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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연표

독도의 역사를 이해하고 아는 것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하는 매우 중요한 기초자료이다.
일본의 독도 관련 기록과 우리나라의 기록을 비교하여 일본의 모순점을 알리고, 역사적 근거에 따른 독도의 내력을 소개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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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대 이전
연 대 자 료  기 타
512년
(지증왕 13)
한국 6월 신라 하슬라주(何瑟羅州: 현재의 강릉)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정벌. 『삼국사기』에 우산국은 명주(溟州 正東)의 해도(海島)로 울릉도(鬱陵島)라 불리기도 했다고 기록, 『삼국유사』에는 같은 기사에 ‘于陵島(今作羽陵)’라고 기록.
출전: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3년조, 권44 열전4 이사부전/『삼국유사』 권1 기이제1 지철로왕조.
 
930년
(고려 태조 13)
한국 8월 우릉도(于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고려에 보내 조공(朝貢)을 바침에 따라 백길에게 정위(正位), 토두에게 정조(正朝)의 관계(官階)를 하사함.
출전: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13년조.
 
1004년
(목종 7)
일본 고려의 번도인(藩徒人) 우릉도(芋陵島) 사람들이 인번(因番)에 표류. 고려 번도 가운데 신라국의 우류마도인(宇流麻島人)이 이르렀다고 언급.
출전: 『대일본사』 권234 열전5 고려조, 『대일본사』 제2편 5, 관홍(寬弘) 원년 3월 7일조
 
1018년
(현종 9)
한국 11월 우산국(于山國)이 동북 여진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폐(廢)하게 되었으므로, 이원구(李元龜)를 파견하여 농기구를 보냄.
출전: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9년조.
우산국은 울릉도를 가리킴.
1019년
(현종 10)
한국 7월 여진의 침략으로 인해 본토(반도)로 도망한 우산국 사람들(于山國民戶)을 모두 돌아가도록 명령함.
출전: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0년조.
 
1022년
(현종 13)
한국 7월 여진의 침략을 받아 본토로 피해 도망간 우산국사람(于山國民)들을 예주(禮州: 현재의 경북 영덕군)에 정착하게 함.
출전: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3년조.
 
1032년
(덕종 1)
한국 11월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 래조(來朝)하고 토산물을 헌상함.
출전: 『고려사』 권5 세가5 덕종 원년조.
 
1141년
(인종 19)
한국 7월 명주도 감창사(溟州道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울릉도(鬱陵島)로 사람을 보내 특이한 과실 열매와 나뭇잎을 채취하여 헌납함 .
출전: 『고려사』 권17 세가17 인종 19년조.
 
1157년
(의종 11)
한국 5월 땅이 넓고 비옥하여 사람이 살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우릉도(羽陵島)에 명주도감창 전중내급사(溟州道監倉 殿中內給事) 김유립(金柔立)을 보내 조사케 하였으나, 토지에 암석이 많아 거주가 어렵다고 아뢰어 의논을 정지함.
출전: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11년조.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11년조, 『신증동국여리승람』 울진현부 우산도울릉조.
 
1197년
(명종 27)
한국 최충헌이 울릉도의 토지가 비옥하고 진귀한 나무와 해산물이 많다고 하여 주민들을 거주케 하려고 하다가 풍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자, 주민들을 다시 되돌아오게 함.
출전: 『증보문헌비고』 권31 여지고19 울진부 우산도울릉도조.
 
1243년
(고종 30)
한국 최이(崔怡)가 울릉도(鬱陵島)에 주민을 이주시켰다가 후에 익사자가 많이 생겨 이주 정책을 포기함.
출전: 『고려사』 권129 렬전42 반역 3 최충헌부 최이전
 
1246년
(고종 33)
한국 5월 국학 학유(國學學諭) 권형윤(權衡允)과 급제(及第) 사정순(史挺純)을 우릉도 안무사(芋陵島 安撫使)로 임명.
출전: 『고려사』 권23 세가23 고종 33년조.
 
1259년
(원종 1)
한국 7월 울진현령 박순(朴淳)이 부인과 노비, 재산을 배에 싣고 울릉도로 들어가려다가 실패함.
출전: 『고려사』 권25 세가25 원종 원년조.
 
1273년
(원종 40)
한국 원(元)이 이추(李樞)를 파견하여 대목(大木)을 요구하였으므로, 2월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허공(許珙)을 울릉도 작목사(蔚陵島 斫木使)로 임명하여 함께 가게 함. 고려의 요청으로 벌목은 곧 중지됨.
출전: 『고려사』 권27 세가27 원종 40년조, 『고려사』 권130 렬傳43 반역4 조이(趙彛)부 이추전.
 
1346년
(충목왕 2)
한국 3월 동계(東界)의 우릉도인(芋陵島人)이 조공을 바침.
출전: 『고려사』 권37 세가37 충목왕 2년조.
 
1379년
(우왕 5)
한국 7월 왜가 무릉도(武陵島)에 들어와 15일 동안 머물다가 물러감.
출전: 『고려사』 권136 열전49 반역6 신우(辛禑) 1.
 
  한국 혹은 말하기를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는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 볼 수 있다.
출전: 『고려사』 권58 지리지 울진현조.
『고려사』 지리지는 1451년에 완성됨.
독도(우산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
1400년대
연 대  자 료 기 타
1403년
(태종 3)
한국 8월 (강원도)관찰사의 장계를 따라 강원도 무릉도(江原道 武陵) 거주민을 육지로 나오게 함.
* 왜가 강릉, 우릉(羽陵) 등을 자주 침략하자 이를 방비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됨.
출전: 『태종실록』 권6 8월 병신조.
울릉도를 공도(空島)로 만듦
1407년
(태종 7)
한국 3월 대마도 수호(對馬島守護) 종정무(宗貞茂)가 조선에 평도전(平道全)을 보내, 포로를 송환하고 토물(土物)을 바치며 무릉도(武陵島)에 이주하여 사는 것을 요청하였으나 남재(南在) 등의 건의로 이를 거절함.
출전: 『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경오조.
 
