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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구

격구

[增]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기를, “장시(杖匙)【격구체】는 길이는 9치, 너비가 3치, 자루 길이는 3자 5치, 공 둘레는 1자 3치이다. 출마표(出馬標)는 치구표(置毬標)까지 거리는 50보이며, 치구표와 구문(毬門)까지의 거리는 200보이다. 구문 사이의 거리는 5보이며 쳐서 구문을 나가는 자에게 15푼을 주고, 가로질러 가는 자는 10푼을 준다.” 하였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주에 이르기를, “고려 때에 매년 단오절에 무관(武官) 연소자와 의관자제(衣冠子弟)들을 미리 뽑아 두었다가 아홉 방향으로 통하는 길옆에 용봉장전(龍鳳帳殿)을 설치하고,

장막의 앞과 좌우에 각 200보 정도 되는 길 가운데 구문을 세우고, 길 양편에는 오색 비단으로 부녀들의 막을 치고 명화의 채색 방석【毯; 음은 菼, 털방석이다.】을 꾸민다. 격구하는 자는 성대한 복장과 온갖 꾸밈을 다하여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안장 하나의 비용이 중인 10호의 재산과 맞먹었다. 두 대열로 나누어 좌우에 섰다가 기생 1인이 공을 잡고 가운데로 나아가는 중에 음악에 맞추어 길 가운데에 공을 던진다. 좌우에 있던 대오가 모두 말을 달려서 공을 다투는데, 공을 먼저 잡는 자가 수격이 되고, 나머지 모두 물러선다. 구경하는 자가 산처럼 쌓였다. 공민왕 때에 태조가 그 선발에 들어가 격구를 할 때 달리는 말이 너무 빨라서 거의 수양(垂揚)이 되었다. 공이 갑자기 돌에 부딪힌 바 되어 도리어 말 앞의 두 발 사이에 들어와 뒤 두발 사이로 나갔다.

태조가 문득 쳐다보며 옆으로 누워서 말꼬리 뒤로 가서 치니 공이 도리어 말의 앞 두발 사이에 나갔다. 다시 치며 나가니, 이때 사람들이 방미(防尾)라고 일컬었다.
또 격구를 할 때 또한 이미 수양이 되어 공이 다리 기둥에 부딪쳐 말의 왼편으로 나아갔다. 태조가 오른편 등자에서 벗어나 몸을 뒤집으면서 말을 내렸는데 발이 땅에 닿기 전에 쳐서 넣었다. 곧 말을 되돌려 다시 치고 문을 나왔다. 이때 사람들이 횡방(橫防)이라고 하였다. 온 나라가 놀라게 되어 이전에 들어본 일이 없었다.” 한다.
[案] 『별록』에 이르기를, “축국(蹴鞠)은 황제가 만든 바로 병세(兵勢)이다.”고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전국시대에 일어나 무사들을 단련하여 재주 있는 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하였다.
『한서(漢書)』의 매승(枚乘)【한나라 회음(淮陰) 사람, 벼슬은 홍농도위(弘農都尉)를 지냈다.】전 주에, “축이라는 것은 발로 차는 것이다. 국은 다룬 가죽으로서 하는 것인데 가운데에 물건을 넣어 채우고 답(蹋)을 차는 것으로 즐거운 놀이로 삼는 것이다.” 하였다.
『사기(史記)』 정의에는, “축국서에 역설편(域說篇)이 있는데 지금의 타구(打毬)이다.”라고 하였다. 『축국보(蹴鞠譜)』에는, “매 사람마다 두 번 차는 것을 타라 이름하고 두 번 끄는 것을 개(개), 크게 차는 것을 백타(白打)라 하며, 『무경(武經)』 제 18반에 무예【1궁, 2노, 3창, 4도, 5검, 6모, 7순, 8부, 9월, 10극, 11편, 12간, 13과, 14수, 15차, 16파두, 17면승․투색, 18백타】에 백타라는 것이 있다.” 하였다.
위장(韋莊)의 시에, “상상(上相; 정승)들 사이에 백타전(白打錢)을 나눈다.”는 것이 이것이다. 『풍속통(風俗通)』에는, “둥근 털을 국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삼창해고(三蒼解詁)』에는, “국은 털공으로 답희(蹋戱)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초학기(初學記)』에는, “국은 곧 구(구)자이다.” 하였다. 오늘날의 축국은 공놀이로 옛날에는 털을 사용하여 헝클어지게 얽어서 하였다. 오늘날은 가죽을 써서 포(胞)【아이가 날 때 싼 것이다. [案] 이는 곧 소의 방광을 사용하여 공의 속을 삼았다.】로서 속을 삼고 입김을 불어 막아서 차는 것이다.
중무파(仲無頗)【당나라 때의 사람】의 기구부(氣毬賦)에는, “저편에서 뛰면서 굴러서 축국을 준다. 또 어느 발로나 찬다.”고 하였다.
『몽계필담(夢溪筆談)』에는, “『서경잡기(西京雜記)』에 한나라 원제가 축국으로 일을 삼아 축국을 잘 하는 사람을 구하여서 그렇지 않은 사람은 드디어 장기놀이를 하였다”【『노학암필기(老學菴筆記)』에는 옛날에 장기판 모양은 향로와 같으니 대개 그 가운데가 솟아 올라와 있다.】고 하였다. 내가 장기 두는 것을 보니 절대 축국과 같은 종류가 아니고 흡사 격국(擊鞠)과 같은 종류였다. 대개 이 격국이라는 것은 곧 중씨의 축국이다. 중씨의 기구가 곧 심씨의 축국이다. 때문에 『상소잡기(緗素雜記)』에는, “지금은 축국으로써 격국을 삼는다 하였으니, 대개 축과 격은 한가지이다.”라고 하였다.
심존중(沈存中)은, 이에 “격국으로서 격목구자(擊木毬子)를 삼는다.” 하였다. 때문에 축국과 더불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당서』에, “단지 격구만을 일컬어 국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였다. 그 의의는 매우 명백하다. 대개 축국이라는 것은

