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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의 생애와 활동

백두대간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소리들, 잘 들어보셨나요?
그 멋진 소리를 노래한 명창의 생애는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명창의 이름을 클릭해보세요~!

판소리
강도근(姜道根, 918~1996)

판소리명창으로서 전라남도 남원 출신이다. 강도근은 농사꾼 아버지인 강원중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에서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는 음악가들이 많았는데, 대금산조의 무형문화재 강백천(1898~1982)이 그의 사촌형이고, 판소리와 창극으로 이름을 날렸던 강산홍과 가야금의 명인 강정열은 당질이며, 가야금산조로 남원과 진주에서 활동했던 강순영 또한 그와 사촌간이다.


17세 되던 해에 동편제 판소리 명창 김정문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강도근은 흥보가 중 '제비 후리는 대목'이 특기이다. 20세 때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당대 최고 명창의 한사람인 송만갑 선생에게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배웠고, 25세 때에 구례로 가서 박봉술의 형 박봉채(朴奉彩)에게 판소리를 지도받았다. 지리산 쌍계사 일대에서 7년여 동안 혼자 공부한 후 하동으로 유성준을 찾아가 판소리 수궁가를 배웠다.


해방을 전후해서 동일창극단, 조선창극단, 호남창극단 등을 전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목포, 이리, 여수, 순천 등지의 국악원에서 창악 강사를 지냈다. 1973년 이후 남원국악원을 창립하여 강사를 지냈고, 틈만 나면 선유폭포 등 지리산 등지를 다니며 연습을 한 노력파였다.
조선시대 명창으로 추앙되던 송만갑의 판소리 전통을 이어받아 동편제 소리를 고수해 오던 그는 환갑을 넘겨 60대 중반에서야 판소리계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은둔의 예술인이기도 했다.


그는 돈이나 명예에 초연한 고집스러운 소리꾼으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농사꾼임을 자처하며 고향 남원에서 농사를 지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강도근 후계자 양성소를 설립, 동편제 소리의 맥을 이어온 판소리 동편제의 마지막 대가이다. 안숙선(국립창극단장)은 초기에 그가 길러낸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1953년 부산 전국판소리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 1981년 한국국악협회 국악공로상, 1985년 남원시민의 장 문화장, 1986년 KBS국악대상, 1992년 동리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모습으로 약간 쉰 듯하면서도 청청한 수리성과 가늘고 단단한 상청을 이루는 성음이 특징이다.

김명환(金命煥, 1913~1989)

판소리 고수이며 호는 일산(一山)이고 전라남도 곡성 출신이다.
17세 때부터 여러 명고수로부터 판소리 북장단을 배웠는데 그 가운데 장판개(張判介), 주봉현(朱鳳鉉), 신찬문(申贊文)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장판개와 주봉현으로부터는 북장단의 이론과 실기에 대한 지도를 받았고, 신찬문으로부터는 북의 너름새에 대한 지도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20대 후반부터는 지방에서 임방울(林芳蔚)을 비롯한 여러 명창들의 북장단을 쳤고 40세 때부터 4년간 정응민(鄭應珉)소리방의 전용고수로 있으면서 보성소리를 터득하였다.
1960년부터 중앙무대에 진출하여 판소리 공연에 참가하였고, 차차 그의 기량의 출중함과 판소리 이론의 탁월함이 인정되어 그의 문하에 북을 배우려는 제자들과 판소리를 연구하려는 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97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론이 뛰어난 고수들로부터 정식으로 고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론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수련하였으므로 뛰어난 기량을 지녔다.
특히, 판소리 이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만년에는 가야금산조 연주자들에게 음악해석에 대한 지도를 많이 하였다. 뿌리깊은나무에서 제작한 판소리 다섯마당을 비롯하여 여러 판소리 음반에 그의 북장단이 취입되어 있다.

김세종(金世宗)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에 활약한 판소리 명창 중의 한 사람. 전라북도 순창에서 출생하였고 순창읍 복실리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집안에 전승되는 동편제(東便制) 소리를 익혔고, 고창의 신재효(申在孝)에게 판소리의 이론적인 지도를 받았다. 학식이 높고 판소리를 학문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판소리 이론에서는 첫손 꼽는 명창이었다.

그의 판소리 이론 중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창극사 朝鮮唱劇史≫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판소리 발림을 극적인 내용과 같게 해야 하며, 얼굴 표정과 몸의 모든 동작이 극적인 내용 및 음악과 맞아야 한다. 둘째, 음악은 사설(辭說)의 극적인 내용과 융합되어야 한다. 셋째, 한가한 장면에서는 느린 장단을 쓰고, 긴박한 장면에는 빠른 장단을 쓰며, 슬픈 장면에는 계면조(界面調)를 쓰고, 웅장한 장면에는 우조(羽調)를 써서 조와 장단이 판소리 사설의 극적인 내용과 융합되어 구성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사의 뜻에 따라 선율 또한 일치되어야 한다. 넷째, 어단성장(語短聲長)이라 하여 가사는 짧게 붙이고, 소리는 길게 부른다.

그의 이러한 판소리 이론은 오늘날 판소리의 일반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의 〈춘향가〉는 김찬업(金贊業)·정응민(鄭應珉)을 통해 정권진(鄭權鎭)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는 특히 〈춘향가〉를 잘 불렀고, 〈춘향가〉 중 ‘천자풀이’는 그 당시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그의 이론은 송만갑(宋萬甲)·전도성(全道成)에 의해 방창(倣唱)되어 오늘에 전한다. 이 밖에도 그의 지도를 받은 명창으로는 장자백(張子伯)·유성준(劉聖俊)·이동백(李東伯)·이선유(李善有) 등이 있다.

김소희(金素姬, 1917~1995)

여류 판소리명창으로서 본명은 김순옥(金順玉)이고 호는 만정(晩汀)이다. 전라북도 고창 출신이며 1932년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 수료하였고, 당대 명창 이화중선의 〈추월만정〉을 듣고 감동받아 판소리에 입문하였다.
1930년에 명창 송만갑을 찾아가 판소리에 입문하여, 단가와 〈심청가〉 몇 대목을 배웠다. 송만갑이 떠난 후 이화중선이 어린 김소희를 창극무대에 향단이 역으로 세상에 소개했다.



그 후 15세가 되던 해인 1932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온 지 한달여 만에 김소희는 한성주의 주선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1932년 전계문에게 가곡과 시조를,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1933년 정경린에게 무용을 배웠다. 1934년 정정렬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김종기 명인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1938년에는 박동실에게, 광복 후에는 정응민, 김여란, 정권진, 김연수한테서 판소리를 배웠다.




1936년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고, 1948년에 사단법인 여성국악동호회 이사, 1954년에 민속예술원 원장, 1957년 대한국악원 이사, 1962년 국립창극단 부단장, 196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주요 공연으로는 1949년 제9회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참가 및 유럽 순회 공연, 1964년 동경올림픽 공연, 1972년 미국 카네기홀 공연,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순회 공연, 1979년 국악생활 50주년 대공연,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공연 등이 있다.


김소희는 특히 〈춘향가〉와 〈심청가〉를 장기로 삼는데, 그는 소리뿐 아니라 각종 악기 연주와 춤, 서예에도 일가를 이룰 정도의 기량을 지니고 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수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안향련, 한농선, 박초선, 박송희, 김동애, 오정숙, 안숙선, 성창순, 남해성, 이일주, 신영희, 박양덕, 오정해 등이 김소희한테 판소리를 배웠다.
김소희는 장단 붙임새 운용에 변화가 많고 매우 기교적이다. 슬픈 대목이 많은 심청가도 서정적이고 청아한 느낌이 나게 부를 정도로 고운 목소리를 가졌다.


김소희는 〈들국화〉같은 신민요도 작곡한 바 있고,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국립창극단 공연시 편곡을 해주었으며, 〈탕자가〉,〈부활가〉같은 창작 판소리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1932년 말에는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처음으로 녹음하여, 1933년 상반기에 음반으로 나왔다. 이때 취입한 것은 단가, 〈춘향가〉, 〈심청가〉 등 유성기 음반 5면이다. 1934~1935에는 오케레코드사에서 〈심청가〉, 〈춘향가〉 민요 등 다수의 음반을 취입했는데, 유성기 음반이 17면으로 확인되었다. 1936년에는 빅타레코드사에서 〈춘향가〉 전집, 춘향가 중 〈이별가〉와 〈옥중상봉〉, 심청가 중 〈심봉사 황성 가는데〉,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 등을 녹음했다. 1959년 KBS레코드에서 제작된 해외 소개용 국악음반에 남도민요,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녹음했고,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문화재관리국에 춘향가 전바탕을 녹음했다.


이 춘향가 전바탕 녹음은 1976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한국전통음악대전집≫에 담아 제작한 바 있고, 1988년 중앙일보사에서 ≪국악의 향연≫ 전집에 담아 제작하기도 했다. 1960~1970년대에 지구레코드, 신세기레코드, 시대레코드, 힛트레코드, 현대음반, 미국 넘서치레코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여러 장의 단가, 판소리, 창극, 민요음반을 냈고, 사가판으로 심청가(성음 4LP, 1974), 춘향가(성음 6LP, 1978)을 제작한 바 있다.


1931년 남원춘향제 민속예술경연 1등상, 1959년 제4회 국악상(국악진흥회), 1962년 세계방송대상, 1966년 국전 서예 입선, 1968년 국전 서예 신인예술상, 1971년 제2회 아시아 음악제 방송 적합성 부문 우수상(유네스코), 1972년 문화예술진흥 공로상(문화공보부),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년 국창기념비 건립헌수(고창 흥덕 청년회의소), 1982년 초대 한국국악대상, 19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7년 남원시예술문화대상, 서울시문화상, 초대 동리대상, 1994년 제1회 방영일 국악상, 1995년 금관문화훈장 등이 추서되었다.

김여란(金如蘭, 1907~1983)

판소리의 여류명창으로서 본명은 분칠(粉七), 호는 향곡(香谷)이다.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城內)에서 살다가 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으로 이사했으며, 그뒤 다시 서울 인의동과 봉천동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양금과 가야금 등의 악기와 판소리 및 시조를 배웠는데, 김봉이(金鳳伊)에게서 〈심청가〉를 배웠고, 정정렬(丁貞烈)에게서 오랫동안 〈심청가〉,〈적벽가〉,〈춘향가〉를 배웠다.
민족항일기에 레코드판에 판소리를 취입한 적이 있고, 조선성악연구회와 창극단에서 활동하였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향곡(鄕谷)에 은거해 있다가 광복 뒤 다시 창극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60년대초 판소리계에 나와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1964년 1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정정렬의 〈춘향가〉를 가장 순수하고 완벽하게 전창(全唱)하는 명창으로 평가받았으며, 박초선(朴初宣), 최승희(崔承希), 최영기(崔英基), 정금내(鄭今乃)를 후계자로 두었다.

김연수(金演洙, 1907~1974)

민족항일기를 거쳐 최근까지 활약한 판소리 명창이다. 호는 동초(東超)이며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14세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고흥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상경하여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졸업 후 고향에서 농삿일에 전념하던 중 판소리에 흥미를 느껴 축음기로 7년간 독학하였다.