1412년
(태종 12)
한국 4월 강원도 관찰사가 유산국(流山國) 사람 백가물(白加勿) 등 12인이 고성 어진에 와서 무릉도에 가옥이 11호, 남녀 60여명이 살고 있다고 고하였다고 아룀.
출전. 『태종실록』 태종 12년 4월 기사조.
유산국은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임
1416년
(태종 16)
한국 9월 삼척인 전만호(三陟人 前萬戶) 김인우(金麟雨)를 무릉 등지의 안무사(武陵等處 安撫使)로 임명하여 거주민을 조사하여 본토로 돌려보내게 함. 호조참판 박습(朴習)이 무릉도의 둘레가 7식(息)이고 옆에 소도(小島)가 있다고 아룀.
출전: 『태종실록』 권32 태종 16년 9월 경인조.
소도가 독도인지 명확하지 않음.
1417년
(태종 17)
한국 2월 안무사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토산물과 주민 3명을 데리고 돌아와 섬에 15호 86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보고. 우산무릉도(于山武陵)에 주민의 거주를 금지시키고 거주민을 색출하여 섬에서 내보내기로 최종 결정됨.
8월 왜가 우산무릉(于山武陵)을 노략질함.
출전: 『태종실록』 태종 17년조.
우산도, 우산무릉도는 모두 울릉도를 말하는 것으로 보임.
1419년
(세종 1)
한국 세종이 본토로 귀환시킨 무릉도민 17명이 경기 평구역리에 도착하였으나 식량이 떨어져 구휼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음.
출전: 『세종실록』 권3 세종 원년 4월 을해조.
 
1425년
(세종 7)
한국 8월 김인우(金麟雨)를 우산무릉등처의 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로 파견하여 김을지(金乙之) 등 28명의 도민을 찾아 본토로 귀환시키게 함.
10월 우산무릉 등처의 안무사 김인우가 남녀 20명을 잡아오니, 충청도의 깊은 산군(山郡)에 정착시키고 3년간 세금을 면제시켜 주기로 함.
11월 무릉도에 들어갔다가 강원도 선군(船軍)들이 배가 난파당하여 일본에 표착.
12월 무릉도에 들어갔다가 풍랑을 만나 난파당하여 일본에 표착하였던 장을지(張乙之)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옴.
출전: 『세종실록』세종 7년조 .
 
1429년
(세종 11)
한국 12월 봉상시윤(奉常寺尹) 이안경(李安敬)을 강원도에 보내어 요도(蓼島)에 대해서 살펴보게 함.
출전: 『세종실록』 권46 세종 11년조.
요도(蓼島)는 울릉도를 부르는 다른 명칭일 가능성이 높음.
1430년
(세종 12)
한국 1월 봉상시윤 이안경이 요도를 살펴보고 돌아오니, 함길도 관찰사에게 요도(蓼島)의 지형과 주민의 생활에 대해서 다시 조사하게 함.
4월 상호군(上護軍) 홍사석(洪師錫)과 전농윤(典農尹) 신인손(辛引孫)을 각각 강원도와 함길도에 보내어 요도(寥島)를 찾아보게 함.
출전: 『세종실록』 권47, 48 세종 12년조.
 
1432년
(세종 14)
한국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 편찬.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에 ‘우산(于山), 무릉(武陵) 두 섬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데,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라고 기록. 이는 1454년(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그대로 실림.
출전: 『세종실록』 권153 지리지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
우산도는 독도, 무릉도는 울릉도를 말하는 것임.
1436년
(세종 18)
한국 윤6월 강원도 관찰사 유계문(柳季聞)이 무릉도우산(武陵島于山)에 주민을 모으고 만호(萬戶)와 수령(守令)을 설치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출전: 『세종실록』 권73 세종 18년조.
무릉도우산은 울릉도를 말하는 것임.
1438년
(세종 20)
한국 4월 전 호군(前護軍) 남회(南會)와 전부사직(前副司直) 조민(曹敏)을 무릉도순심경차관(茂陵島巡審敬差官)으로 임명. 7월 남회와 조민은 남녀 66명과 토산물을 가지고 돌아옴.
7월 무릉도는 본래 사람이 거주하는 곳으로 옛날부터 왕래가 있었으나 양양의 동쪽에 있다고 알려진 요도(蓼島)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으니 조사하라고 지시함.
출전: 『세종실록』 권81, 82, 세종 20년조.
* 본래 무릉도와 요도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사람들이 울릉도를 요도라고도 부르면서 혼란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됨.
 
1445년
(세종 25)
한국 8월 강원도 관찰사에게 요도(蓼島)를 찾는 자에게 포상할 것을 명하고, 또 남회(南會)를 보내 찾게 했으나 실패하였음.
출전: 『세종실록』 권82 세종 25년 8월 무오조. .
 
1451년
(문종 1)
한국 『고려사』 지리지 완성, 1454년 편찬.
지리지 울진현조에 ‘우산과 무릉 2도에 관한 기록이 나옴.
 
1454년
(단종 2)
한국 『세종실록』 지리지 완성.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 ‘ 우산과 무릉 두 섬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볼 수 있다’라고 기록됨.
 
1457년
(세조 3)
한국 7월 왜가 무릉도(武陵島)에 들어와 15일 동안 머물다가 물러감.
출전: 『고려사』 권136 열전49 반역6 신우(辛禑) 1.
 
 1470년
(성종 1)
한국 국왕이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이계손(李繼孫)에게 삼봉도(三峰島)에 부역을 피해서 도망가서 사는 자들을 탐문하도록 명령함.
출전: 『성종실록』권8 성종 원년 12월 갑인조.
삼봉도는 울릉도의 다은 명칭임.
1471년
(성종 2)
한국 강원도 관찰사 성순조(成順祖)에게 무릉도에 몰래 들어가 사는 자를 색출하도록 명령함.
출전: 『성종실록』 권11 성종 2년 8월 정사조.
 
1472년
(성종 3)
한국 2월 병조(兵曹)에서 강원도의 삼봉도(三峯島)를 찾기 위한 절목(節目)을 올림.
4월 삼봉도(울릉도)의 주민들을 수색하여 본토로 귀환시키기로 결정하고,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으로 박종원(朴宗元)을 파견함.
6월 강원도 관찰사 이극돈이 5월 28일 울진포를 출발한 박종원 일행이 대풍을 만나서 박종원이 탄 배는 6월 6일 간성군으로 돌아왔고, 사직 (司直) 곽영강(郭永江) 등 나머지 3척은 5월 29일 무릉도(武陵島)에 도착하여 섬을 수색하고 6월 6일 강릉 우계현(羽溪縣)으로 돌아왔다고 아룀.
8월 정승 정인지 등이 삼봉도 수멱(搜覓:찾아서 조사하는 것) 사항을 토의하여 결정하고, 병조에서 「삼봉도수멱사목안(三峰島搜覓事目案)」을 작성함. 사목안은 6가지 사항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삼봉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찾아서 본토 귀환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이었음.
출전: 『성종실록』 권15, 17, 19. 성종 3년조.
 