그 흐름이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기구라는 것은 발로 차는 것이고, 격구라는 것은 말을 타고 막대기로 치는 것이다. 상소(緗素)의 의론은 다만 축, 타, 격, 국, 구가 같다는 것은 알고, 말 타고 치고 발로 차는 실상이 다르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존중의 설은 다만 그 일의 다름이 있다는 것만 지적하고 그 문장의 실상이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때문에 여러 설이 분분함이 이와 같다. 『중산시화(中山詩話)』에 이르기를, “국은 가죽으로 만드는데 털로 채워서 놀이하였는데, 만당(晩唐)에 와서는 이미 같지 않았다.”고 하였다. 같지 않다고 이르는 것은 옛날의 털공이 변하여 가죽 공이나 나무 공으로 되었고 옛날의 발로 차던 것이 변하여 말 타고 달리면서 하는 것으로 되었음을 이르는 것이다.
『섬서통지(陝西通志)』에 이르기를, “축구는 당나라 때에 시작되었는데 두 그루의 높이가 두어 발되는 대나무를 심고 그 위에 망을 치고 공을 지나가게 하였다. 공을 만드는 사람들이 문득 좌우로 패거리를 나누어서 승부를 겨루었다.” 하였다. 지금 구문은 두 나무를 세우는데 받침【跗; 발등이다】이 마치 작은 비석 같아서 홍문이라 한다. 이것은 모름지기 옛날 구문은 발등이 있었으나 중간에

그 쌍환(雙桓)【쌍으로 세워서 표하는 것이 환이다】 및 횡목유소(橫木流蘇)【『악부잡록(樂府雜錄)』에 이르기를, “궁현(宮縣)의 시렁 위에 유소(流蘇)로써 엮고 푸른 비단실로 수술을 하였다” 한다.】 등이 흩어지고 다만 그 받침만 남았을 뿐이다. 대개 축국보구문도(蹴鞠譜毬門圖)와 악학궤범포구문(樂學軌範抛毬門)【구로써 포구문을 쳐다보는 것이 풍류안(風流眼)이다.】과 꼭 같다. 그 부(跗)와 홍문은 서로 비슷하다. 또 격구하는 사람은 비색(緋色)【백적색(帛赤色)】의 철릭(貼裏)【허리 아래에 치마주름을 잡는데 세속에서는 천익(天翼)이라 한다.】이라는 것을 반드시 좌우 패거리 중의 한 패가 입었는데 한 패거리의 복장은 전하지 않는다. 『송사』에 타구공봉관(打毬供奉官)이 있는데, 왼편은 자색 수를 놓은 옷을 입고 오른편은 비색 수놓은 문양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다.
『송사』 예지(禮志)에, “태종이 타구의(打毬儀)를 정하였다. 황제가 말을 타고 뜰에 당도하자 내시가 금합(金盒)을 열어 붉은 칠을 한 공을 꺼내어 궁전 앞에 던졌다.”고 하였다.
『금사』 예지에, “국장(鞠杖)은 길이가 두어 발이나 되고 그 끝은 언월(偃月)과 같으며, 공 모양은 적은 것이 주먹 같아서 가볍고 단단한 나무로써 그 속을 텅 비게 하여 붉은 칠을 한다.”고 하였다.