그 뒤 당시 순천군수 집에 머물고 있던 명창 유성준(劉聖俊)으로부터 〈수궁가〉전편을 배웠고, 상경하여 송만갑(宋萬甲)에게서 〈흥보가〉와 〈심청가〉 전편을, 정정열(丁貞烈)로부터 〈적벽가〉,〈춘향가〉 전편을 배웠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가입하였고, 1937년에는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조선창극좌(朝鮮唱劇座) 대표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일본 빅타레코드사에서 판소리 다섯마당 중 중요 대목을 30여 매의 음반에 담았다. 1940년 조선창극단 설립을 비롯, 1945년 김연수창극단, 1950년 우리국악단을 설립하였으며, 1957년 대한국악원장을 거쳐 1962년 초대국립창극단 단장에 임명되었다.


〈심청가〉,〈적벽가〉에 뛰어났으며 창극 〈심청가〉의 심봉사역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판소리계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지식인으로 판소리 노랫말의 잘못을 고쳐 이면과 표현이 정확하고 격조에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판소리 노랫말 정리에 힘썼다.
그리하여 정확한 장단과 주석을 붙인 ≪창본 춘향가≫가 1967년 출판되었고, 죽은 뒤 1974년에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김연수창본≫이라는 이름으로 〈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가 출판되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59년 국악공로상, 1966년 제5회공보부국악상, 1968년 국악공로상(국무총리상), 1972년 국민포장을 수상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성순종(成順鍾), 김동준(金東俊), 오정숙(吳貞淑), 박봉선(朴奉仙), 박옥진(朴玉珍) 등이 있으며, 그 중 한농선(韓弄仙)에 의하여 〈수궁가〉와 〈심청가〉가 전해지고, 성창순(成昌順)에 의해 〈심청가〉가 전해지고 있다.

김창룡(金昌龍, 1872∼1935)

충청남도 서천 출생. 조선 고종 말기와 민족항일기에 활약한 5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진양조를 처음으로 판소리에 넣었다는 김성옥(金成玉)이고, 아버지는 판소리에 삼공제비를 응용하였다는 김정근(金正根)이다. 따라서, 판소리 명문에서 태어난 셈이다. 아우 창진(昌鎭)도 명창으로, 한때 고종으로부터 참봉의 직계를 받기도 하였다.



7세 때 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였고, 13세 때에는 이날치(李捺致)에게 1년간 판소리를 배웠다. 그 뒤 오랫동안 홀로 공부하다가 32세 때 서울에 올라와 연흥사(延興社) 창립에 공헌하였다.
1933년에는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과 조선성악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창극공연에도 참가하였다. 〈적벽가〉와 〈심청가〉를 잘하였다. 특히 〈심청가〉 중에서 ‘꽃타령’과 〈적벽가〉 중에서 ‘삼고초려(三顧草廬)’ 대목을 잘하였다.

원래 그의 집안은 경기도 및 충청도지역에 전승되는 중고제(中古制) 소리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김창룡도 또한 자기 가문의 소리제를 그대로 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전승이 끊어졌고 취입한 음반만 남아 있다. 그의 소리는 오늘날 전승이 끊어진 중고제 판소리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현재 남아 있는 여러 음반 중에서 〈적벽가〉 중 ‘삼고초려’, 단가 중 〈장부한 丈夫恨〉, 〈수궁가〉에서 ‘수정궁(水晶宮) 들어가는데’, 〈심청가〉에서 ‘화초타령’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김창환(金昌煥, 1854∼1927)

조선 고종·순종 때의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나주 출생. 명창이었던 이날치(李捺致)·박기홍(朴基洪)과는 이종간이다. 어려서부터 함평에서 서편제(西便制)의 명창인 정창업(丁昌業)에게서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다. 1908년 7월 원각사가 설치되자 주석(主席)으로 있으면서 많은 가객들을 거느리고 창극을 공연하였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아 의관(議官) 벼슬을 제수받았다.



1909년 11월 원각사가 폐쇄되자 일단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전라도 출신의 명인 및 명창을 규합하여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고 지방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나라를 빼앗기자 방성통곡하고 경상남도 남해에서 협률사를 해산하여 단원들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1919년 고종이 죽자 고향집에서 후원에 사당을 신축하여 고종의 사진을 모시고 근신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74세로 죽었다.

각종 고전에 정통하였고 그 이전 명창들의 법제(法制)에 대한 견문도 많았다. 또한, 소리는 서편제인 만큼 애원처절(哀怨悽絶)하여 감상적인 계면조를 주로 한 판소리를 했으며, 소리도 잘했지만 풍채가 좋고 발림을 잘하여 관중들을 매혹시켰다고 한다. 더늠(판소리 명창이 사설과 소리를 새로 짠 대목)으로는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가 있는데, 음악적인 구성이 뛰어나 오늘날 여러 명창들이 이 대목을 그의 더늠으로 부르고 있다.

소리는 오수암(吳壽巖)·김봉학(金奉鶴)·조몽실(曺夢實)에게 이어졌는데, 오늘날에는 정광수(丁珖秀)가 〈춘향가〉와 〈흥보가〉를 이어받고 있다. 판소리 중 〈흥보가〉의 ‘제비노정기’·‘집터 닦는 대목’, 〈춘향가〉 중 ‘과거장’, 그 밖에 〈농부가〉와 〈성주풀이〉가 음반으로 남아 있는데, 이 음반은 서편제의 특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김추월(金秋月)

생몰년 미상. 판소리 명창. 경상북도 포항 출신. 민족항일기에활동하였다.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남도잡가 명창으로도 이름이 꼽히었다.
1920년대에 이동백(李東伯)·신금홍(申錦紅)과 더불어 일본축음기주식회사의 와시표축음기에 춘향전 전집을 취입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음반에 판소리 및 남도잡가를 취입하였으며 창극활동도 하였다.

박귀희(朴貴姬, 1921~1993)

가야금병창의 명인으로서 호는 향사(香史)이다. 본명은 오계화(吳桂花). 14세에 이화중선(李花中仙)의 대동가극단에 입단하여 소리에 입문하였으며, 15세에 박지홍(朴枝洪)에게 단가와 판소리 몇 대목, 조학진(曹學珍)에게 〈적벽가〉, 1937년 강태홍(姜太弘)에게 가야금병창을 시사하였다.



박동실(朴東實)에게서 〈흥보가〉,〈심청가〉, 유성준(劉聖俊)에게서 〈수궁가〉, 이기권에게서 〈춘향가〉를 이수하였으며, 1941년 가야금병창을 오태석(吳太石)에게 사사한 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여성국악동호회, 한국민속예술학원 등을 설립하였으며,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 많은 해외공연으로 한국전통음악을 널리 세계에 알렸다. 1979년 단가, 판소리 중에서의 병창곡과 자신의 편곡 및 창작곡 등 50곡을 실은 ≪박귀희가야금병창곡집≫을 출판하였다.
더욱이 국악교육에 깊은 뜻을 두어 1960년 국악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88년 국악예술고등학교의 이전과 발전을 위하여 전 재산을 기증하였다.
국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안숙선(安淑善), 강정숙(姜貞淑), 김성녀(金星女) 등에 의하여 그의 가야금병창곡이 전승되고 있다.

박녹주(朴綠珠, 1906~1979)

판소리의 여류명창이며 경상북도 선산출신이다. 12세 때 박기홍(朴基洪)의 문하에 들어가 5년간 판소리를 배웠고, 서울에 올라와 송만갑(宋萬甲)으로부터는 〈적벽가〉를, 정정렬(丁貞烈)로부터는 〈춘향가〉를 배웠다.




서울에서 명창으로 이름을 얻었으나 더욱 정진하여 김창환(金昌煥)으로부터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김정문(金正文)으로부터 〈흥보가〉를,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 〈수궁가〉 일부를 배웠다.

1928년과 1930년에는 많은 판소리를 음반에 취입하여 명성이 전국으로 퍼졌다.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결성에 참가하였고, 1936년 동양극장에서 창극 〈춘향전〉의 춘향역을 맡았다.

그뒤 송만갑, 이동백(李東伯), 오태석(吳太石) 등과 창극좌(唱劇座)에 입단하여 창극운동에 가담하였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판소리에 전념하였다. 1960년 〈흥보가〉전바탕을 취입하였고, 196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흥보가〉를 잘하였고, 그 중에서도 '제비노정기'와 '비단타령'에 출중하였다. 1972년 이후로는 판소리보존회 이사장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소리는 조상현(趙相賢), 박초선(朴招宣), 성창순(成昌順), 성우향(成又香) 등이 이어받았다.

박봉술(朴奉述, 1922~1989)

판소리 명창이며 호는 청운(靑雲)이고 전라남도 구례 출생이다.
판소리 명창 만조(萬朝)의 넷째 아들이며 역시 판소리 명창 봉래(奉來)의 아우이다.
전라남도 순천과 부산 등지에서 살다가 1970년 서울에 올라왔다.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큰형 봉래로부터 소리를 배우다가 형이 일찍 죽자 아버지 만조와 둘째형 봉채(奉採)로부터 동편제(東便制) 판소리를 터득하였다.
어려서 잠시 서울에 올라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송만갑(宋萬甲)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 소년 시절에 목이 좋고 공력이 있어 시골에서 소년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과도하게 수련을 하다가 목을 다쳐 고음을 내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다.


한동안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지냈으나 재기하여 천신만고 끝에 다시 목을 얻었지만, 그래도 목이 탁하고 고음이 나지 않아서 암성(가성)으로 소리하였다. 공력이 대단하여 젊은층보다 판소리를 깊이 들을 줄 아는 고로들이 그의 소리를 좋아하였다.
1953년부터 순천에서 오랫동안 국악원 판소리 사범으로 제자를 가르친 것을 비롯하여, 목포, 전주, 군산, 부산 등지를 전전하며 국악원 사범으로 있었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어느 명창보다 순수한 동편제 판소리를 계승하였고 판소리 다섯마당을 다 불렀는데, 특히 〈흥보가〉,〈수궁가〉,〈적벽가〉에 출중하였고, 〈춘향가〉도 더러 공연하였으나 〈심청가〉는 그리 능하지 못하여 공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1961년 서울 신세기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흥보가〉,〈적벽가〉,〈수궁가〉,〈심청가〉를 각각 대목소리로 음반에 취입한 것을 비롯하여 문화재관리국에서 출판한 ≪한국의 음악≫이라는 문화재 음반전집에 〈적벽가〉를 취입하였고, 뿌리깊은나무에서 제작한 판소리 다섯마당에 〈흥보가〉,〈수궁가〉를 취입하였다.
문하에서 송순섭(宋順燮), 김일구(金一求), 안숙선(安淑善) 등 여러 명창이 나왔는데, 송순섭, 김일구가 그를 계승하는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보유자 후보로 인정되었다.