1473년
(성종 4)
한국 1월 영안도 관찰사 정난종(鄭蘭宗)에게 삼봉도(三峯島)와 그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알려진 요도(?)에 대해서 조사하게 함.
출전: 『성종실록』 권26 성종 4년 정월 경자조.
당시에 요도의 실체를정확하게 알수 없던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임.
1476년
(성종 7)
한국 2월 종성인 김한경(金漢京) 등이 경원에서 울릉도를 향해 출발하여 삼봉도(三峰島)에 이르렀으나 상륙은 하지 못하고 거기에 사람들이 거주한 것을 보았다고 종성의 친순위 노의순(盧義順)에게 보고함.
6월 김한경(金漢京) 등이 삼봉도(三峯島)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므로, 영안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게 사람을 보내 수색해 보게 함.
10월 영안도 관찰사가 영흥사람 김자주(金自周)가 9월에 삼봉도를 보고 형상을 그려왔다고 아룀.
출전: 『성종실록』 권4 성종 7년조.
 
1477년
(성종 8)
한국 관원을 파견하여 삼봉도를 수색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관원들이 삼봉도 포기를 건의하여 수색대를 파견하지 않음.
출전: 『성종실록』 성종 8년조
 
1479년
(성종 10)
한국 10월 경차관 신중거(辛仲据) 참석 하에 국왕과 더불어 삼봉도 정토(征討)를 논의함. 삼봉도 옆에 작은 섬이 있고 2호가 주거하고 있다고 보고함.
윤10월 영안도 경차관(永安道敬差官) 조위(曹偉)가 김한경(金漢京), 김자주(金自周) 등 21명을 10월 27일 삼봉도(三峯島)로 들여보냈음을 보고함. 이들은 삼봉도를 찾아갔다가 역풍을 만나 실패하고 돌아옴.
출전: 『성종실록』 권110 성종 10년조.
 
1480년
(성종 11)
한국 2월 삼봉도 초무사(三峯島招撫使)의 직책을 피하려 한 상호군(上護軍) 정석희(鄭錫禧)와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 박종원(朴宗元)을 귀양 보냄. 5월 삼봉도 초무사(三峯島招撫使) 심안인(沈安仁)을 삼봉도(三峯島)로 가게 하였으나 풍수(風水)가 불순(不順)하여 그것을 중지하게 함.
출전: 『성종실록』 권114, 권117 성종 11년조.
 
1481년
(성종 12)
한국 영안도 관찰사 이극돈의 건의에 따라 삼봉도를 수색하는 방책을 수립함.
출전: 『성종실록』 12년 1월 계미조.
* 『동국여지승람』간행, 1531년 증보.
「강원도 울진현 산천조」에 “우산도(于山島), 울릉도(鬱陵島)<혹은 무릉(武陵), 우릉(羽陵)> 두 섬은 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으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 봉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이고 바람이 잔잔하면 아틀 만에 도달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우산·울릉이 원래 하나의 섬이었고 넓이가 1백리였다.”라고 하였음.
참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5 강원도 울진현 산천조.
우산도는 독도를 가리키는 명칭임.
1486년
(성종 17)
한국 『동국여지승람』 권35 발간 지도에 우산도(독도) 표기.  
1499년
(연산군 5)
한국 『동국여지승람』 「강원도도」에 우산도·울릉도 표기.  
1600년대
연 대  자 료 기 타
1614년
(광해군 6)
한국 지봉유설에서 ‘울릉도는 일명 무릉(武陵), 일명 우릉(羽陵)으로 동해 가운데 있어 울진현과 상대하고 있으며, 섬 가운데큰 산이 있고, 토지의 크기가 100리다. … 임진왜란 후 사람들이 들어가 본 일이 있으나, 근자에 들어 왜구가 노략질하여 정착하지 못하고 쫓겨 나왔다’라고 언급함.
출전: 『지봉유설(芝峰類說)』 권2 지리부 도(島) 울릉도조. 6월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동래부(부사 윤종겸)에게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분부로 의죽도(磯竹島: 울릉도)의 크기와 지형을 살피고자 하니 길을 안내해 달라고 청함. 의죽도를 울릉도가 아닌가 하여 서계를 올린다고 아룀. 이에 예조는 거절하는 서계를 보냈음.
출전:『변례문집(邊例文集)』 권17 갑인 6월조. 9월 비변사에서 『여지승람』에 본도(울릉도)는 우리나라에 속해 있으며, 방물을 거두었고, 주민들을 소개시킨 일 등의 근거가 있으니, 장차 이러한 일이 있으면 회답서계(回答書契)에 이와 같은 사실을 모두 들어 문책하여 일본의 간교한 계책을 그만두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함. 이에 정부는 경상감사와 동래부사에게 지시문을 내려 왜인의 래거(來去)를 금지한다는 뜻을 대마도주에게 전하도록 조치하였음.
출전: 『광해군일기』 권82 광해군 6년 9월 신해조, 『변례집요』 권17 잡조(잡조) 부 울릉도조.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의죽도로 불렀음을 알려주는 자료임.
일본 경장(慶長) 19년(갑인년, 614년) … 이 즈음 의죽도(磯竹島)를 일본 땅이라고 하였다. 이해 7월에 저( 선) 나라 동래부사 윤수겸이 (도주) 종의지(宗義智) 공에게 회답한 문서가 있다. 거기에 윤수겸이 이른바 의죽도는 우리나라(조선) 울릉도이다라는 말로 회답한 것이었다.
출전: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5, 경장(慶長) 19년조.
1617년
(광해군7)
일본 대곡(大谷)·촌천(村川) 두 사람이 미자성(米子城), 근번아배정지(勤番阿倍正之)에게 울릉도 도항허가를 신청함. 대곡심길(大谷甚吉)이 풍파를 만나 울릉도에 표착함.
출전: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竹島渡海由來記拔書控)』
 
1618년
(광해군 8)
일본 송본신태랑(松本新太郞)을 통해 대곡, 심천 두 사람이 죽도 도항 허가를 받음.
출전: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
 
1656년
(효종 7)
일본 대곡, 심천 두 사람이 정식으로 막부(幕府)로부터 송도(松島) 도항 허가를 받음.
출전: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
송도는 울릉도로 추정됨.
1667년
(현종 8)
일본 은주(隱州)는 북해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은기도(隱岐島)라고 말한다.… 북서쪽으로 2일(日) 1야(夜)를 가면 송도(松島)가 있다. 또 1일 거리에 죽도(竹島)가 있다(속언에 기죽도<磯竹島>라고 말하는데, 대나무와 물개가 많다. 신서<信書>에서 말한 소위 50맹<猛>일까 의심이 든다). 두 섬은 무인도인데, 고려(조선)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은주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 경계는 이 주로서 경계를 삼는다.
출전: 재등풍선(齋藤豊仙)『은주시청사기(隱州視廳舍記)』.
일본 고도서 가운데 독도를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문서이고, 일본인들이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입증해주는 자료라고 주장하는 것임. 여기서 송도는 독도, 죽도는 울릉도를 말함.
1681년
(현종 7)
일본 대곡이 송평(松平)으로부터 죽도의 출어(出漁) 허가를 받고, 송도(독도)에 해록(海鹿)이 있다고 보고함.
출전: 『대곡구곡위문승신수기(大谷九谷衛門勝信手記)』, 『대곡구곡위문승신 청서』
 
1692년
(현존 19)
일본 일본 어민이 울릉도에서 조선어민을 만났다고 보고함
출전: 『죽도칠개조반답서(竹島七個條返答書)』.
 