[案] 오늘날 제도에 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나무 공에 붉은 칠을 한 것으로 곧 위에서 지칭한 원둘레가 1자 3치인 것이고 또 하나는 모구(毛毬)로 싸리나무 기구를 가죽으로 싼 것으로서 큰 것은 수박과 같으며, 이른바 기구라는 것과 같다. 위에 고리 하나를 더 달고 실로 꿰매었는데 말 타고 끌고 가면 촉이 없는 화살로 뒤따르면서 쏜다.
대개 옛날에는 축구와 타구는 있었으나 사구(射毬)와 예구(曳毬)는 없었다. 『금사』 예지에 이르기를, “사류격구(射柳擊毬)의 놀이는 요나라 풍속이다. 단오날에 배천례(拜天禮)를 마치고 구장에 버드나무를 꽂아 싸매어서【음은 맥(陌), 『正字通』에 홍초(紅綃; 붉은 생사)와 말액(抹額)은 군사의 모습이다. 】 그 가지를 표시하고【識은 志와 통하는데, 기록한다는 뜻이다.】 땅에서 약 두어치까지 그 껍질을 베껴서 희게 한다. 한 사람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면 뒤에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깃이 없고 촉이 가로질러져 있는 화살을 쏜다.”고 운운하였다. 고려 격구 또한 단오날에 행하였는데 어찌 사류가 변하여 사구가 되었겠는가. 중무파의 부에 이르기를, “ 나무에 올렸는데 허자(許子)의 표주박【『일사전(逸士傳)』에 이르기를, ‘허유(許由)가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니 어떤 사람이 표주박을 하나 주었다. 그 표주박으로 물을 마시고 나무 위에 걸어 두었더니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가 났다. 허유는 번잡하다고 하여 버리고 가버렸다.’ 하였다.】이 처음 걸렸으니 어찌 동여매는 것이 있었으리요.”【격(繳); 노끈을 주살에 매어 새를 쏘았다.】 하였다.

승목(升木) 사용이 오르내리는 것이었겠는가.
또 『용비어천가』 주에 태조대왕이 늘 목구를 만들었는데 큰 것은 배만하였다. 사람을 50~60보 밖에서 올려보며 던지게 하고 나무살촉【樸頭; 나무 화살촉과 화살대】으로 쏘았는데 늘 적중하였다. 사구(射毬)의 글이 비로소 이곳에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나무공이지 가죽공이 아니니 그 풍속이 변화된 까닭으로【선(嬗)과 선(禪)은 통한다. 가의(賈誼)의 복부(服賦)에, ‘형기(形氣)가 바뀌고 계속 변화되어서 선이 되었다’ 하였다.】 가히 자세하지 않다.
일찍이 격구를 잘하던 늙은 금군에게 들으니 늘 나무 공을 유구통에 넣어 두고 공을 따라 콩을 뿌리고 말이 먹게 함으로써 말이 오랜 동안 공에 익숙하여져 그 공을 들에 던지면 말이 그 공을 보고 분주히 따라가서 공을 치니, 기세를 올리거나 내리거나 갑자기 꺾거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두보(杜甫)는 진조부(進雕賦)에, ‘신이 지은 글을 올리는데 침울하고 기세가 꺾였다.’고 하였다.】.
사구법은 중간에 실전되었고, 오늘날 피구와 화살은 모두 군기시(軍器寺)에 있다.

격구보

[增] 처음에 말을 기아래 내몰 때 장으로써 비스듬히 말목에 두어 말귀와 더불어 가까이 두는 것을 일러 비이(比耳)라 하고

장으로써 말의 가슴에 대는 것을 일러 할흉(割胸)이라 하고

몸을 기울여 우러러보고 누워 장으로써 말꼬리에 비김을 이르되 방미(防尾)라 하고

달려서 공이 흩어진 곳에 이르러 장 안쪽으로 비스듬히 공을 당기어 높이 일어나게 함을 이르되 배지(排至)라 하고

장의 바깥 편으로써 공을 밀어 당기어 던짐을 지피(持彼)라 하고,
또 이르되 도돌방울(挑鈴)이라 하니 인하여 비이(比耳)로써 왼편으로 돌아 또 할흉하고, 두 번째 방미하고, 다시 공을 던진 곳에 이르러 다시 공을 당김을 이르되 구를방울(轉鈴)이라 한다. 이같이 하기를 세 번하고 이에 달리고 쳐서 구를 행하라.

세 번 돌기를 비록 마치나 지세가 오목하게 빠져 가히 구를 행하지 못함이 있으면 혹 네 번, 혹 다섯 번 돌아도 또한 해롭지 않다. 구를 행하는 처음에 놓지 아니하고 비이로써 혹 두 번 하며 혹 세 번 하라.

비이한 후에 손을 들었다가 놓아 쳐 손을 높이 들고 아래로 드리워 양양함을 이르되 수양수(垂揚手)라 하는데, 수양수는 정한 수가 없으니 구문에 나가는 것으로 한도를 삼아라. 공을 던진 후에 헛 수양수를 하고, 또 방미를 하고, 또 비스듬히 공을 끌어들여 수양수로써 홍문을 향하여 던져 바로 들어 가거든, 인하여 공을 좇아 문으로 나가 헛 수양수로 공을 둘러 세 번 돌아 한번 공을 끌어내어 도로 홍문으로 들어와 도청(都廳) 장막을 지나면 북을 울린다. 인하여 비이로써 달려 말이 나오던 곳으로 돌아 와 마치라.

혹 비이할 때 수양수를 미처 못하여 공이 이미 문에 나갔거든 곧 구문 안에서 헛 수양수를 하고, 또 구문 밖에서 역시 헛 수양수를 하고, 혹 공이 구문 앞에 이르러 그치고자 하거든 다시 치고 달려 구문으로 나감이 또한 해롭지 아니하다.

구장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