박지홍(朴枝洪, 1889~1961)

판소리의 명창으로서 전라남도 나주 출신이다. 고종 때 판소리의 명창 박기홍(朴基洪)의 종제이다. 어려서부터 대명창 김창환(金昌煥)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고, 처음에는 박기홍의 고수(鼓手)로 따라다니며 소리를 익혔다.
뒤에 소리로 전향하여 명창이 되었으나, 지방에서 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기량에 비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였다. 1920년 이후에는 주로 대구의 권번(券番)에서 판소리 교육에 종사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이었고, 18세 총각 때에는 16세의, 이방(吏房)의 딸과 사랑의 도피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박초월(朴初月, 1913∼1983)

판소리 여류명창. 본명은 삼순(三順). 아호는 미산(眉山).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갈계리에서 성장하였다. 김정문(金正文)·송만갑(宋萬甲)에게서 판소리를 배웠고, 임방울(林芳蔚)·정광수(丁珖秀)에게서도 배웠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목소리에 성량도 풍부하여 일찍부터 이름을 떨쳤다. 1930년 전주에서의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여러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흥보가〉·〈심청가〉·〈춘향가〉 등을 취입하였다.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참가하여 여러 선배명창들과 창극운동에 참여하였다.광복 후 여성국극동지사(女性國劇同志社)를 창단하였고, 1955년에는 현재의 서울국악예술학교의 모체인 한국민속예술학원을 박귀희(朴貴姬)와 함께 설립하고 교사로서 많은 신인을 양성하였다. 1966년부터는 집에 당대의 명창 156위의 신주를 모셔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는 정성을 보였다. 1964년 10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고, 1973년 11월에는 〈수궁가〉의 보유자로도 지정을 받았다.

장기는 〈춘향가〉와 〈심청가〉인데, 조순애(曺順愛)·한농선(韓弄仙)·성우향(成又香)·남해성(南海星)·조통달(趙通達)·전정민(全貞珉)·김봉례(金鳳禮) 등이 그의 소리를 계승하였고, 이 중 조통달·남해성·전정민·김봉례 등은 그의 후계를 담당하였다. 〈춘향가〉와 〈수궁가〉 일부가 음반으로 남아 있다.

배설향(裵雪香, 1895∼1938)

판소리의 여류명창. 전라북도 남원 출생. 장판개(張判介)의 부인이다.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익혔고 목소리가 아름다워 촉망받았는데, 장판개를 스승으로 모시고 5년간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다. 1915년 장안사(長安社)와 연흥사(演興社)의 창극공연에도 참가하였다.



창극 〈춘향전〉에서는 춘향역을, 〈흥보전〉에서는 흥보처역을 맡아 창극의 주연명창으로 활동하는 한편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 같은 대명창들의 실연(實演)을 보고 견문을 넓혔다.

성량이 풍부하고 여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굵직한 음성을 타고난 데다, 장판개와 같은 뛰어난 명창의 지도를 받은 만큼 이화중선(李花仲仙)·김초향(金楚香)과 같은 당시 최고 여류명창들과 어깨를 겨루었으나 43세로 죽었다.
〈흥보가〉 중 특히 ‘박타령’을 잘 불렀다. 취입한 음반으로는 〈춘향가〉 중 ‘추월강산(秋月江山)’ 등이 남아 있다.

송만갑(宋萬甲, 1865∼1939)

조선 고종 때부터 일제 때까지 활약한 판소리 명창. 당시 다섯 명창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전라남도 구례읍 봉북리(鳳北里)에서 태어났다. 순조 때 가왕(歌王)으로 칭호를 받던 흥록(興祿)의 종손이며, 철종 때 명창 우룡(雨龍)의 아들로 판소리 명문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였고, 천재적 재질이 있어 13세 때에는 소년 명창으로 이름이 자자하였다. 아명(兒名)이 밤쇠였는데 어린 나이로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에 나가 성인들을 무색하게 하였다. 전라감사한테서 참봉직을 받았고,원각사(圓覺社) 시절에는 여러 차례 어전에서 소리를 하여 고종한테서 감찰직(監察職)을 제수 받았으며, 원각사 폐쇄 뒤에는 궁내부(宮內部)의 별순검(別巡檢)의 직을 3개월 정도 수행하였다. 어느 때 서편제(西便制) 선배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소리를 듣고 뜻한 바 있어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고매한 동편제(東便制)에 새로운 통속적인 소리조를 가미하여 불렀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 쫓겨나 객지로 돌아다니며 소리를 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서울에 올라와 김창환(金昌煥)과 함께 원각사 간부로 있으면서 판소리와 창극공연에 힘을 기울였다. 1933년에 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제자양성과 창극공연에 힘쓰다가 74세로 죽었다.

생전에 많은 제자를 길러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김정문(金正文)·박봉래(朴奉來)·박녹주(朴綠珠) 등 쟁쟁한 명창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의 제자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 소리가 많이 전승되지 못하였다. 그의 소리는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나 아니리가 부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판소리교육과 더불어 창극공연을 많이 하였으며 이때 취입한 음반도 많이 남아 있다.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잘 하였고, 특히 〈춘향가〉·〈심청가〉·〈적벽가〉를 잘 하였다. 일제 때의 음반 중 〈수궁가〉의 ‘고고천변(皐皐天邊)’, 〈춘향가〉의 이별가(離別歌) ‘날다려가오’, 단가(短歌) 중 ‘진국명산(鎭國名山)’ 등은 걸작이었다.

송흥록(宋興祿)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판소리 명창. 8명창 가운데 한 사람이다. 판소리의 중시조 또는 가왕(歌王)으로 꼽히고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리에서 태어났으며, 판소리의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金成玉)은 그의 매부이고, 광록(光祿)은 동생이다.

그는 역대의 판소리 명창 가운데 기량이 가장 뛰어날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 그때까지 없었던 진양장단을 도입하여 소리를 짜고 평타령으로 일관되었던 원초적인 판소리 선율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의 선율을 오늘날과 같이 발전시켰다. 계면조는 본래 남도무가(南道巫歌)나 민요에 있는 육자배기토리를 가리키는 것이며, 민요나 무가에서는 단순한 선율형태를 가지나 판소리에서는 매우 복잡한 선율이 많다. 계면조 선율에 이와 같은 정교한 선율형태를 도입한 것이 송흥록으로 보이며, 그가 잘하였다는 귀신의 울음소리, 즉 귀곡성(鬼哭聲)도 따지고 보면 계면조 선율의 교묘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우조는 가곡·가사에서 보이는 정가(正歌)의 선율을 판소리화한 것인데, 판소리에서 우조의 선율은 정가의 선율과 다른 판소리적인 특이한 선율이 구사된다. 이 판소리 우조선율의 특성이 송흥록에 의해서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원초의 판소리는 중중모리·중모리·자진모리 장단으로 짜여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송흥록이 판소리에 음악적인 변화를 주기 위하여 느린 진양장단을 도입하였다. 송흥록이 판소리의 속도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속도의 변화를 더욱 다채롭게 하고, 우조와 계면조로 선법적(旋法的)인 변화 및 판소리 음악의 정조(情調)의 변화를 더욱 다채롭게 하였다.

이와 같이, 장단의 변화, 조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송흥록의 판소리를 두고 당시의 사람들은 ‘여산폭포(廬山瀑布)’·‘호풍환우(呼風喚雨)’·‘천변만화(千變萬化)’라 하였다. 신재효(申在孝)는 〈광대가〉에서 “송선달 흥록이는 타성주옥(唾成珠玉) 방약무인(傍若無人) 화란춘성(花爛春城) 만화방창(萬化方暢) 시중천자(詩中天子) 이태백(李太白)이라.” 하였는데, 만화방창하다는 것도 그의 변화무쌍한 판소리 기교를 두고 이른 것이라 하겠다.

기량이 출중하고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기에 독보건곤(獨步乾坤)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신재효도 그를 시중천자로 꼽히는 이태백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모든 판소리에 뛰어났으나 그 중 〈변강쇠타령〉·〈춘향가〉·〈적벽가〉를 잘하였는데, 특히 〈춘향가〉 중 ‘옥중가’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이 대목의 귀곡성이 유명하다. 또한 동편제 판소리를 확립하여 동편제 소리의 시조로도 꼽힌다. 그의 소리는 동생 광록과 수제자 박만순(朴萬順)에게 전승되었다

신재효(申在孝, 1812∼1884)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개작자·후원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전라남도 고창 출생. 아버지 광흡(光洽)은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한성부에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고창현의 경주인(京主人)을 하던 선대의 인연으로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하여 재산을 모았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절충장군 상려(常礪)의 딸이다. 신재효는 어려서 총명하였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런 이름을 지었다 한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수학하였고, 사십이 넘어서 부근에 살던 대석학과 학문을 의논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고창현의 향리와 서민들과 깊이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 여러 향반(鄕班)들이 만장을 써 보낸 것으로 보아, 신분을 넘어선 폭넓은 교유를 맺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는 아버지가 마련한 기반을 바탕으로 35세 이후에 이방이 되었다가 나중에 호장(戶長)에 올랐다. 1876년(고종 13)에 기전삼남(畿甸三南)의 한재민(旱災民)을 구제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다. 신분 상승을 꾀하면서도 한시가 아닌 판소리에서 정신 세계를 찾은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넉넉한 재력을 이용하여 판소리 광대를 모아 생활을 돌보아 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직선적이고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빨라 너름새를 할 여유가 없는 동편제(東便制)와 유연하고 화려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느려 너름새가 쉽게 이루어지는 서편제(西便制)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덧붙여 보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진채선(陳彩仙) 등의 여자 광대를 길러 내어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어린광대가 수련할 수 있는 대본을 마련하기도 하여, 판소리의 다양화를 시도하였다. 〈광대가〉를 지어서 판소리의 이론을 수립하였는데, 인물·사설·득음(得音)·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하였다. 인물은 타고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으며, 사설의 우아한 표현, 음악적 기교 및 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판소리는 상스럽지 않고 한문학과 견줄 만한 예술임을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만년에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의 판소리 여섯마당을 골라서 그 사설을 개작하여, 작품 전반에 걸쳐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게 하고, 상층 취향의 전아(典雅)하고 수식적인 문투를 많이 활용하였다. 그래서 하층의 발랄한 현실 인식이 약화되기도 하였으나, 아전으로서 지닌 비판적 의식이 부각되고, 사실적인 묘사와 남녀 관계의 비속한 모습을 생동하게 그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판소리가 상하의 관심을 아우르면서 신분을 넘어선 민족 문학으로 성장하는 데 진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고창읍 성두리에 묘가 있으며, 1890년에 한산시회(寒山詩會)에서 송덕비를 건립하였다.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단가혹은 ‘허두가(虛頭歌)’라고하는 노래를 지었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다룬 〈치산가 治産歌〉, 서양의 침입이라는 시대적 시련을 걱정하는 〈십보가 十步歌〉·〈○심한 西洋되놈〉, 경복궁 낙성 공연을 위해 마련한 〈방아타령〉, 그 밖에 〈오섬가 烏蟾歌〉·〈도리화가 桃梨花歌〉·〈허두가〉 등이 대표적이다

유성준(劉成俊, 1874~1949 )

판소리 명창이고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는데,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김정문(金正文)의 외숙이 되며, 김창룡(金昌龍), 신명학(申明鶴)과 동배(同輩)이다.
젊어서 송우룡(宋雨龍) 밑에서 판소리를 배웠고, 한때 정춘풍(鄭春風)과 김세종(金世宗)에게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판소리 이론으로 첫손을 꼽던 명창 김세종에게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이론에 밝았고 고종으로부터 참봉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당시 판소리 이론과 실기가 뛰어났던 명창 전도성(全道成)과 쌍벽을 이루는 이론가였다. 가끔 서울에서 공연한 때도 있었으나 주로 진주에서 제자들에게 판소리를 교육하는 데 힘써왔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많은 명창이 나왔다.
그는 〈수궁가〉와 〈적벽가〉를 잘하였고, 〈수궁가〉는 당시에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특히,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가 만나는 대목과 토끼 신세를 그리는 대목을 잘 불렀다.
그의 〈수궁가〉는 임방울(林芳蔚), 김연수(金演洙), 정광수(丁珖秀), 박동진(朴東鎭), 박녹주(朴綠珠), 박귀희(朴貴姬) 등에게 전해졌다.