1693년
(숙종 19)
한국 안용복(安龍福) 1차 도일(渡日). 3월 동래와 울산의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와 충돌했는데, 일본인들이 안용복과 박어둔(朴於屯)을 꾀어 은기도(隱岐島)로 납치해 감. 안용복은 은기도주(隱岐島主)에게 자신들을 잡아온 이유를 따지고, 다시 백기주 태수(伯耆州 太守)를 만나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므로 일본인의 울릉도 왕래를 금해줄 것을 요구함. 백기주 태수는 막부에 보고하고, 이를 준수하겠다는 서계(書契)를 안용복에게 전달함.
출전: 『숙종실록』 권26 및 30 숙종 19년 11월 정사조, 계유조, 숙종 20년 2월 신묘조, 『변례집요』 권17 잡조(雜條) 부 울릉도, 『오주연문장잔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권35 「울릉도사실변증설(鬱陵島事實辨證說)」, 『여암전서(旅菴全書)』 권7 강계고(疆界考). 11월 대마도주가 안용복과 박어둔을 일본영토를 침입했다는 죄명을 씌워 조선으로 송환함. 대마도주는 죽조(竹島: 울릉도)는 일본 땅이므로 조선인의 출입을 막아달라는 서계(書契)를 함께 보냄.
12월 접위관(接慰官) 홍중하(洪重夏)가 동래 왜관(倭館)으로 내려와 왜사(倭使) 귤진중(橘眞重)을 만남.
출전: 『숙종실록』 권26, 『변례집요』 권17 잡조 부 울릉도조, 『오주연문장전산고』 권35 「울릉도사실변증설(鬱陵島事實辨證說)」, 『여암전서』 권7 강계고.
 
일본 대곡(大谷), 촌천(村川) 두 상인이 1693년에 외국 사람 2인을 데리고 돌아왔다고 언급. 죽도는 일본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고, 한토(漢土: 조선)와는 가까우며 경내가 매우 넓은 섬으로 묘사함.
출전: 『백기민담기(伯耆民談記)』 「대곡촌천죽도도해진퇴지사(大谷村川竹島渡海進退之事)」.
대마도주가 조선어민의 죽도 출어를 금지시켜 줄 것을 요청함.
출전: 『삼국통람(三國通覽)』 권137.
1694년
(숙종 20)
한국 2월 접위관(接慰官) 홍중하(洪重夏)가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며, 죽도는 귀국의 경계 내에 있는 것’이라는 내용의 회답서(回答書)를 왜사(倭使) 귤진중(橘眞重)에게 전달함. 왜사가 회답서에서 조선의 영토라고 언급한 울릉도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음. 사관은 일본의 서계에 대한 회답서에서 죽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언급한 것을 비판함.
출전: 『숙종실록』 권26 숙종 20년 2월조. 7월 전무겸선전관(前武兼宣傳官) 성초형(成楚珩)이 울릉도에 진(鎭)을 설치하자고 건의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출전: 『숙종실록』 권26, 27 숙종 20년 7월조, 『변례집요』 권17 잡조 부 울릉도조. 8월 대마도의 왜사 귤진중이 2월에 받아간 회답서계를 가지고 와서, 울릉도에 관한 문구의 삭제를 다시 요청함. 조정에서는 일본의 간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로 함. 이에 이미 보낸 회답서의 내용을 고치기로 하고 유집일(兪集一)을 접위관으로 임명하여 동래 왜관으로 내려 보내는 한편, 장한상(張漢相)을 삼척첨사(三陟僉使)로 삼아 울릉도로 파견하여 사정을 살펴보게 함.
유집일은 안용복으로부터 실상을 알아낸 후, 남구만은 왜사를 꾸짖고 울릉도와 죽도는 하나의 섬에 붙여진 두 이름이며,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다. 안용복을 납치한 것은 명백한 침섭(侵涉)이자 구집(拘執)임을 천명하고 일본인의 울릉도 내왕을 금지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2차 회답서를 전달함. 왜사가 회답서의 ‘침섭’, ‘구집’이라는 말을 고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함.
장한상은 9월 19에 출발하여 10월 6일에 삼척으로 돌아옴. 남구만이 주민의 거주보다는 정기적으로 수토관(搜討官)을 파견할 것을 건의하자, 숙종이 이를 받아들임.
장한상은 「울릉도사적」에서 섬의 사방을 배를 타고 돌아 보았다. … 동쪽으로 5리 되는 곳에 하나의 작은 섬이 있는데, 심하게 높거나 크지 않다. 바다 장죽이 총총히 나 있다. 비가 걷히고 안개가 걷힌 날 중봉에 올라가니, 남북 양봉이 서로 바라보며 솟아 있어 소위 삼봉이다. 서쪽을 바라보니, 대관령의 구불구불한 형상이 보이고, 동쪽을 바라보니, 바다 가운데 섬이 하나 있는데, 동남쪽 깊숙이 있다. 그 크기는 울릉도의 삼분의 일이고, 거리는 불과 3백 여리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하였음.
출전: 『숙종실록』 권27 숙종 20년 8월조, 『변례집요』 권17 잡조 부 울릉도조, 울릉도사적(蔚陵島事蹟).
 
