 유격대들은 노인이 그 앞에 있었기 때문에 기관총을 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계속 부른 것이었어요. 내 뒤에 왜놈들이 있으니까 쏴라 나는 죽어도 된다. 이런 신호였지요. 결국 노인이 제일 먼저 죽고, 그 뒤에 있던 왜놈들을 모두 몰살 시킨 것이지요. 그러니 아리랑은 처절한 왜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1930-40년대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은 재만 동포사회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약품이나 무기나 식량 조달은 물론, 정보를 얻는데도 그러했다. 그럼으로 재만 동포들과 항일 독립운동 전선의 개인이나 부대와는 밀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간파한 일본 토벌대는 첩자를 두는 등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동포들의 피해는 전선과 매 한가지였다.
이런 관계 속에서 아리랑은 투쟁의 한 무기가 되었는데, 바로 암호로 불렸던 것이다. 일본 토벌대와 독립군들과의 처절한 투쟁에서 아리랑이 그런 역할을 한 것인데, 북한 불후의 고전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나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 하라>에서의 아리랑이 같은 상황으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럼으로 중국 동포사회의 아리랑 상황은 어느 동포사회 못지않게 중첩된 의미로 존재한다.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서, 조국이 처한 비극적인 운명을 한탄하며, 타국에서의 설움을 달래기 위해, 항일의식의 한 표방으로 불렀다는 사실에서 확인이 된다.


1982년 연변문화예술연구소가 발행한 《조선족민요곡집》에는 서정가요 편에서 20개 항목의 아리랑을 수록했는데, 밀양·고성·량각랑·단천·충청도·청주·정선·경상도·백산·진도·영천·평안·긴아리랑·삼아리랑·강남아리랑, 15종을 구체적으로 곡보와 사설을 제시했다. 이중에는 북한과의 밀접한 교류로 오고간 것들이 있는데, 남북한 지명을 단 것들은 곡조는 거의 유사하고 부르는 지역이 서로 다를 뿐이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 항일시대의 창작 아리랑인 광복군아리랑과 ‘기쁨의 아리랑' 같은 것들을 발굴 해냈고 또 새롭게 창작하여 부르기도 했다. 이중 <기쁨의 아리랑>은 동포사회에서 대표적인 항일가요로 꼽는데,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일제와 싸워 승리하고 돌아 올 때 부른 노래로 전해진다.

기쁨의 아리랑
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고개
한번가면 소식 없던 탄식의 고개
업고지고 쫒겨서 흘러가더니
기쁨 싣고 떼를 지어 뛰넘어오네

오늘의 교민사회는 “어서 나라가 통일되고 국토가 통합되어 우리 겨레의 위용과 슬기를 만방에 떨쳐야지. 잠시 국가가 없으면 <아리랑> 노래로 하고 국기가 없으면 나라지도를 국기로 하면 될 것” 1) 아니냐고 우리에게 되묻는 처지인 것이다.
한편 중경에서 주로 활동한 한국청년전선공작대의 선전활동에는 이러한 중국 내 동포들의 정서를 반영한 아리랑 주제 공연을 중요하게 여기고 활동한바있다. 바로 1940년 5월 22일부터 서안 <남원문실험극장>에서 막을 올린 전4장 무극(舞劇) <아리랑>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한유한 작으로 <봄이 왔네>·<목가>·<한국행진곡>·<아리랑>이란 4부로 되어 같이 공연된 집체작 <국경의 밤> 등 보다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은 당시 발행된 <대공보>·<분화일보>·<한국청년>에서 “대성황리에 비상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는데, 역시 관객인 동포들의 정서가 닿았기 때문인 것은 물론이다.
제1장은 비장한 아리랑 선율로 막이 오르면 장엄한 ‘아리랑산'이 등장, 마을처녀와 양치기가 노래를 부르며 사랑을 맺어가는 평화로움을 제사한다.
제2장은 5년이 지난 후, 부부가 된 처녀와 양치기는 일제가 처들어 와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가해 ‘아리랑산에 일장기가 꼽히고 피바다가 일게 된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부부는 일제의 순민이 될 수 없다며 투쟁을 각오하고, 남편은 혁명군에 자원하여 부인과 작별하고 압록강을 건넌다.
제3장은 그로부터 35년 후, 고향무대가 전개된다. 두 부부는 긴 이별을 끝내고 각각 고향을 돌아온다. 여기서 지난 세월의 투쟁과 고난사가 재현된다.
제4장은 <한국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리며 일제가 패망하고 아리랑산에 다시 일장기가 꺾기고 조선 국기가 펄럭이는 장면이 중심이다.
이 작품이 이듬해 3.1절 기념 공연 등으로 다시 공연되기도 했는데, 이외에 얼마나 여러 곳에서 몇 회나 상영되었는지는 명확히 확인 할 길은 없지만 많은 기록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중국 내의 동포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본다. 당연히 이 극에 사용된 아리랑 음곡은 나운규의 영화<아리랑> 첫 편의 주제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