이동백(李東伯, 1867∼1950)

본명은 이종기(李鍾琦), 아명은 동백(東白).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庇仁) 출신.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공부하였고, 13세 때에는 김정근(金正根)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공부하고 다시 김세종(金世宗)에게 5년간 공부하였다. 20세 전후에 도만리 호리산의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獨工)하였고, 다시 진주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였다. 절에서 나오자 창원부사의 부름을 받고 〈새타령〉을 불러 이름을 떨쳤다.



36세 이후 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는 동안 명창으로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46세 때 서울로 올라와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과 함께 원각사(圓覺社)에서 창극을 공연하였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연흥사(延興社)·광무대(光武臺) 등에서 송만갑과 함께 창극과 판소리를 공연하였다. 1933년 송만갑·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판소리 교육에 힘쓰는 한편, 창극정립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9년에 부민관에서 은퇴공연을 하자,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달 동안이나 전국과 만주, 연해주 일대까지 순회공연을 계속하였다. 그는 김세종에게 짜임새 있게 판소리를 배웠고, 성량이 풍부하고 풍채가 당당하여 거인적인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종은 그를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계를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다.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고, 특히 〈새타령〉을 잘 하였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李捺致)·박유전(朴裕全) 이후 첫손을 꼽고 있다. 제자는 많지 않으나 강장원(姜章沅)이 그의 소리 일부를 이어받았다. 그의 소리를 담은 음반이 수십 종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새타령〉과 〈흥보가〉 중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 〈심청가〉 중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선유(李善有, 1872∼?)

판소리 명창. 경상남도 진주 출생. 10세 때부터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였고, 15세 때에 송우룡(宋雨龍)의 문하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한 뒤 혼자 독공을 하다가 30여세 때 김세종(金世宗)에게 공부한 뒤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성량(聲量)은 풍부하지 못하였으나 동편(東便)소리의 고제(古制)를 점잖게 잘 불렀다. 1933년 판소리 다섯마당의 사설(辭說)을 엮어 ≪오가전집 五歌全集≫이라는 판소리사설집을 내었다.



이 ≪오가전집≫은 판소리장단을 넣어 채록하여 출판한 최초의 판소리사설집으로 판소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판소리를 잘 하여, 〈수궁가〉 몇 대목이 음반으로 나온 바 있다. 박봉술 (朴奉述)이 그에게서 수년간 판소리를 배웠다. 여러 종의 그의 판소리 음반은 ≪오가전집≫ 사설과 함께 송만갑(宋萬甲) 이전의 동편제(東便制) 소리의 특성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소향(李素香, 1916~1985)

경기, 서도, 남도민요 및 가야금 병창의 명인이며 본명은 이악이(李岳伊), 예명은 소향(素香 또는 少香)이다. 경상남도 합천출신. 한양권번(漢陽券番)에서 이경준(李慶俊)에게 경서도(京西道) 민요를 배웠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활동하였고, 1937년에 매일신문 주최 명창대회에서 1등을 하였다. 1945년에는 대한국악원 민요부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요연구회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74년부터는 한국국악예술학교 강사로 있었다.
그는 다재다능하여 경기, 서도, 남도민요에 능하였고, 가야금 병창에도 명인으로 꼽혔으며, 일제 때부터 〈호접몽 胡蝶夢〉 등 많은 가야금 병창을 취입하였다.

이화중선(李花仲仙, 1898∼1943)

여류명창 중의 한 사람. 부산 출생. 김초향(金楚香)과 더불어 당시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17세 때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홈실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여 살던 중, 협률사(協律社)의 공연을 보고 감동하여 집을 나가 장득주(張得周)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로 몇년 만에 〈춘향가〉·〈수궁가〉·〈흥보가〉를 공부하였고, 서울로 와서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의 지도를 받아 당시 여류명창으로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 아무리 어려운 대목도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불러 청중을 매혹시켰으나, 오히려 거침없이 쉽게 부르는 것이 감동을 덜 주는 단점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 때에 임방울(林芳蔚)과 함께 음반을 가장 많이 녹음한 명창으로 꼽히고 있다. 대동가극단을 조직하여 지방순회공연을 많이 하였고, 일본 공연도 많이 하였다. 1943년 재일동포 위문공연차 일본을 순회하던 중 별세하였다. 그녀의 장기는 〈심청가〉 중에서 ‘추월만정(秋月滿庭)’,〈춘향가〉 중에서 ‘사랑가’였다.

임방울(林芳蔚, 1904∼1961)

판소리 명창. 전라남도 광산 출생(현재의 광주 광역시 광산구). 아버지의 소망에 따라 14세 때 박재현(朴載賢) 문하에서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웠고, 뒤에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 〈수궁가〉·〈적벽가〉를 배웠다.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났고 성량도 풍부하였다.



오랫동안 수련한 그는 25세 때 상경하여 송만갑(宋萬甲)의 소개로 처녀무대에서 〈춘향가〉 가운데 ‘쑥대머리’를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의 창작으로 전하는 ‘쑥대머리’를 비롯한 많은 음반을 내었다.
특히 일본에서 취입한 ‘쑥대머리’는 우리나라·일본·만주 등지에서 100여만장이나 팔렸다 한다. 그뒤 음반취입과 판소리 공연에만 힘을 쏟았고 창극운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를 판소리 전통을 최후까지 고수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서편제 소리의 최후 보루라고도 하고 있다.

판소리 다섯 마당을 다 잘하였지만 특히 〈춘향가〉·〈수궁가〉·〈적벽가〉를 잘하였다. 1960년에 원각사(圓覺社)에서 〈수궁가〉 발표회를 가진 것을 비롯하여 몇 가지 공연을 가졌다.
이때 녹음하여 둔 테이프를 복사하여 취입한 음반인 〈수궁가〉와 〈적벽가〉가 전한다. 일제 때에 그는 이화중선(李花仲仙)과 더불어 가장 인기있는 명창이었으나 판소리의 사설에는 치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많은 음반 가운데 〈춘향가〉에서 ‘쑥대머리’,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소리는 박귀희(朴貴姬)·한애순(韓愛順)·신평일(申平日)·김용준(金龍準)·성우향(成又香) 등이 이어받았다.

임춘앵(林春鶯, (1923~1975)

창극인으로 본명은 종례(終禮)이다.
전라북도 남원 출신이라는 설과 전라남도 함평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판소리 명창이며 창극인인 임유앵(林柳鶯)의 아우이다. 광주(光州)의유성준(劉成俊), 서울의 정정렬(丁貞烈)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1948년 서울에서 박녹주(朴綠珠), 김소희(金素姬) 등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시공관(市公館)에서 여성창극인만으로 〈옥중화 獄中花〉라는 이름으로 〈춘향전〉을 창극으로 꾸며 공연하였는데 이때 이도령역을 맡았다. 1949년 김아부(金亞夫)의 창극 〈햇님 달님〉에 출연하였다.
1961년에는 광주에서 임유앵과 더불어 여성국악동지사(女性國樂同志社)를 조직, 조건(趙健) 작 창극 〈공주의 비밀〉을 청주에서 공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여성국극(女性國劇)의 명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의 쇠퇴로 은거하였다.

전도성(全道成, 1864~?)

조선 말기의 판소리 명창이고 전라북도 임실 출생이다.
9세 때부터 아버지 전명준(全明俊)에게서 10여 년간 소리를 배웠고, 21세 때에는 전라북도 진안군 물목 매봉재 산중에 들어가 100일 기도 하고 2년 동안 소리를 닦았다. 그 뒤 산에서 내려와 홀로 수련하다가 28세 때 송우룡(宋雨龍)의 문하에 들어가 1년간 공부하여 판소리의 기틀을 잡았다.


그 뒤 박만순(朴萬順), 김세종(金世宗), 이날치(李捺致) 등 선배명창을 수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42세 때 세상에 나가 공연활동을 벌이니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목이 양성(陽聲)이고 성량이 모자라 넓은 마당에서의 공연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으나, 음악성이 매우 치밀하고 변화가 무쌍하여 실내공연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소리의 리듬변화가 매우 다양하여 뛰어난 고수가 아니고서는 그의 소리에 북을 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판소리 이론으로 역대 명창 가운데 첫손을 꼽았던 김세종의 지도를 받았던 만큼 판소리의 역사와 이론에서 당시에 제일이었으며, 판소리 평론에도 그를 누를 자가 없었다. 박만순, 김세종을 통하여 고아한 동편제 판소리를 터득하였는데, 동편제 판소리를 통속화시킨 송만갑(宋萬甲)을 비판하였다. 판소리 다섯 마당에 두루 능하였으나 〈흥보가〉와 〈심청가〉를 잘 하였고, 특히 〈심청가〉에서 '범피중류(泛彼中流)'대목을 뛰어나게 잘 하였다고 한다.


그의 문하에는 정정렬(丁貞烈), 신영채(申永彩)를 비롯하여 수많은 명창들이 거쳐갔으나 그의 소리를 이은 자가 드물다. 다만, 김원술(金元述)이 그의 〈흥보가〉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주로 지방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못하였다.

정권진(鄭權鎭, 1927~1986)

판소리 명창이며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응민(應珉)으로부터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 등을 배웠다.



광복 후 30세 무렵부터는 본격적인 판소리인이 되어 군산국악원, 대구국악원, 대전국악원 등에서 판소리 강사로 활동하였다.
1961년에 서울로 올라와, 1964년부터 1982년까지 국악예술학교에서 판소리를 가르쳤고, 죽을 때까지는 전남대학교 국악과에서 대우전임으로 판소리를 교수하였다.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남긴 음반에는 문화재관리국에서 나온 ≪한국의 음악≫ 중에 판소리 〈심청가〉가 있고, 뿌리깊은나무에서 낸 ≪판소리≫에 〈적벽가〉가 들어 있다.

