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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화 농장

<김병화>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단연 독보적이다. 신한촌이 극동지역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면, 강제이주 직후 중앙아시아지역 한인사회의 등대역할을 했던 곳 중의 하나가 <김병화>콜호즈(농장)(<북극성>농장)이다. 1929년 전 안드레이 등, 20여명에 의해 연해주 미하일로프카지구의 리포프카마을에 <김병화>농장의 시초인 <북극성>농장이 조직되었다. 이후 1937년 강제이주로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주 중치르칙구역에 자리를 잡은 <북극성>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1940년 김병화가 농장 대표로 선출되며 시작되었다. 늪지대를 매립하여 농지를 조성한 <북극성>농장은 2차대전기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해 내고,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하기도 했다. 1941-45년 기간에는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고, 목화와 벼 파종 면적을 약 10배까지 증가시켰다. 1946-50년 시기에는 1헥타르당 4-5톤의 쌀을,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그 결과 1948년에는 <북극성>농장에 대한 소식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들어 <북극성>농장은 재정적으로 빈곤한 타민족 농장들과 통합되며 다민족 대형복합농장으로 개편되었다.

농장대표인 김병화의 탁월한 지도력은 <북극성>농장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북극성>농장은 주력 작물인 면화 1000헥타르, 벼 300헥타르, 밀 500헥타르로, 총 1800여 헥타르의 경작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당국은 <북극성>농장의 높은 식량생산성과 김병화의 탁월한 지도력을 높게 평가하여 1948년, 1951년 두 차례에 걸쳐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내렸다. <북극성>농장의 경제적 여건은 해가 갈수록 성장했다. 경작면적은 총 2600헥타르까지 증가되었고, 1971년대에 들어서는 13개 민족, 6000명의 대식구들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으로 우뚝 섰다. 소련 최고위원회는 <북극성>농장에 1971년 노동붉은훈장을, 이듬해에는 소연방 50주년 기념훈장을 수여했다. 인구 또한 1980년에는 9,973명에 달할 정도로 <북극성>농장은 모든 부문에서 최고를 달렸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농장의 대표인 김병화가 사망했다. <북극성>농장은 우즈벡 법령에 따라 이중노력영웅의 이름을 기려 <김병화>농장으로 개칭되었다. 가상체험관에서는 이러한 <김병화>농장의 주요 건물들과 들판을 통해서 농업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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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화농장 입구
극성정
학교
공동묘지
김병화생가
기계-트랙터 관리사무소
농촌 소비에트
박물관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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