일본 「교린고략고죽도일건사고(交隣高略告竹島一件事考)」에서 왜사(倭使)와 조선 조정 사이에 발생한 울릉도와 죽도(독도)를 둘러싼 분쟁 내용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 ‘원록(元祿) 8년(1695) 가을에 우리 노사군(老使君: 宗義眞)이 동무(東武)에 입조(入朝)하여 보고하였는데, 이에 집정이 노사군에게 명령하기를 “죽도는 바다 가운데 있어 일본은 멀고 조선은 가까우니, 지금부터 우리나라(일본) 어선의 왕래를 굳게 금지시키고, 곧 이뜻을 조선에 알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다음해 원록 9년(1696) 봄에 노사군이 강호로부터 임지로 돌아가 곧 역관을 불렀고, 같은 해 겨울에 하동지(下同知)와 송판사(宋判使)가 와서 노사군 면전에서 예조의 서신을 동도(東都)에 전달하도록 부탁하였다. 원록 12년(1699) 기묘년 봄 3월에 노사군이 문서로써 예조에 회답했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상관(象官)이 바다를 건너온 날에 대면하여 죽도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였고, 이로 인해 좌우에서 그 사정을 잘 양해함으로써 두 나라가 길이 우호를 통하게 되고 더욱 성의를 다하게 되었으니, 지극히 다행한 일입니다. 보여주신 뜻을 이미 전달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비류총병위(阿比留摠兵衛)가 이 문서를 가지고 바다를 건너 왜관 관수(館守)로 하여금 동래부에 전달하게 하여 죽도에 관한 일건은 끝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695년
(숙종 21)
한국 대마도주 종의진(宗義眞)이 동래에 상서(上書)하여 울릉도에 관한 4개조가 사실과 다르다고 하면서 답변을 요구함.
출전: 『숙종실록』 권30 숙종 12년 6월 경술조.
일본이 죽도(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자, 조선정부가 이에 항의하였음. 이에 대하여 막부가 죽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는 서한을 조선에 보냈던 것이다.
일본 일본 덕천관백(德川關白)이 조선의 항의에 대하여 대마도주 종의진을 통하여 출어금지의 공한(公翰)얼 전달하였음
출전: 『조선통교대기』 권8 「선린통교사고」, 권8 「고죽도일건사고」.
1696년
(숙종 22)
한국 1월 일본막부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 금지를 결정함.
8월 안용복(安龍福) 2차 도일(渡日). 재차 일본에 가서 울릉도문제를 담판짓고, 강원도 양양현(襄陽縣)으로 돌아온 안용복을 잡아 가둠. 안용복은 평산포(平山浦) 사람 이인성(李仁成) 등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子山島-于山島)를 거쳐 일본 백기주로 들어가 울릉 자산 양도 감세(鬱陵子山兩島監稅)라 가칭하고, 태수에게 전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따짐. 백기주 태수는 울릉도·독도지역을 침범한 일본인들을 처벌하였고, 안용복에게 ‘두 섬은 이미 조선에 속했고, 다시 침범하는 자가 있거나, 대마도주가 함부로 침범할 경우 엄벌에 처하겠다’고 약속함. 안용복은 막부에 대한 상소를 취하하고 강원도로 돌아옴.
출전: 『숙종실록』 권30 숙종 22년조.
자산도는 우산도의 다른 표기로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됨.
일본 다음 해 병자년(1696) 정월에 풍수후(豊守後)가 훈시하기를 ‘죽도가 인번주(因幡州)에 속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주한 적이 없고, 치덕군(治德君: 德川秀忠) 때 미자(米子) 마을의 어민이 그 섬에 고기잡이를 하겠다고 출원했기 때문에 그것을허락하였던 것이다. 지금 그 땅의 지리를 헤아려 보건대 인번주와의 거리는 160리쯤이고, 조선과의 거리는 40리쯤이어서 일찍이 그 나라 땅이라는 것이 의심이 없을 것 같다.
출전: 『조선통교대기』 권8
1697년
(숙종 23)
한국 1월 동래부사 이세재(李世載)가 대마도에서 온 왜사로부터, 막부(幕府) 덕천관백(德川關白)이 죽도가 조선의 영토이고, 왜인의 출어를 금지시킨다고 명령하였다는 내용을 통보받고, 대마도주 종의방(宗義方)의 노고를 치하하는 서계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함. 이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비변사의 건의로 죽도가 조선의 영토임은 당연하고, 서계는 보낼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림.
3월 안용복의 공을 인정하여 사형시키지 않고, 귀양 보냄.
4월 3년에 1번씩 울릉도에 수토관(搜討官)을 파견하기로 함.
출전: 『숙종실록』 권31 숙종 23년조, 『승정원일기』 숙종 23년 4月 13일조, 『변례집요』 권17 잡조 부 울릉도조.
 
1699년
(숙종 25)
한국 7월 강원도 월송만호(越松萬戶) 전회일(田會一)이 울릉도(鬱陵島)를 수토하고 지도와 토산물을 바침. 숙종 24년에 영동지방의 흉년으로 수토관을 파견하지 못했으므로 3년 1회 수토가 정식화된 후 처음으로 파견된 것임.
출전: 『숙종실록』 권33 숙종 25년조.
 
일본 일본국 대마도주 습유(拾遺) 평의진(平義眞)이 예조판서에게 서한을 보내, 울릉도에 관한 조선측의 입장을 막부의 장군에게 보냈음을 알렸다.
출전: 『죽도기사(竹島紀事)』권5 『북사(北史)』 왜전에 죽사국(竹斯國)磯죽도(竹島)·아소산(阿蘇山)이 나와 있으니, 죽도는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섬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헌조(憲朝: 德川康吉) 때 조선에서 ‘조선의 땅이다’라는 것을 말해왔으므로 죽도를 조선에 주었다고 한다. 헌묘의 어진 정치로 인해 주었다고는 하지만 영토는 작은 것이라도 아껴야 하는 것이므로 유사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출전: 『초로잡담(草盧雜談)』상, 죽도.
→ 『북사』에 죽도 등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인이 울릉도를 조선에 주었다는 불만을 토로한 글일 듯싶다.
1700년대
연 대  자 료 기 타
1700년
(숙종 26)
한국 정상기(鄭尙驥)가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하고, 처음으로 우산도를 울릉도 밖에 표기하였음.  
1702년
(숙종 28)
한국 5월 삼척영장(三陟營將) 이준명(李浚明)이 울릉도(鬱陵島)를 조사하고 지도와 토산물을 바침.
출전: 『숙종실록』 권36 숙종 28년 5월 기유조.
 
1744년
(영조 20)
한국 예조정랑 이맹휴(李盟休)가 『춘관지(春官志)』 편찬함. 「울릉도 쟁계(爭界)」에서 울릉도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록들을 정리하여 기술하였음.  
1751년
(영조 27)
일본 1751~1763년 『죽도도설(竹島圖說)』 발간. 여기서 ‘은기국(隱岐國)은 송도(松島)로부터 해상으로 약 40리 쯤 떨어진 북쪽의 섬으로 이름을 죽도(竹島)라고도 한다. 이 섬은 일본에 접해 있고, 조선에 가깝다. 지형은 삼각이고, 주위는 약 15리 쯤 된다’라고 기술함. 죽도는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1769년
(영조 45)
한국 10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건의로 문적(文蹟)을 널리 모아 울릉도에 관한 책자를 만들기로 함. 제조 원인손(元仁孫)에게 명하여 삼척영장을 지낸 자와 더불어 울릉도의 지형과 물산을 그리게 함.
출전: 『영조실록』 권113 영조 45년조.
 