정정렬(丁貞烈, 1876~1938)

조선 말기에 활약한 판소리 명창. 5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전라북도 익산 출생.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소질이 있었고 목청이 좋아 판소리에 뜻을 두고 7세에 정창업(丁昌業) 문하에 들어가 소리 공부를 시작하였다.



14세 때에 정창업이 죽자 그 뒤 이날치(李捺致)로부터 배웠으나 16세 때에는 이날치도 죽어서 혼자 공부하였다. 수년간 충청도 일대의 여러 절로 돌아다니며 40세 안팎까지 공부를 계속하다가 마산에서 몇 해 동안 판소리를 지도하였다.
1926년에 50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소리 선생으로 활약하였는데, 그의 명망은 대단하였다. 그는 고종으로부터 참봉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춘향가〉를 연마하였고, 〈춘향가〉를 새로 짜서 정교한 음악적 특징을 가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발표하자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춘향가〉를 배우게 되었다.


1933년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김창룡(金昌龍)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교육과 판소리 공연에 힘썼다. 특히 창극공연에 힘써 그에 의해 편극되어 무대에 올려진 1935년의 〈춘향가〉와 〈심청전〉은 획기적인 것이었고, 공전의 대성황을 이룬 작품이었다. 당시의 창극발전에 끼친 지대한 공은 독보적인 것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목이 탁하고 성량이 부족하여 여러 번 좌절하였으나 50세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수련을 하여 대명창이 된 것이다. 그의 음반으로 여러 대목이 남아 있는데 〈춘향가〉에 걸작이 많다.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신연맞이'이다. 그의 소리는 김여란(金如蘭), 김연수(金演洙), 이기권(李基權), 조진영(趙進榮) 등 많은 명창이 이어받았으나, 김여란의 〈춘향가〉가 정정렬의 바디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한성준(韓成俊, 1875∼1941)

충청남도 홍성 출생. 천호의 아들이다. 7세 때부터 외할아버지 백운채(白雲彩)로부터 춤과 북을 배웠다. 14세 때부터 3년간 홍성 서학조(徐學祖)에게 줄타기와 땅재주를 배웠으며, 이어 수덕산의 박순조(朴順祚) 문하에서 20세가 넘도록 춤과 장단 공부를 하였다. 1894년 이후로 유랑생활을 하다가 한말에 개관한 원각사(圓覺社) 무대에 출연하게 되면서 서울에 정착하였다. 원각사가 없어지게 되자 협률사(協律社)·연흥사(延興社) 등의 단체에서 지방을 순회공연하였다. 이 때 고수로서 15차의 창방(唱榜:콩쿠르)을 치렀으며 김창환(金昌煥)·박기홍(朴基洪)·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정정렬(丁貞烈) 등 명창의 고수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이때 궁중무용을 접하면서 뒷날 〈태평무 太平舞〉·〈학무 鶴舞〉를 만드는 데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30년 조선 음악무용 연구회를 조직하고, 1934년에는 무용만을 전문으로 하는 조선 무용연구소를 창설하고 제자를 기르는 한편, 1935년에는 부민관(府民館)에서 ‘한성준무용공연회’를 가졌다. 그 뒤 일본 동경을 비롯한 주요 도시를 순회 공연함으로써 무용을 일본에 소개하였고, 1941년에는 일본의 모던일본사가 주는 예술상(藝術賞)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태평무〉·〈학무〉·〈신선무〉·〈살풀이춤〉·〈한량무〉·〈사공무〉·〈농악무〉등이 있으며, 제자로는 김천흥(金千興)·김보남(金寶男)·이강선(李剛仙)·장홍심(張紅心)·한영숙(韓英淑)·강선영(姜善泳)·이매방(李梅芳)·정인방(鄭寅芳)·진수방(陳壽芳)·김삼화(金三和) 등이 있다.

민요
김옥진

여성 국극의 명인 홍성덕의 모친이고 전라도 판소리 무형문화재 홍정택이 홍성덕의 숙부이다. 김옥진은 일제 강점기 때 판소리, 남도민요, 신민요 유성기 음반을 여러 장 낸 바 있다.

김정연(金正淵, 1913~1987)

서도소리명창으로 평양 출신이며 서도소리명창 죽사(竹史)의 아우이다.
9세에 개성으로 이사하여 정화학교를 다녔다.
1929년 이승창에게 가곡, 가사를 배웠고 이장산(李獐山)으로부터 무용을 배웠다. 홍기청에게 가야금, 양금을 배웠고,김칠성(金七星)으로부터 서도소리를 배웠다. 광복 후 서울에 살며 서도소리 공연과 무용공연 활동을 활발히 하는 한편 제자를 길렀다.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인정되 었다. 킹스타, 신세기 등 여러 레코드사에서 그의 서도소리 음반을 내었는데, 특히 1972년 성음레코드사에서 ≪서도소리대전집≫ 53곡을 내어 서도소리로는 지금까지 가장 방대한 자료를 내었다. 저서로는 ≪우리춤의 첫걸음≫, ≪한국무용곡집≫, ≪시조집≫, ≪서도소리대전집≫ 등이 있다.

김태운(金泰運, 1897∼1963)

경기소리 명창. 경기도 고양 출신. 최경식(崔景植) 아래서 시조·경기잡가·경기민요를 배웠고 박춘재(朴春載)로부터 경기민요·경기입창을 배웠다.
그는 최경식·박춘재 이후로 주수봉(朱壽奉)·최정식(崔貞植)과 더불어 경기 민요와 잡가의 명인으로 활약하였고 이명길(李命吉)·엄태영 등과 〈선소리 산타령〉 명인으로 활약하였다. 민족항일기에 그의 소리를 담은 음반이 남아 있다.

박춘재(朴春載, 1881∼1948)

한말과 민족항일기에 활약한 경기·서도 소리의 명창. 서울 출신. 창배(昌培)의 아들이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으나 자라면서 소리를 좋아하여 처음 홍필원(洪弼元)·홍필광(洪弼光) 형제를 사사(師事)하여 잡가와 선소리를 배웠다.



뒤에 박춘경(朴春景)으로부터 시조와 잡가를, 조기준(曺基俊)으로부터 가사(歌詞) 등을 배워 시조와 잡가 및 선소리로써 대성하였고, 재담의 제1인자이었다. 1900년 궁내부가무별감에 임명되어 어전연주의 특전을 얻었다.

화려하던 광무대(光武臺) 시절에는 특유의 재담과 가무, 탈놀이의 하나인 발탈〔足假面〕 기예로 명성을 높였다. 그의 소리는 박천복(朴天福)·오영근(吳英根)·김경호(金慶浩)로 이어졌는데, 특히 박천복에 의하여 8·15 광복 후 그의 소리가 전해져 오고 있다

신숙(19??~197?)

생몰년 미상 신숙은 함양출신으로서 방금선보다 한 살이 많은데 서로 친구 사이로 지냈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신숙은 1970년대 58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영산홍(李暎山紅, 1901∼?)

서도소리의 명창. 평양 출신. 이진봉(李眞鳳)·김옥엽(金玉葉) 등과 함께 평양에서 이름을 얻었고,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서울에서 서도소리로 유명하였던 가기(歌妓)이다. ‘목부자〔頸富者〕’라는 별명을 듣던 그녀는 풍부한 성량과 막힘 없는 상청·하청을 자랑하였다.



힘이 없는 듯하면서도 자유자재로웠던 타고난 목소리를 지녔다. 서도소리가 장기이면서 민요·잡가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선소리산타령〉은 백미였다. 서울에서는 장계춘(張桂春)으로부터 가곡·가사·시조를 배웠고, 경기잡가에도 능숙하여 〈유산가〉·〈제비가〉 등의 여러 음반을 남겼다.

서도소리로 민요·잡가·선소리 등을 고루 통효하였는데, 특히 〈선소리산타령〉은 더욱 뛰어나 당시 레코드를 제작하던 각사에서 다투어 그녀와 이진봉·김옥엽 중창의 〈놀량〉 등의 음반을 내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창배(李昌培, 1916~1983)

경기좌창(京畿坐唱)과 〈선소리산타령〉의 명창으로 서울 출생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최경식(崔景植)으로부터 경기좌창과 시조 및 민요를 배웠고, 이명길(李命吉)로부터 〈선소리산타령〉을 배웠다.
1944년 조선가무단원으로 전국을 순회공연하였고, 1951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봉직하였다. 1960년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있었고, 청구성악학원(靑丘聲樂學院)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있었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최창남(崔昌南), 박태여(朴太汝), 백영춘(白永春) 등을 후계자로 두었다. 저서에는 ≪한국가창대계 韓國歌唱大系≫, ≪가요집성 歌謠集成≫, ≪증보가요집성 增補歌謠集成≫ 등이 있다.

장학선(張鶴仙, 1906~1970)

민족항일기를 거쳐 광복 후 활약한 서도(西道) 소리의 명창. 본명은 장현길(張賢吉). 평양 출신. 소학교를 졸업한 뒤 기성학원(箕城學院)에서 김밀화주에게 서도소리를 배웠다. 일제강점기부터 서도의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이때 콜롬비아와 빅타레코드회사에서 서도소리를 음반에 취입하였다.



1959년에 팔도명창대회에서 1등상을 탄 바 있고, 1969년 9월 27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서도소리는 일품으로 평가받았고, 특히 〈관산융마 關山戎馬〉를 잘 불렀는데 일제강점기 때 취입한 음반이 남아 있다.

최순경(崔順慶, 생몰년 미상)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서도소리와 〈배뱅이굿〉의 명창.
평안남도 순천(順川) 출신. 김관준(金寬俊)과 김종조(金宗朝)로부터 서도소리와 〈배뱅이굿〉을 배웠다.
서도소리로는 당시 첫손을 꼽는 명창이었다. 특히 〈배뱅이굿〉·〈맹인덕담〉이 장기였다. 그의 제자로는 〈배뱅이굿〉을 잘 부르던 백신행(白信行)이 있었다. 〈배뱅이굿〉·〈온정가 溫井歌〉·〈날찾네〉 등이 음반으로 남아 있다.

기악
강백천(姜白川, 1898~1982)

대금산조의 명인으로 전라남도 남원 태생이다. 만년에는 부산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대금 시나위를 잘 불었는데, 여러 창극단에서 대금을 불었다. 대금산조를 먼저 짰다는 박종기(朴鍾基)와 교분이 있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대금산조를 짰다.

그의 산조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잦은모리장단으로 조성되고, 우조와 계면조로 짜되 계면이 주가 되어 대금 시나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시나위더늠'이라 부르고 있다.

이것은 박종기 대금산조가 우조, 설렁제(드렁조)와 같은 판소리조를 구사하고 선율이 판소리형에 가까운 것과 대조적이다. 197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이수자로 김동표(金東表), 송부억쇠(宋富憶釗), 이엽(李葉) 등 세 명을 길렀다.

