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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의 역사

삼국시대 이전의 자수

우리나라 전통자수의 기원을 확실히 알수는 없으나, 청동기시대 유물 가운데 오늘날의 바늘과 같은 구실을 한 것으로 보여지는 석침(石針), 골침(骨針)등이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삼국지(三國志) 부여전(扶餘傳)에 보면 부여사람들이 회(繪), 수(繡), 금(錦), 계(罽)로 지은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수’는 천위에 여러 가지 색깔로 수놓은 비단을 말한다. 이것으로 부여시대에 이미 비단에 수를 놓아 옷을 지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자수

부족국가가 통합되어지고 발전되어지면서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나라가 고대국가로 정립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복식을 달리 등급을 매긴 것을 볼 수 있다. 즉 지배층의 권위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의복을 금이나 은으로 장식하거나 의복에 수를 놓기도 한 것이다. 이로써 수는 우리의 의복문화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고, 지배층 귀족들의 화려함에 대한 욕구는 수의 기법과 문양을 더욱 세련되게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자수

통일신라는 호국불교를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한 국가이다. 넓은 영토와 막강한 재력으로 풍요로워진 통일신라 문화는 신라 초기의 소박하고 검소한 풍조가 사라지자, 귀족들 사이에 사치풍조가 성행하게 되고, 문화가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사치가 극도로 심해지자 문무왕, 애장왕, 흥덕왕이 복식금령을 내리게 되었다. 복식금령의 내용에는 금수(金繡)로 불공하는 것, 승마용구, 주렴, 병풍등에 수놓는 것을 금한 것을 볼수 있다. 왕실과 지배층의 비호를 받아 불교문화가 융성해져서 불교자수가 발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자수

통일신라시대의 귀족적인 색채를 벗어나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으며 일반 대중에게까지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예술과 문화에서 그 소재나 주제에 불교적인 색채가 많이 담기게 되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이나 고려사(高麗史)등의 문집을 보면 고려시대의 자수는 일상생활에 많이 활용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자수

숭유억불정책을 국시로 삼은 조선은 청빈을 숭상하는 유교정신으로 소박하고 단아한 멋을 추구했다. 이는 의복과 수에서도 나타난다. 즉, 신분에 따라 엄격한 차이를 둔 의복은 화려함이 경계의 대상이었고, 수 또한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며 내적인 미를 추구한 작품이 많았다. 조선시대의 자수는 크게 궁중에서 필요하여 생산되는 궁수와 사대부 이하 일반 민가에서 생산되어진 민간수로 나눌 수 있다. 현존하고 있는 자수유물을 복식자수, 생활자수로 나눌 수있다. 조선시대 전기의 자수는 여러 국난과 자수소재가 섬유인 까닭에 많이 소실되어져 조선시대 후기 자수 유물을 토대로 복식자수와 생활자수로 나눌 수 있다.
공주, 옹주의 대례복중 궁중예복인 활옷은 복식자수의 대표라 할 수 있다. 모란, 연꽃, 학, 나비, 문자문, 기하문등 여러 종류의 문양이 여러 기법으로 수놓아져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침구류와 수저집, 골무같은 생활자수에서는 박쥐문, 호접문 등이 놓여진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