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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마사오와 아리랑

해설-고가마사오와 아리랑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와 아리랑 1)

고가 마사오는 1904년 복강(福岡)현 대천(大川)시에서 태어나 7살 때인 1912년 홀어머니와 함께 인천으로 와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다녔다. 이 때의 인천은 이미 1890년대 일본 전통음악과 창가가 보급된 상태여서 쉽게 일본음악과 조선음악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그러다 12살 때 서울로 이사, 경성남대문소학교에 전학했고, 소학교 졸업 후에는 선린(善隣)상업학교에 진학했는데, 이 때 밴드 활동과 합창단을 조직하여 음악 활동에 심취했고 실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17살에 졸업을 하고, 바로 1922년 가족과 함께 오사카로 갔게 되었다. 그러니까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유소년기를 고가는 한국에서 보낸 것이다.
그래서 고가 마사오는 《古賀政男藝術大觀》회고기에서 “나는 (큰형의 가게에 60여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이들이 흥얼거리는 민요를 날마다 들었다.”며 이후 자신이 작곡을 하게 되었을 때 조선에서 들었던 “멜로디가 뛰어난 부분은 나의 작곡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작고 1년 전인 1977년 ‘저 꽃 이 꽃'이란 노래에 대해 말하면서 “만일 내가 소년시절을 조선에서 지내지 않았다면 이러한 곡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여 한국적 정서가 자신의 음악적 기반이었음을 시인했다.
고가 마사오의 작품은 1932년 발표한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와 ‘희망의 고개로', 그리고 ‘님 자취 찾아서' 등이 채규엽이 불러 크게 히트시킴으로서 명성을 얻은 인물로 그의 이력을 아는 국내에서는 특히 인기가 높았다. 이러한 배경에서인지 그는 아리랑을 편곡했는데, 1932년 8월 ‘아리랑의 노래'(아리랑의 唄·ariranno-uta)라는 곡명으로 당시 조선 최고의 가수 채규엽 3) 과 일본 최고 여가수 아와야 노리꼬( )에게 듀엩으로 부르게 하여 유행시켰다. 그리고 이 악보를 1938년 《古賀政男藝術大觀》 26쪽에 악보를, 34쪽에서 사토오 조오노스케(佐藤?之助)의 작시(作詩), 가사를 수록했다. 4) 이는 영화<아리랑>이 개봉 된지 6년 후의 음반화인 것이다. 이로서 많은 이들에게 기타 반주곡으로 쓰이게 했고, 유명 가수들이 부르기도 했다. 특히 해방 후 LP음반 시대 들어서서 고가마사오의 곡을 받은 가수들이 너나없이 음반의 보너스 츄랙으로 수록했다.

고가마사오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SP음반 고가마사오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SP음반

그런데 문제는 악보에 그의 작품 대부분을 작사한 작사가인 사토오 조오노스케(1890~1942)의 작사에 ‘古賀政男編曲 또는 作曲'으로 표기하여 자신이 작곡했다고 표기를 한 것이다. 이는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것이다. 엄연한 기존 곡을 편곡하였으면서 ‘작곡'이라고 했으니 참으로 지나친 왜곡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5)
이 같은 왜곡의 결과가 바로 고가 마사오의 추종자들에게 아리랑을 그가 작곡했다고 잘못 알게 한 배경으로 식민지 시대 이를 지적하여 바로잡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6)

‘스-짱 가락'의 원류

일본 금지곡 중에는 소년 죄수들의 감방에서 불렸던 노래에 ‘네리깡 부르스'와 이와 비슷한 ‘스-짱 가락'이 있는데, 이 두 노래는 2차대전 중에 불려진 것으로 반제국주의적 노래라고 한다. 그런데 후자는 반체제적인 내용에 민요가락으로 불려 이 노래의 원류를 찾고자 노력한 결과가 그것은 아리랑을 일본 민요조로 변조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내세운 것은 2내지 4박자가 주류인 일본 음악과 다르게 3박자이고, 아리랑을 변형 시킨 ‘뽕고 가락'이라는 두 가지를 들었다.
이 같은 일본의 연구 결과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이 시기 이미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아리랑>이 수입되어 상영되었고, 컬럼비아를 비롯한 모든 축음기 회사가 일본에 있었기에 취입을 위해서 조선 음악인들이 일본에 채류 했고, 음반이 출시되면 일차적으로 일본 시장에 먼저 유통된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주제가‘아리랑'이 일본인들에게 유행한 것은 당연했다. 실제 1932년 8월 일본 최고의 여가수 아와야 노리꼬(Awwaya Noriko) 와 1930년 일본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전속으로 계약된 한국의 최고 남자가수 長谷川一郞(Hasegawa Itiro:채규엽) 7) 가 ‘아리랑의 노래'(아리랑의 唄:Uta)를 발매하여 양국에서 히트한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최규엽, 이와야노리꼬의 아리랑의 노래 SP음반 최규엽, 이와야노리꼬의 아리랑의 노래 SP음반

그런데 더 직접적인 추정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들의 2세들이 소년 형무소에 끌려갔을 수도 있고 그래서 그들에 의해 불려진 아리랑이 다른 소년범들에 의해 변형되어 ‘지하의 노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참으로 아리랑은 묘한 인연으로, 묘한 장소에서 또 다른 사회성과 역사성을 발휘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1) 유행가 눈물의 고개(신아리랑)-1933 03, 콜럼비아(40405), 고가 마사오편곡 蔡奎燁 노래

2) 1894년 일본 동경 발행 《音樂雜誌》제45호

3) 스스로 長谷川一郞(하세가와 이찌로)으로 창씨를 개명했다.

4) 미야모토 타비토(宮本旅人), 《고가마사오예술대관》, 도쿄심포니악보출판사, 1938

5) 노동은은 노동은의 음악상자(1996년, 웅진출판사, 117쪽)에서 주제가<아리랑>과 고가의 악보가 유사하다는 것을 들어 주제가‘아리랑'이 얼마나 왜색인가라고 한바있다.

6) 1970년 폴모리가 자신의 악단에 의해 아리랑을 연주, 음반화 하면서 타이틀에서 ‘Oriental Love Song'이라고 하고 자신의 작곡이라고 했다가 교포사회의 항의로 바로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7) 채규엽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행가 직업가수로 동경중앙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인테리 가수였다. 예명 하세가와 이찌로는 1930년 일본 콜럼비아 레코드사에 전속으로 스카웃 되면서 받은 예명인데, 이는 한일 양국에서 흥행을 목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본다. 아마도 이 덕에 채규엽은 본교의 조교로 활동하는 등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1940년 1월의 한 광고문(조선일보, 1940, 1, 18)에서는 “유행가의 覇者 채규엽”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다.

8) 김열규, 아리랑 역사여, 겨레여 소리여, 1987, 조선일보사,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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