강태홍(姜太弘, 1893~1957)

가야금산조의 명인이고 호는 효산(曉山)이다.
전라남도 무안 출신으로 원각사에서 창극활동을 하던 명창 용안(用安)의 셋째 아들이다. 아홉살 때부터 가야금을 배웠으며, 가야금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김창조(金昌祖)에게서 전수받았다.
거주지를 대구로 옮겨 살면서 때때로 서울에 올라와서 협률사(協律社)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참여하여 연주활동을 하고 축음기로 가야금산조 및 가야금병창을 취입하였다. 그때 박차경(朴且更)?최금란(崔錦蘭) 등 제자를 길렀다.
40대 후반에는 부산에서 살며 원옥화(元玉花), 김춘지(金春枝), 구연우(具演祐), 신명숙(申明淑) 등 여러 제자를 길렀는데, 김춘지는 뒤에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만년에는 불교에 심취하였고, 음악적으로 심화된 가야금산조를 지어 여러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김윤덕과 박귀희도 배운 일이 있으며, 그의 예술은 제자들에 의하여 널리 전승되어 가야금독주회에서 연주되기도 한다. 그가 연주한 가야금산조 및 병창은 축음기판으로 남아 있다.

김병호(金炳昊, 1910~1968)

가야금산조의 명인이고 호는 금암(錦巖)이며 전라남도 영암 출생이다.
김창조(金昌祖)로부터 가야금산조를 전수받았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창극단원,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임방울창극단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부산 봉래권번(鳳來券番)의 교사, 임춘앵국극단의 악사로 있었다.
1959년부터 인천여자고등학교에서 전통음악 강사로 재직하다가 1961년부터 1968년 8월 죽을 때까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과 국립국악원에서 연주원 및 가야금 강사로 재직하면서 많은 연주활동과 제자를 길러냈다.
민족항일기 때 취입한 것으로 김창조의 가야금산조에 자기나름대로 가락을 짜넣은 〈김병호류 가야금산조〉가 전해지고 있다.

김윤덕(金允德, 1918~1978)

가야금 산조와 거문고 산조의 명인으로 호는 녹야(鹿野)이다.

전라북도 정읍 출생으로 1933년 정읍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정자선(鄭慈善)에게 양금정악(洋琴正樂)을 배웠다.1934년 김광석(金光錫)에게 가야금정악을, 1935년 김용근(金容根)에게 거문고정악을 배웠다.



1947년에는 정남희(鄭南希)에게 가야금산조를, 1948년에 한갑득(韓甲得)에게 거문고산조를 전수받았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대한국악원 국극사의 단원이었고 1950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국악원에 출강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다.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숙명여자고등학교, 국악예술학교 등에 재직하였다.
재직 당시 일본, 멕시코, 유럽, 미국 등지에서 많은 해외공연을 가졌다. 1968년 한국국악협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음악적 재질이 매우 뛰어나 스승의 산조에 새로운 가락을 짜 넣어서 〈김윤덕류 가야금산조〉와 〈김윤덕류 거문고산조〉를 만들었으며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60년대에 킹스타사에서 거문고산조를 음반에 취입하였고, 1977년 중요무형문화재 기록음반에 가야금산조를 취입하였다. 저서로 ≪가야금구음정악보≫, ≪현금산조보≫, ≪현금정악보≫, ≪가야금풍류국문신보≫, ≪가야금정악보≫ 등의 악보가 있다.

김종기(金宗基, 1902∼1940)

가야금·거문고산조의 명인.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경상남도 함안·진주 등지에서 살았다. 전라북도 운봉의 박한용(朴漢用)으로부터 가야금을 배웠고, 충청남도 강경의백낙준(白樂俊)으로부터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
그는 가야금 및 거문고산조에 뛰어났고, 특히 독특한 가야금산조를 짜서 김삼태(金三泰)·김소희(金素姬) 등 여러 제자에게 가르쳤다. 그밖에도 가야금병창·판소리·해금·북에도 능하였다.

지방에서 악기연주 교육에 활동하는 한편, 때때로 서울에 올라와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등 여러 음악단체의 공연에 참가하였다.가야금산조 및 가야금병창을 취입한 음반이 있다. 그의 가락은 김삼태가 전수받았다.

김죽파(金竹坡, 1911~1989)

가야금산조의 명인이고 본명은 김난초(金蘭草), 예명은 운선(雲仙)이며 전라남도 영암 출생이다. 처음으로 가야금산조의 틀을 짰다고 전해지는 김창조(金昌祖)의 손녀이다.
8세 때 할아버지로부터 가야금을 시작하였으며, 할아버지가 죽은 뒤 11세부터 13세까지 한성기(韓成基)로부터 산조와 풍류 그리고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또한, 협률사(協律社)에 참가하여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 16세에 상경하여 여류가야금연주자로 최고의 명성을 떨쳤다. 이때 그는 조선권번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가야금 이외에도 판소리는 김봉이(金鳳伊), 임방울(林芳蔚), 김정문(金正文)을, 승무는 한성준(韓成俊)을, 그리고 병창은 오태석(吳太石), 심상건(沈相健), 박동준(朴東俊) 등을 스승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1931년 한성준의 반주로 산조 및 병창을 SP판으로 오케레코드(Okeh Record)사에서 취입, 출반하였다. 1932년 22세에 혼인하였으며, 다음 해부터 모든 연주활동을 중단하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한 1955년 경부터 일반인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치면서 음악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널리 연주되던 산조에 단모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할아버지 김창조와 한성기로부터 배운 산조에 176장단과 무장단의 세산조시를 작곡하여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세산조시의 틀을 완성시켰다. 1956년 김창조계와 다른 산조인 심상건류를 그로부터 배웠고, 1963년 아쟁산조를 한일섭(韓一燮)으로부터 배웠다.
1978년 67세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고 가야금을 배운 지 60년 만에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처음으로 공개연주를 가졌다. 1979년 할아버지 김창조가락에 진양조 7장단, 중모리 4장단, 자진모리 4장단, 휘모리 51장단과 무장단의 일부분, 그리고 세산조시 7장단 등 많은 가락을 추가하여 약 55분에 이르는 김죽파산조를 완성시켰다.


1979년 성음사에서 LP판을 출반하였고, 1980년 한국문화재보호협회에서 ≪한국전통음악대전집≫ 중 제13집인 가야금산조 음반을 출반하였다. 1985년 일본 동경(東京)에서 2회의 연주를 하였으며, 1988년 일본 킹레코드사에서 가야금산조 CD를 출반하였다.
1989년 일본 오사카〔大阪〕과 동경에서 연주하였으며, 같은 해 뿌리깊은나무사 제작으로 ≪가야금산조전집≫을 출반하였다. 이재숙(李在淑), 김정자(金靜子), 양승희(梁勝姬), 문재숙(文在淑) 등 많은 연주자들에 의해서 전승되고 있다.

김춘지(金春枝, 1919~1980)

가야금 산조의 명인이고 본명은 채운(彩雲)이다.
경상남도 마산 출신으로 1926년 강태홍(姜太弘)으로부터 가야금풍류를 배웠고, 1929년 조용구(趙鏞九)에게서 가야금병창을 배웠으며, 1934년 한영호(韓英鎬)에게서 〈한성기류(韓聖基流)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1944년 다시 강태홍으로부터 가야금산조를 배웠는데, 1966년까지 지도를 받았다. 1957년 한갑득(韓甲得)으로부터 거문고산조를 배웠으며, 1962년 임석윤(林錫潤)으로부터 거문고풍류를 배웠다.
1964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있었고, 1971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가야금 강사로 있었으며, 1975년 부산의 계성여자고등학교 국악강사로 재직한 바 있다. 1979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박종기(朴鍾基, 1880∼1947)

조선 말기와 민족항일기 초기에 활약한 대금산조의 명인. 전라남도 진도 출신. 대금산조를 맨 먼저 지었다고 전한다. 집안 어른들로부터 젓대 시나위를 배운 뒤, 수련을 쌓아 신접한 경지에 이르러, 젓대를 불면 산새가 날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와 당시 민속악의 명인·명창들과 극장공연을 많이 하였다.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민속음악단체를 따라다니며 창극반주를 하는 등 많은 연주활동을 하였다. 후배 강백천(姜白川)과 친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각 대금산조를 짰는데, 그는 김창조(金昌祖) 가야금산조나백낙준(白樂俊) 거문고산조의 경우와 같이 판소리에 나오는 우조(羽調)·계면조(界面調)·설렁제(드렁조) 등 여러 조를 도입하고, 그것을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장단에 얹어서 체계를 세워 짰다. 대금산조는 지금까지 음악적으로 보아서 다른 분야의 어떤 산조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산조는 한주환(韓周煥)에게 이어졌으며, 민족항일기에 그의 대금산조를 담은 음반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방공연중에 죽어, 그의 소원대로 진도섬 길가 언덕에 묻혀, 오가는 행인들에게 무언의 위로를 주고 있다.

백낙준(白樂俊, 1876∼1930)

거문고산조의 창시자. 본명은 학준(鶴準). 충청남도 강경(江景) 출신. 선달(先達)의 아들이다.
1896년 20세 되던 해 아버지 선달이 부른 판소리 가락과 시나위 가락을 처음으로 거문고에 옮겨 탄주하였고, 뒤에 독주음악으로 체계를 확립시켰다.
그는 율객(律客)으로서 삼남일대를 돌며 거문고산조의 보급에 힘썼다. 죽을 때까지 그의 문하에서 배운 율객 중 김종기(金宗基)·박석기(朴錫基)·신쾌동(申快童) 등이 유명하다.

성금연(成錦鳶, 1923~1983)

가야금 연주의 명인으로 본명은 성육남(成男)이고 광주(光州)출신이다.
해금산조의 명인인 지영희(池映熙)의 부인이다.

1935년 조명수(曺明洙)에게 가야금풍류와 판소리를 배웠고, 1936년 안기옥(安基玉)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1938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입회하여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1949년에는 여성국극동지회(女性國劇同志會)에 입회하여 창극에 종사하였다.

1960년부터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 교사로 오랫동안 봉직하였고, 1966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하여 제1악장으로 있었다. 19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으나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예능보유자에서 해제되었다.

그는 안기옥가야금산조와 박상근(朴相根)가야금산조를 토대로 새로 '성금연류가야금산조'를 만들어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이 산조는 명쾌하고 감칠맛있는 특성 때문에 1960년대와 1970년대초에 가장 많이 연주되었던 가야금산조 중의 하나였다.

그는 작곡에도 재질이 있어 〈추상 追想〉,〈새가락별곡〉 등 여러 가야금독주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문하에서 지성자(池成子), 지미자(池未子), 이재숙(李在淑), 황병주(黃炳周) 등 수많은 가야금산조의 명인이 배출되었다.

신쾌동(申快童, 1910∼1978)

거문고산조(散調)의 대가. 원명 신복동(申卜童). 호는 금헌(琴軒). 전라북도 익산 출신.
9세 때 박생순(朴生順)에게 양금(洋琴)을, 12세 때에는 박학순(朴學順)에게 가야금(정악·산조)을 배웠고, 13세 때에 정일동(鄭一東)에게 거문고로 민간풍류를 배웠다. 16세 되던 해에 거문고산조의 창시자인 백낙준(白樂俊) 문하에 입문하여 산조를 처음으로 배웠다.