1775년
(영조 51)
일본 장구보적수(長久保赤水)가 제작한 「일본여지노정전도(日本輿地路程全圖)」에서 죽도(울릉도), 송도(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시함. 죽도와 송도, 한일 경계선을 표시한 최초의 지도임.
1779년
(정조 3)
    D'Anvill 「조선도」에 Fan Ling Tao와 Tchian Chan Tao 표기.
La Perose 「조선근해도」에 울릉도를 나타냄.
1785년
(정조 9)
일본 임자평(林子平)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三國通覽輿地路程全圖)」, 「삼국접양도(三國接壤圖)」, 「대일본지도」에서 조선을 황색, 일본을 녹색으로 표시하였는데, 울릉도와 독도는 황색으로 표시하여 조선의 영토임을 명백히 함. 울릉도, 독도 부분에 조선의 영토라고 표기.  
1787년
(정조 11)
    프랑스 라·페루스함대가 울릉도를 발견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됨, 이 섬을 다즐레라고 명명함.
1789년
(정조 13)
    영국 탐험대 James Colnett가 울릉도를 발견하고 측량을 잘못하여 다즐레섬과 별도의 섬으로 생각. 섬의 명칭을 Argonaut섬이라고 명명함.
1791년
(정조 15)
    James Colnett가 「조선근해도」에 Argonaut섬을 표시함.
1792년
(정조 16)
한국 여지고(輿地考)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于山)은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곧 왜가 말하는 송도(松島)이다’라고 함.
출전: 『증보문헌비고』
 
1800년대
연 대  자 료 기 타
1801년
(순조 1)
일본 오끼 제도(諸島)로부터 송도(松島)는 서쪽으로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2일 2야 가야 되며, 도법 36정 1리로서 해상의 행정은 170리 정도 생각된다. 산이 험저한 형태를 띠었다고 하며, 토지의 리수는 5리 3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다.
출전: 『장생죽도기(長生竹島記)』
 
1846년
(헌종 12)
한국 김대건의 「조선전도」에서 울릉도를 Oulando로, 독도를 Oasando로 표기함.  
1848년
(헌종 13)
    4월 17일 미국 포경선 체러키(Cheroke)호가 독도를 발견함(북위 37도 25분, 동경 132도 00분).
출전: 포경선 체러키호 항해일지
1849년
(헌종 15)
    프랑스의 배 리앙쿠르호가 독도를 발견하고, 독도를 Lincourt Rocks라고 명명함.
1853년
(철종 4)
    프랑스 해군성이 편찬한 「태평양도」에서 독도를 북위 37도 동경 130˚ 53´(파리기점)으로 표시함.
3월 18일 미국 포경선 윌리암 톰슨(William Thompson)호가 독도를 발견(북위 37도 19분, 동경 133도 9분), ‘세개의 바위(3 rocks)를 보았다’고 기록함.
출전: 포경선 윌리암 톰슨호 항해일지
1854년
(철종 3)
    4월 6일(러시아 구력) 푸쟈친 제독이 지휘하는 러시아 극동 원정대 4척 중 하나인 올리부차호가 마닐라에서 타타르 해협으로 향하던 중 독도를 발견함. 서도는 섬을 발견한 함정의 이름을 따서 ‘올리부차’로, 동도는 올리부차호의 최초 함정 이름이었던 ‘메넬라이’로 명명되었고, 두 섬은 조선의 영토로 파악됨. 독도에 관한 울리부차호의 탐사내용은 바스토크호의 울릉도 관측내용 및 팔라다호의 조선 동해안 측량내용과 함께 러시아 해군지(海軍誌) 1855년 1월 호에 실려 1857년 러시아 해군이 작성한 「조선동해안도」의 기초자료가 됨.
출전: 「올리부차호 항해일지(1854)」, 「러시아 해군지(1855)」, 「일본 해군성 수로국의 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圖)」(1876).
1855년
(철종 4)
    4월 25일 영국함대가 독도를 발견, 함정 이름을 따서 호넷(Hornet)으로 명명함.
출전: 영국의 수로잡지(Nautical Magazine)(1856), 프랑스 해군성의 수로지(1856년판, 제11권).
1867년
(고종 4)
일본 승해주(勝海舟) 의 「대일본해륙전도」에서 독도의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고 리앙쿠르라고 명명함.  
1870년
(고종 7)
일본 일본 외무성에서 파견한 좌전백모(佐田白茅) 등이 조선을 내탐한 후에 「조선국교제시말탐서(朝鮮國交際始末探書)」를 작성. 여기서 ‘이 건의 송도는 죽도의 인접 섬으로서 송도의 건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게재된 사류(書留)는 없다. 죽도의 건에 대해서는 덕천막부시대에 잠시 조선으로부터 거류를 빌렸다가 돌려준 바 있다. 당시는 이전과 같이 무인(無人)으로 되어 있었다’라고 기록함.
출전: 『일본외교문서』제3권 사항6.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를 가리킨다도 보임.
1875년
(고종 12)
한국 8월 도장(島長)의 명칭을 도감(島監)으로 고치고, 직급을 판임관으로 하여 배계주(裵季周)를 초대 도감으로 임명함.
출전: 『고종실록』 고종 32년 8월 16일조.
 
일본 11월 일본육군 참모국이 조선전도를 작성, 이 지도에는 독도가 송도(松島)로 표기되어 실림으로써, 독도를 죽도(竹島:울릉도)와 함께 조선 영토로 보고 있었음을 알려줌.
출전: 일본육군 참모국의 「조선전도」
1876년
(고종 13)
일본 일본 해군 「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圖)」를 작성함. 이 지도는 1857년 러시아 해군이 제작한 지도를 저본으로 하여 재발행된 작전지도인데,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부속도서로 표기한 것이 특징적임.
10월 16일 일본 국토의 지적(地籍)을 조사하고 근대적 지도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시마네현에서 내무성으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킬지의 여부를 내무성에 질의. 내무성은 이에 대하여 약 5개월간에 걸쳐 시마네현에서 올라온 부속문서와 원록 연간 안용복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교섭한 관계문서들을 모두 조사해 본 후, 죽도와 송도는 조선의 영토로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내림.
무등평학(武藤平學)이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를 일본 외무성에 제출, 해군성이 1878년 4월과 9월 군함 천성환(天城丸)을 파견, 송도의 실체에 대해 조사한 결과 송도가 조선의 ‘울릉도’로 판명되어 무등의 송도개척지의(松島開拓之議)가 각하됨.
 
