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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타루아리랑

해설-호타루아리랑

2차 대전 중 가장 잔인한 무기는 일본의 가미가제(kamikaze) 특공대(特攻隊)의 이른바 ‘인간탄환'이다. ‘가미가제'란 일본으로 오는 몽골과 고려의 연합함대를 바다에 수장시켰다는 바람(신풍神風)을 뜻하는 말로, 폭격기 조종사가 폭탄을 장착하고 연합군(미국)전함에 돌진, 전함을 폭파 하고 자신도 함께 죽는 전투다.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비인간적이긴 하지만 인간 자체를 병기화 한 것이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이 특공대의 잔인성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45년 5월의 총공격 때인데, 전체 특공대원 총 2500명의 2할 정도가 이 공격 때에 생을 마쳤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때의 공격은 오끼나와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규우슈우 남단 치랑(知覽) 특공기지에서 오끼나와 북단에 도착해있는 미군함대에 대한 공격이었다.
1945년 5월 11일 아침 8시, 치랑 기지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날은 육군특공 제36기 36명의 젊음이 산화되는 날, 그 36명의 명단에는 ‘특조 1기 25세 소위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라는 병사도 들어있었다. 이 날이 지나고서야 그 존재가 알려진 이 병사는 조선인 소위 탁경현(卓庚鉉)이다.
탁경현, 그는 1920년 11월 경남 사천군 서포면에서 태어나 5년 후 1926년 살길을 찾던 양친에 의해 일본으로 이주, 여동생과 함께 미쓰야마 후미히로로 창씨개명을 하고 살게 되었다. 그 역시도 다른 동포들처럼 ‘조센징'이란 말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나 과묵하고 의지가 강해 갖은 설움을 겪으며 교토 약학대학(京都藥學專門學校)을 마치고, 1943년 10월 군 복무로 특별비행 견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에서 남자라면 누구도 군에 입대하는 것을 피하 수 없었음은 물론 전장에 투입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행견습 1년 과정을 마치고 곧 바로 가미가제 특공대에 입대를 했다. 1)
당시 가미가제 특공대의 입대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서는 입대가 허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전 가족을 가난에서 구할 수 있음은 물론 정부로부터 부모를 ‘조국의 부모'로 인정받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특공대가 어떤 곳임을 알면서도 입대를 했던 것이다.
바로 이 미쓰야마 소위는 전투에 투입되기 전날 마지막 밤을 기지부근에 있는 ‘특공대의 어머니'로 유명한 토메씨가 운영하는 <기지여관 부옥>(基地旅館 富屋)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 여관은 그가 1년 동안 비행학교를 다니며 드나들었던 곳이다. 이 때 혼자 밤을 보내는 미쓰야마에게 주인 모녀는 차를 권하며 위로해 주었다. 이에 그는 생의 마지막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으···· 만일 제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내일 밤 이곳에 오겠습니다.
호···타루··· 호타루가 되어서요·····.
노래를 부르겠어요.


아 리 랑 아 리 랑 아 라 리 요
아 리 랑 고 개 로 넘 어 간 다····.
나 를 버 리 고 가 시 는 님 은
십 리 도 못 가 서 발 병 나 다·····.”


이로서 두 모녀는 비로소 미쓰야마가 조선 청년임을 알게 되었고, 다시 반딧불이가 되어 찾아오겠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미쓰야마는 이렇게 다른 특공대원들이 외친 ‘기미가요'에 ‘천황만세'가 아닌 아리랑으로 자신이 조선청년임을 밝히고 이튿날인 5월 11일 아침 8시 정각에 출격, 제51진무 대장이 맞춰놓은 주파수의 파열음과 함께 제1출격 조 여섯 대 중에 한 대에 몸을 실고 빗속을 뚫고 나가 전신 음(音)이 끊긴 것은 9시 15분이었다. 그의 목숨은 병기가 되어 오끼나와 바다 위에서 산화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약속대로 반딧불이가 되어 여관에 찾아와 두 모녀와 특공대원들을 놀라게 해 특공대의 신화를 남겼다. 2)
당시 이 같은 처지에서 아리랑을 부르는 심정에 대해서는 가미가제 특공대 제17기로 입대했다 해방이 되어 귀국한 한 대원 3) 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히고 죽는 것은 떳떳한 일이며, 한편으로 이러한 운명을 결정지어 준 신에 대한 저주와 조국에 대한 원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이런 것들이 함께 밀려 올 때 부르게 된다고 했다. 4) 그래서 김상필 대위(25세)도 아리랑을 불렀을 것이라고 했다.
활주로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으로 세워진 <지란특공평화기념관> 석비에는 이런 글이 세겨저 있다. “아리랑 노래 소리도 멀리/ 어머니의 나라를 그리며 진 사쿠라”····.과연 이 비 앞에서 고개 숙여 사죄해야할 죄인은 누구인가.


일제 하에서 가난과 설음을 자신의 목숨과 바꾼 가미가제 특공대원의 마지막 노래 아리랑, 이들에게 아리랑은 바로 단순한 노래가 아닌 조국, 고향, 부모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바로 아리랑의 이념화, 주체화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1) 鳥原落穆, <저 힌 구름사이 육군항공특별공격대>, 동심사, 1089

2) 이후 일본 정부는 2계급 특진 시켰고, 동상까지 세워준 것으로 전해진다.

3) 경북 영천시의 <영천아리랑보존회> 부회장

4) 이렇게 되어 비로서 미쓰야마가 조선인이었음과 유언대로 호타루가 되어 왔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5년 필자의 답사로는 이 이야기는 지금도 지란의 <지란특공평화기념관>에 두 모녀의 증언과 함께 <조선반도 출신특공대원 위령가비> (아리랑노래비)로 전해저오고 있고, 특공대를 다룬 수많은 책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연은 최근에 영화화 되었다. 일본의 국민배우 다카구라 갠이와 야오스 감독의 영화 <호타루>로 되 살아 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