백낙준 가락을 이수한 후 고향인 익산에서 고창으로 거처를 옮겨 산조음악에 전념하고 있을 때, 당시의 명창 임방울(林芳蔚)·이화중선(李花仲仙) 등의 권유로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소재의 줄포가설무대에서 처음으로 거문고산조를 연주하였다.
그뒤 목포의 목포극장에서 명창 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박녹주(朴綠珠)와 공연하였고, 1933년 5월 10일에 후진양성과 창극운동의 전개를 목적으로 창립된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하여 많은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가 활동한 무대는 서울의 부민관(府民館)·단성사(團成社)·동양극장·조선극장, 평안북도 평양의 금천대좌(金千代座), 함경남도의 함흥극장 등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황오익(黃伍翼)·강성재(姜成在)·김병두(金兵斗)·양기평(梁基平)·조위민(曺偉敏)·김기환(金基煥)·김영제(金泳帝)·윤경순(尹京順)·정옥자(鄭玉子)·구윤국(具潤國)·김무길(金武吉)·성기군(成基君)·이창홍(李昌弘)·이세환(李世煥)·김효순(金孝順)·김영욱(金永旭) 등을 들 수 있다. 거문고산조를 융성하게 한 공이 크며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예능보유자(1967.7.16.∼1977.11.29.)로 지정받았다. 거문고산조의 음반이 남아 있다.

심상건(沈相健, 1889~1965)

가야금산조 명인으로 충청남도 서산 출신이다.
가야금 이외에 병창으로도 명성을 떨쳤고, 양금과 거문고 풍류 및 해금도 능하였다. 흔히 아버지 심창래(沈昌來)에게 음악을 배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본인이 말한 바에 의하면 열세살부터 음악을 하였는데 제대로 배운 것은 양금 풍류밖에 없고, 그밖에는 모두 스스로 터득하였다고 한다.

특히, 가야금산조의 조율법과 가락은 모두 독자적으로 창안한 것이다. 그의 가야금 조율법은 제1현이 일반적인 조율법보다 완전4도 낮고, 제2현에서 제12현까지는 일반적인 조율법의 제1현에서 제11현까지와 같다. 그는 산조를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가락으로 즉흥연주를 하는 유일한 명인이었다.

저음역에서 시작하여 차츰 고음역으로 고조되는 형식을 즐겨 사용하고, 평조 및 경조의 우람하고 화평한 가락으로 산조에 일대 변풍을 일으켰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산조의 본청(本淸), 즉 주음을 종전의 '징'(제7현)에서 '당'(제5현)으로 완전4도 낮게 내려서 연주하였다.

광복 전 일본에서 6회의 레코드취입을 하였고, 1948년 조택원(趙澤元)무용단과 함께 3년간 미국공연을 하였으며, 1960년 국악진흥회로부터 국악공로상을 받고, 1962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았다. 한때 국립국악원 국악사도 지냈다.

이충선(李忠善, 1901~1989)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 기예능보유자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23세 때 방용현(方龍鉉)으로부터 대금삼현 및 시나위를 배웠고, 24세 때 양경원(梁慶源)으로부터 피리삼현 및 시나위를 배웠다. 35세 무렵 서울에 올라와 악사로 있으면서 정악악사 이재규로부터 피리 줄풍류 전바탕을 배웠다.
36세 때 정악원에서 정악악사 민완식(閔完植)으로부터 양금풍류 전바탕을 배웠다. 1950년대 후반 성금연(成錦鳶)과 심상건(沈相健)으로부터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1960년대 초 국립국악원 악사로 근무하며 대금산조와 피리산조를 짰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피리반주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임석윤(任錫潤, 1908~1976)

거문고 명인. 전라남도 화순출신. 호는 호석(湖石). 광주(光州)등지에서 살았다. 김용남과 김연수(金然秀)에게 거문고 풍류와 가곡을 배웠으며, 말년에는 서울에서 살면서 이주환의 가곡 반주을 도맡아 하였다. 한갑득(韓甲得)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웠는데 그 중에서 우조만 모아 자신만의 독특한 우조산조를 만들기도 했으나, 현재 임석윤의 거문고산조는 전하지 않는다.
임석윤은 거문고 대점을 비껴 타기 때문에 국악학자 장사훈과 가객 이주환은 그의 거문고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가사(歌詞)의 명인 이양교, 정경태 등은 비껴 타는 거문고대점은 음량이 작기 때문에 노래반주로 쓰일때는 나쁘지 않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임석윤은 광주풍류(光州風流) 중 거문고 연주를 담당하던 명인이다. 풍류는 영산회상의 별칭으로 구례(求禮)와 광주(光州)등지에서 동호인들에 의해 연주되던 음악이다. 광주시립국악원 원장 안치선(安致善)의 구술자료에 의하면 예전에 광주지방에는 율객(律客)들이 모여 소규모 율회(律會)를 갖고 풍류를 연주했는데 그 당시 율객으로 임석윤(任錫潤, 거문고), 오진석(吳晋錫, 대금) 정남옥(鄭南玉) 등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임석윤의 거문고풍류는 김연수(金然秀)에게서 배웠고, 그뒤 원광호(元光湖)에게 전수되었다. 원광호의 거문고 풍류는 상령산-중령산-잔령산-가락더리-상현도드리-밑도드리-하현도드리-염불-타령-군악-계면-양청-은조로 되어있다. 이 거문고풍류는 향제풍류(鄕制風流)이기 때문에 국립국악원의 아악풍류와는 다르다.

≪참고문헌≫ 전라남도국악실태조사(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0), 향제풍류(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5).

장인식(張寅湜, 1908~1980)

민족항일기와 광복 후에 활약한 거문고의 대가. 초명은 정봉(丁鳳). 서울 출신. 1922년 이왕직아악부 제2기생으로 입소하여 함화진(咸和鎭), 이수경(李壽卿)에게서 거문고를 배웠다. 사람됨이 방정하였고, 굳세고 힘찬 탄법으로 거문고에 일가를 이루었다.
이왕직 아악수, 아악수장, 아악사를 거쳐 1940년대 함화진 퇴진 후 수석아악사로서 아악사장 없는 아악부를 영도한 행정력과 아악생 교도의 공이 크다.
1947년 구왕궁아악부를 사퇴하고 재야에 묻혔으나 거문고는 종생의 반려로 하루도 놓지 않았고, 후진을 열심히 지도하기도 하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일무(佾舞) 예능보유자이기도 하였다. 특출한 제자에는 아악부원양성소출신의 김철영(金喆泳), 장사훈(張師勛), 박진규(朴珍圭), 황유봉(黃有鳳) 등이 있다.

≪참고문헌≫ 國樂入門(金琪洙, 한국고전음악출판사, 1972).

지영희(池瑛熙, 1909~1979)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이고 경기도 평택 출신이다.
중요무형문화재 23호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성금연(成錦鳶)은 그의 아내이다.
1918년에 이석은(李錫隱)에게 승무, 검무 등 여러 춤을 배웠고, 1928년에 조학윤에게서 호적(胡笛)을 배웠다.



1930년에는 정태신(鄭泰信)에게 양금, 단소, 퉁소를 배웠고, 1931년에 지용구(池龍九)에게서 해금, 풍류 시나위를 배웠으며, 양경원(梁慶元)에게 피리 삼현육각(三鉉六角)과 시나위를 배웠다.
1932년에는 김계선(金桂善)에게 대금 시나위를 배웠고, 1935년에는 지용주(池龍珠)에게 무악장단을 배웠으며, 다음해에는 박춘재(朴春載)에게 경기소리, 서도소리를 배웠다.


1937년 조선음악연구소에 입소하여 악사가 되었고, 1938년에는 한성준무용단(韓成俊舞踊團)의 반주악사로 활약하였으며, 1946년에는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국악사가 되었다. 1960년에는 국악예술학교 교사로서 유망한 신인들을 많이 길러냈다.
1966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초대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5년 해외이민으로 지정이 해제되었다.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를 통한 피리산조의 길을 열게 한 뛰어난 민속음악인 중의 하나이다.

지용구(池龍九, 1857~1938)

해금의 명인으로 경기도 수원 출신이다.
일찍이 이혜구(李惠求)는 〈시나위와 사뇌(詞腦)에 관한 시고(試考)〉에서 '전에 함 (咸)아악사장이 고 지용구옹의 해금을 비평하여 말하기를 그는 해금으로 시나위나 할 줄 알지 정악은 어떻게 한단 말이냐고 일소에 붙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야금산조로 시작된 산조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해금산조를 풀어낸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이다. 정악도 익혀 정악전습소의 풍류에도 참여하였고, 조선정악단(朝鮮正樂團)의 일원으로 줄풍류인 〈영산회상〉 연주에 참여하였다.

삼현육각인 무용반주를 담당하는 등 정악에도 어느 정도 정통하였다. 해금 이외에 장구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그의 음악은 지영희(池瑛熙)에 의하여 전승되었다. 〈굿거리〉와 〈해금시나위〉의 음반이 전한다.

한갑득(韓甲得, 1919~1987)

거문고산조의 명인으로 광주(光州) 출신이며 판소리 명창 승호(承鎬)의 형이다.
13세에 광주에서 안기옥(安基玉)으로부터 3년간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15세에는 담양에서 박석기(朴錫基)로부터 8년간 거문고산조, 줄풍류, 가곡반주를 배웠다.



23세에 서울에 올라와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1970년 후반부터 국립국악원 악사로 재직하였다.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의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음악적 재질이 뛰어나고 음악성이 높아 스승에게 배운 가락을 토대로 많은 가락을 창조하여 연주하였는데, 연주 할 때마다 신묘한 가락이 나와서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한범수(韓範洙, 1911~1984)

대금산조, 해금산조, 퉁애산조의 명인이고 충청남도 서산 출생이다.
10세 전후에 단소를 배웠고, 20세 전후하여 지방명인들로부터 대금산조를 배우다가 박종기(朴鍾基)에게 잠깐 배운 바 있다. 박종기와 한주환(韓周煥)의 대금가락을 토대로 하여 한범수류의 대금산조를 개척하였다.

1964년 이후 국립국악원의 국악사양성소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로 출강하면서 대금산조를 강의하는 한편, 그의 대금산조를 토대로 하여 해금산조를 짜서 해금산조도 강의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대금산조, 해금산조의 명인이 나왔다. 1966년에는 국악예술학교 강사로 있었다. 그는 젊어서 유동초(柳東初)로부터 퉁소시나위를 이어받아 퉁소산조도 만들었으나 후계자가 없다.

한일섭(韓一燮, 1929~1973)

아쟁과 호적산조의 명인이고 전라남도 화순출생이다.
어려서 매부인 성원목(成元睦)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며, 1947년부터 창극단 반주악사로 있었다.
1958년 한때 여성국극단의 악사장으로 있으면서 신작 창극의 작곡, 편곡으로도 유명하였다. 1962년에 아쟁산조를 처음 지어냈고, 1968년부터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한주환(韓周煥,1904∼1966)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활약한 대금산조의 명인. 그는 풍류·산조·시나위 명인이 많이 난 전라남도 화순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그 고장 명인들에게 대금풍류를 배우고, 당시 박종기(朴鍾基) 문하에 들어가 대금산조를 배웠다.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참가하여 활약하였고,1959년 임춘앵창극단(林春鶯唱劇團)에서 악사로 활약하였다. 그는 음질이나 기량이 뛰어나 박종기가 죽은 뒤 최고명인으로 꼽혔다. 그의 제자로 서용석(徐龍錫)·이생강(李生剛)이 있다. 대금산조 음반이 남아 있다.