1877년
(고종 14)
일본 3월 17일 내무성은 죽도(울릉도)외 1도(송도: 독도)가 일본과 상관없지만, ‘판도의 취사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이유로 국가최고기관 태정관(太政官)에게 질품서를 부속문서들과 함께 올려 최종 결정을 요청함.
3월 20일 일본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은 ‘품의한 취지의 죽도외일도(竹島外一島)의 건에 대하여 본방(本邦)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필득(心得)할 것’이라는 지령문을 작성하고, 3월 29일 내무성으로 지령문을 보냄.
4월 9일 일본 내무성은 태정관의 지령문을 시마네현으로 보냄.
출전: 『공문록(公文錄)』 내무성지부(內務省之部)1 명치(明治) 10년조, 「태정관지령문서(太政官指令文書)」.
 
1878년
(고종 15)
일본 장기현(長崎縣) 하촌윤팔랑(下村輪八郞)과 천엽현(千葉縣) 제등칠랑병위(薺藤七郞兵衛)의 송도개척원(松島開拓願)에 대하여 외무성 당국이 일본 조야의 학자들에 자문한 결과, 이를 각하하였음.
4월 군함 천성환(天城丸)이 송도를 측량 조사함.
출전: 총본명의(塚本明毅)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
 
1880년
(고종 17)
일본 9월 군함 천성환(天城丸)호가 측량한 후에 송도는 옛날의 울릉도이고, 그 북방의 소도인 죽도(竹島)라고 부르는 곳이 있으나 일개 암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함.
출전: 「천성함의 송도순시 보고서」.
 
1881년
(고종 18)
한국 울릉도(鬱陵島)에 일본인 7명이 잠입하여 벌목하다가 수토관(搜討官)에게 발견되었으므로, 강원도 관찰사 임한수(林翰洙)가 계(啓)를 올려 대비책을 강구할 것을 청함. 5월 22일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계언(啓言)에 따라 이에 대한 서계(書契)를 일본 외무성에 보내게 하고, 부호군 이규원(副護軍 李奎遠)을 울릉도 검찰사(鬱陵島檢察使)로 임명함.
12월 울릉도 개척령 발포함.
출전: 『승정원일기』 고종 18년 5월 22일조, 『일성록』 고종 18년 5월 22일조, 『고종실록』 권18 고종 18년조.
 
일본 일본 어민의 울릉도 침탈에 관해 조선정부가 일본정부에 엄중 항의함.
8월 일본 외무대신 상야경절기고(上野景節起稿)의 사과문과 재조선일본공사관 외무 2등속관 부전절(副田節)의 사과문을 모두 접수하였음. 7월 일본 북택정성(北澤正誠) '죽도고증(竹島考證)'을 작성하고 이를 요약한 '죽도판도소속고(竹島版圖所屬考)'를 일본 외무성에 제출함. 일본은 1880년 군함 천성(天城)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현지조사를 하는 한편, 북택정성으로 하여금 울릉도, 독도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게 하였음. 이 보고서는 지금의 송도는 원록(元祿) 12년(1699)의 죽도 즉, 울릉도로서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림. 그리고, <참고>항에 ‘울릉도 외에 죽도가 또 있지만, 아주 작은 소도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독도에 관한 내용을 부가함.
출전: 죽도고증(상중하), 죽도판도소속고 12월 15일 외무성이 북택정성(北澤正誠)의 보고서를 검토한 후에 일본인의 울릉도 도벌(盜伐)을 인정하여 일본인의 쇄환(刷還) 사실을 통보함
출전: 『구한국외교문서』 제1권 「日人ノ鬱陵島 渡航禁止ノ件」.
1882년
(고종 19)
한국 4월 7일 고종이 울릉도 검찰사(鬱陵島檢察使) 이규원(李奎遠)에게 울릉도(鬱陵島) 근방에 있다는 우산도(芋山島)와 송도(松島) 죽도(竹島)에 대해서 특별히 잘 살피고, 울릉도에 고을을 설치하기 위해서 지도와 별도의 보고서(別單)를 상세히 작성할 것을 당부함.
이규원이 울릉도를 감찰하고, 본국인 140명, 일인 78명이 있다고 보고함.
출전: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4월 7일조, 『일성록』 고종 19년 4월 7일조, 『고종실록』 권19 고종 19년조. 6월 5일 울릉도검찰사 이규원이 고종에게 울릉도 감찰 결과를 보고함. 그는 4월 30일 울릉도에 도착하여 5월 2일부터 10일까지 조사한 뒤 13일 평해 구산포(平海 邱山浦)로 돌아왔다고 아뢴 다음, 설읍(設邑)이 가능하며, 나리동(羅里洞)이 적합하다고 건의함. 또한 조사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나무를 도벌하고, 표목(標木)을 세워 송도(松島)라고 하고 있는 것을 적발하였므로, 이를 일본공사와 외무성에 항의하기로 함.
출전: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6월 5일조, 『일성록』 고종 19년 6월 5일조, 『고종실록』 권19, 이규원(李奎遠)의 『울릉도검찰일기』 「계본초(啓本草)」. 6월 예조판서가 이규원의 보고에 따라 일본 외무성에 일인의 쇄환을 재차 요구함. 8월 20일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계언(啓言)에 따라, 울릉도에 도장(島長)을 차송(差送)케 함. 검찰사 이규원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에 거주하고 있던 함안사람 전석규(全錫奎)를 도장에 임명함.
출전: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8월 20일조, 『비변사등록』 고종 19년 8월 20일조, 『고종실록』 권19, 이규원의 『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 9월 12일 박영효가 제물포조약 비준 시에 일본 외무경에게 일본인의 울릉도 불법 침입과 불법벌채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함. 10월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의 울릉도 벌목 금지를 촉구함.
 
1883년
(고종 20)
한국 3월 16일 김옥균(金玉均)이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등사사(東南諸島開拓使兼捕鯨等事使)로 임명됨.
출전: 『고종실록』 권20, 21 고종 20년조. 4월 김옥균이 전력을 기울인 결과, 울릉도에 첫 이주민 16호 54명이 들어옴.
7월 조선 정부에서 울릉도에 들어온 첫 이주민의 정착상황을 조사함.
출전: 『승정원일기』 고종 20년조, 「광서(光緖) 9년 4월 일 울릉도개척시선격량미잡물용입가량성책(鬱陵島開拓時船格糧米雜物容入假量成冊)」, 「광서 9년 7월 일 강원도울릉도신입민호인구성(江原道鬱陵島新入民戶人口姓)」.
 
일본 4월 일본해군수로국 『환영수로지(?瀛水路誌)』를 발간함. 제2권 「조선국일반정세」에서 독도(リヤコ-ルト 列岩)를 소개함으로써,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스스로 밝힘.
출전: 『환영수로지』 제2권(일본 해군수로국, 1883. 4). 지방장관을 통하여 울릉도 도항금지를 통달함.
3월 1일 태정대신(太政大臣)의 이름으로 ‘울릉도도항금지령’을 시달함.
9월 일본 내무성이 관원과 순사 31명을 울릉도에 보내, 불법침입한 일본인 254명을 완전 쇄환함.
출전: 『일본외교문서』 제16권
1884년
(고종21)
한국 1월 11일 동남제도개척사 김옥균이 울릉도장 전석규(鬱陵島長 全錫奎)가 일본인과 담합하여 울릉도의 목재를 일본으로 반출시키고 있다고 장계함에 따라 전석규를 압송하기로 함.
출전: 『승정원일기』 고종 21년 1월 11일조, 『일성록』 고종 21년 1월 11일조, 『비변사등록』 고종 21년 1월 6일, 11일조, 『고종실록』 권21.