함동정월(咸洞庭月, 1917~1995)

가야금산조의 명인으로 본명은 함금덕(咸金德)이고 함동정월은 예명이다.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에서 아버지 함일권과 어머니 박양근 사이의 2남 5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집안이 기울어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자 11세 때 광주권번에 들어가 예기(藝妓) 수업을 받았다.
그곳에서 시조, 승무, 검무와 가야금으로 영산회상을 배우고, 12세 때부터 고향인 병영으로 돌아와 김복술에게 가곡을, 김채만의 제자인 김군옥에게 판소리 중 적벽가와 흥보가를, 공장식의 제자인 임공교에게 춘향가를, 최옥산(崔玉山)을 만나 가야금 산조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7세 때 정식으로 목포 권번에 이름을 올리고 예기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때 목우암이라는 절에 가서 100일 공부를 하며 김창환의 제자인 오수암(吳壽岩)한테서 판소리 심청가와 춘향가를 배웠다.
19세 되던 해에 일본 칼럼비아레코드사가 광주에서 개최한 경연대회에 판소리로 입상한 뒤 일본 동경에 가서 판소리, 육자배기, 가야금 산조, 가야금 병창의 음반을 취입하였다.
21세에 서울에 올라와 조선권번에 이름을 올리고 예기로 활동하다 두 달 반 만에 혼인하여 17년간 음악생활을 중단하였다. 38세 때 대전에서 사설 국악원을 설립하여 가야금을 다시 시작하였다. 41세 때 다시 서울로 올라와 박초월(朴初月)이 운영하던 예술학원에서 판소리 공부를 하다가 46세부터는 정악원(正樂院)에서 11년간 영제 시조를 공부했다.


53세부터 57세까지 명고수 김명환(金命煥)과 혼인하여 함께 최옥산류 가야금산조 연주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64세 때인 198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78세에는 뿌리깊은나무 산조전집(9 LP 중 2번 음반, 함동정월 가야금 산조, 북:김명환, 1989, 1994년에 킹레코드사에서 CD로 복각됨),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병창 판소리 남도민요(컬럼비아 유성기 원반9, 1935년 녹음, LG미디어, 1996)를 녹음하였다.


여러 분야의 국악 공부를 열심히 했으므로 산조, 판소리, 가곡, 시조 등 다양하게 음악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연주자들에 비하여 스승에게 배운 가락이 완벽하여 더 첨가할 것이 없다며 그대로 연주하였다. 그래서 최옥산 가야금산조가 산조의 원형(原形)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꼽히고 있다.
험난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건강도 고르지 못하였으나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꾸준히 간직하였으며 끊이지 않고 후진에게 전수시키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홍원기(洪元基, 1922~1997)

국악인으로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서 홍성우의 5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궁내부(宮內府)에 근무했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 홍원기를 음성이 좋고 사주팔자의 3기둥에 '예(藝)'자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이왕직아악부에 입학시켜 음악의 길로 인도했다.
홍원기는 이곳에서 2년에 걸쳐 여러 악기를 두루 익혔고, 3학년 때 비로소 가야금과 성악을 전공으로 택했다. 김영륜한테서 가야금을, 이병성과 이주환한테서 가곡, 가사, 시조를 배웠으며, 가무별감을 지낸 최상욱한테서 따로 음악지도를 받기도 했다.


1941년 양성소의 5년과정을 마친 뒤,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가 되었고, 경성방송국 등의 국악 프로에 출연하기도 했다. 1946년 12월 문교부 주최 제1회 전국 음악경연대회 국악 부문에 나가 가야금으로 1등을, 시조로 2등을 수상했고, 이듬해의 경연대회에서 시조로 수석을 차지했다.
6.25전쟁 중의 부산 피난시절 국립국악원 예술사로 취직하였으나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 일로 그는 국악원과 한동안 먼 관계로 지내게 되었다. 그 후 경남 진주여중에서 국어 강사를 했고,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사범학교 국어 강사로 이어졌으며, 1960년에는 한국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1974년까지 국악개론과 시조를 가르쳤다. 1961년부터는 서울대학교, 건국대학교, 한양대학교, 경희대학교, 전남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다.
학력으로는 청운초등학교, 이왕직 아악부, 건국대학교 국문과 학사 및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송강의 장진주사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역시 건국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62년 동아일보사 주최 전국 명인명창대회에 출연했고, 1965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하여 9년 동안 작곡 담당과 악장, 지휘자 등을 지냈다. 당시 작곡한 음악으로 〈망향〉,〈회상〉,〈산장의 밤〉 등이 있다.
방송 경력으로는 일제시대 경성방송국과 해방 후 KBS방송국에서 국악 해설을 담당한 것을 들 수 있다. 문화재관리국의 청탁으로 정악가야금과 가곡을 녹음하였고, 음반으로 출반되었다. 1974년부터 국립국악원 정악 연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7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가곡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한국전통가곡진흥원을 만들어 제자들을 육성하였으며, 가곡의 보유자 후보인 김경배와 이오규, 이두원, 조용석, 김영욱, 윤중강, 김기철 등이 그의 제자이다. 1983년에 예술원 정회원이 되었고, 1985년 예술원 공로상, 19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기타
김월하(金月荷, 1918~1996)

가곡, 가사, 시조 명창으로 경기도 고양 출생이며 본명은 김덕순(金德順)이다.
1936년 서울 묘동교회 부설 묘동학원 야간부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6.25전쟁중 부산에서 이병성에게 시조를 배웠고, 1958년도부터는 이주환에게 가곡을 배웠다. 임석윤, 정운산, 이창배에게도 각각 시조 및 시창 등을 배웠다.



1968년도부터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장학 육성 사업에도 관심을 보였고, 1969년 국악협회 시조분과위원장을 거쳤고, 1970년에는 전국 시우단체총연합회를 발족시켰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여창가곡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4년부터 1981년까지 국립국악원 연주원을 역임하였으며 1991년에는 재단법인 월하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밖에 대학에서 후진들을 가르쳤고, 각종 공연 및 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통하여 여창가곡과 시조의 진수를 알렸다.
음반으로는, 1976년 〈김월하 시조집〉(힛트 레코드사), 〈한국전통음악대전집〉(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6년 〈한국의 전통가곡〉(국립국악원) 등에 그녀의 여창가곡, 가사 및 시조가 실려 있다.
국악계에 기여한 공로로, 1984년 국악대상과 세종문화대상, 1988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2년 국민훈장 보관장, 1994년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및 1995년 KBS 국악대상 특별공로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이병성(李炳星, 1909~1960)

가곡의 명창으로 호는 두봉(斗峯)이고 서울 출생이다.
고종 때의 거문고 대가인 수경(壽卿)의 아들이다. 1922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제2기생으로 입소하여 피리를 전공하였으며, 양금(洋琴)을 겸공하였다. 이주환(李珠煥) 등과 함께 하규일(河圭一)에게 가곡을 배워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1926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졸업한 뒤 아악수, 아악수장, 아악사를 역임하였다. 1939년 아악부를 퇴직하고 1950년 구왕궁아악부 촉탁과 195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를 지냈다. 1960년 국악진흥회로부터 국악상을 수상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취입한 가곡 음반 및 녹음 테이프 일부가 남아 있고 그의 가곡은 장남 동규(東圭)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다.

하규일(河圭一, 1867~1937)

근세 가곡의 거장으로 자는 성소(聖韶), 호는 금하(琴下)이다.
서울 출신으로 가곡의 명창 하순일(河順一)과는 사촌간이다. 작은아버지 하중곤(河仲鯤)에게 가곡을 배운 다음, 하중곤의 스승인 최수보(崔守甫)에게 사사하여 대성하였다.
1901년 한성소윤 겸 한성재판소 판사, 1909년 내장원(內藏院) 문부정리위원(文部整理委員), 전남독쇄관(全南督刷官), 1910년 진안군수를 역임하고, 국권상실 후 관직을 그만두고 음악에만 전념하였다.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학감(學監), 1912년 조선정악전습소 상다동(上茶洞) 여악분교실장(女樂分敎室長)을 겸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12년에는 대정권번(大正券番)을 창립하고, 1924년에는 조선권번을 창립하였다. 1926~1937년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촉탁으로 취임하면서 가곡, 가사, 시조를 전수하였다. 1928년 빅터레코드회사에서 가곡을 취입하였고, 1931년 가곡집 ≪가인필휴 歌人必携≫를 펴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가곡은 모두 그의 전창(傳唱)으로 남창가곡 89곡, 여창가곡 71곡, 가사에 〈백구사 白鷗詞〉,〈황계사 黃鷄詞〉,〈춘면곡 春眠曲〉,〈죽지사 竹枝詞〉,〈어부사〉,〈상사별곡〉,〈길군악〉,〈권주가〉의 8곡이 있다.
그리고 시조에는 평시조, 중허리시조, 지름시조 등이 있다. 계면(界面) 초수대엽(初數大葉)과 언편(言編)이 음반으로 전한다. 그의 가곡은 이병성(李炳星)과 이주환(李珠煥)을 통하여 이동규(李東圭)로 이어지고 있다.

조한춘(趙漢春, 1919~1995)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도당굿의 기예능보유자로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보유종목은 남무(男巫)이며, 1990년에 인정되었다. 경기도의 세습무(世襲巫)로 외가가 세습무 계통이다. 일찍 부친을 잃고 당시 유명한 세습무였던 의부 김종환을 따라 8세부터 도당굿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후 김포, 부평 일대의 영좌로 유명했던 이덕만에게서 굿을 배웠다. 김포 출신의 유명한 세습무녀였던 서간난(1903년생)의 사위이기도 하다. 주로 인천,부천지역을 중심으로 경기도도당굿을 하는 화랭이였는데, 마달(굿의 문서)은 풍부하지 못했으나 재담을 잘 하고 춤도 잘 추어 인기를 끌었다.


군웅굿이나 손굿, 뒷전을 할 때는 소리와 재담을 섞어서 밤을 새워 굿을 했다. 김종환으로부터는 부천시 장말을 단골판으로 인계받았고 인천시 동막도 그의 단골판이었다. 경기도도당굿의 전승이 거의 끊어져 화랭이의 역할이 줄어든 후에는 주로 악사로 활동했다.
그는 특히 장고로는 올림채에 일가견이 있었고 해금과 피리연주도 뛰어났다. 한성준(韓成俊)에게서 장고를, 양경원으로부터 피리를 배웠다고 한다. 강령탈춤의 악사로도 일하면서 해금을 연주했으나, 주로 강신무의 굿판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89호 경기도도당굿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