3월 15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울릉도(鬱陵島) 재개척에 있어 먼저 관수(官守)를 설치하고 그 후에 백성을 모집하여 땅을 개간하자고 계언(啓言)함에 따라 강원도 관찰사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고 삼척영장으로 하여금 울릉도첨사를 겸하게 함.

6월 30일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계(啓)에 따라 평해군수(平海郡守)가 울릉도첨사(鬱陵島僉使)를 겸하게 함.
출전: 『승정원일기』 고종 21년 3월 15일조, 『일성록』 고종 21년 3월 15일조, 6월 30일조, 『고종실록』 권21.
 
1886년
(고종 22)
일본 일본정부는 송도(松島) 문제에 관하여 일본의 학자들에게 의견을 청취하였음.  
1888년
(고종 25)
한국 2월 6일 내무부(內務府)의 계청에 따라 울릉도에 도장을 다시 설치하고 평해군 월송포에 만호진을 신설, 월송진 만호(平海郡越松鎭萬戶)로 하여금 울릉도장(鬱陵島長)을 겸임하게 하고, 왕래하며 검찰케 함.
출전: 『승정원일기』 고종 25년 2월 7일조, 『일성록』 고종 25년 2월 7일조, 『고종실록』 권25 고종 25년 2월 6일조.
 
일본 울릉도에 있는 일본인 쇄환(刷還)을 위하여 천성함(天城艦) 파견함.
1889년
(고종 26)
한국 10월 조선정부가 일본 공사관에 울릉도감 피습에 항의함.  
일본 일본인 180명이 배계주 울릉도감을 피습함.
1894년
(고종 31)
한국 12월 27일 울릉도가 이미 개척되었으므로, 수토에 필요한 자원의 조달을 위한 ‘울릉도수토선격십물(鬱陵島搜討船格什物)’을 영구히 혁파함. 이때 처음 전임도장제(傳任島長制)를 실시함.
출전: 『고종실록』 권32 12월 27일조, 관보 개국 503년(1894, 갑오) 12월 27일조.
 
1895년
(고종 32)
한국 1월 29일 울릉도 수토정책(鬱陵島 搜討定策)이 이미 철폐되었으므로, 내무대신(內務大臣) 박영효(朴泳孝)의 상주(上奏)에 의해 월송만호(越松萬戶)가 겸하고 있던 울릉도장(鬱陵島長)을 별도로 임명하고, 매년 수차례 배를 보내어 도민의 피고(疾苦)를 살피게 함.
8월 16일 내부대신(內部大臣) 박정양(朴定陽)의 주청에 따라 울릉도(鬱陵島)에 도장(島長)대신 도감(島監)을 설치하기로 함.
9월 20일 울릉도 사람 배계주(裵季周)를 울릉도감(鬱陵島監)으로 정하고, 판임관(判任官) 대우를 하기로 함.
출전: 『승정원일기』 고종 32년 1월 29일조, 『일성록』 고종 32년 1월 29일조, 『고종실록』 권33, 관보 개국 504년 1월 29일조.
 
1896년
(고종 33)
한국 9월 러시아가 두만강 유역 및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강탈해감.
출전: 『내부거래안』 제2권 건양 원년 9월 19일조.
 
1898년
(광무 2)
한국 5월 30일 칙령 제12호(5월 26일)로 울릉도감(鬱陵島監) 설치를 반포함. 도감은 본토인으로 임명하고, 판임관(判任官) 대우를 함.
출전: 『고종실록』 권37, 관보 제962호 광무 2년 5월 30일.
 
일본 7월 배계주가 일본에 건너가 시마네(島根)·조취(鳥取)의 경찰에게 일본인의 울릉도에서의 불법행위 단속을 요구하는 동시에 송강(松江)지방 재판소에 일본인을 도벌(盜伐)과 절취죄(截取罪)로 고소함.
출전: 『외무성기록』 「本邦人ノ渡航?在留取締ノ件」
배계주의 고소에 대해 일본검사는 ‘본방(本邦)의 다수 사람이 울릉도에 가서 그 세력이 도민을 억압하고 폭행하는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무정부상태이다’라고 언급함.
1899년
(광무 3)
한국 5월 배계주가 울릉도도감에 재임명되고, 총세사(總稅使) 백탁안(柏卓安: J.B. Brown)에 부탁하여 부산항 세무사 나보득(羅保得: E.Faporte)과 더불어 울릉도로 함께 들어감.
‘일본인 수백가구가 촌락을 스스로 형성하고 선박을 운행하고 목재를 연속하여 실어 나르며 곡물과 물자를 몰래 무역을 하고 자의로 폭행을 일삼아서 도민들이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보고함.
9월 15일 외부대신이 일본공사에게 울릉도를 침입한 일본인을 기한을 정해 쇄환(刷還)하고, 불통상항구(不通商港口)에서의 밀수상황을 조사하여 처벌하여 후폐(後弊)를 영구히 없앨 것을 요구함.
출전: 『황성신문』 1899년 9월 16일조, 『내부거래안』 제12책 광무 3년 9월 15일조 「조회보13호」
10월 대한제국 정부는 9월 22일자 일본공사의 답변에 의거하여 내부관원 우전정을 책임자로 조사단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일본과 합동조사를 실시하여 일본인의 잠월문제(潛越問題)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로 함.
12월 19일 일본인의 도벌과 횡포가 계속되므로, 내부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의 주청으로 울릉도(鬱陵島)에 시찰위원(視察委員)을 파견하기로 함. 시찰위원에는 우용정(禹用鼎)이 임명됨.
출전: 『고종실록』 권39, 관보 제1448호 광무 3년 12월 19일.
 
일본 8월말에 일본정부는 러시아의 벌목금지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재류 울릉도 일본인의 철수를 위하여 원산영사관 상융겸삼(商雄謙三)을 울릉도로 파견함.
9월에 5월 배계주의 보고에 따라 일본정부는 마야호(摩耶號) 선장 송본유신(松本有信)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일본인의 동태를 조사함.
9월 22일에 9월 15일자의 대한제국 외무대신의 요구에 대해서는 ‘일본인의 불법행위가 있다면 조일수호조규에 의거하여 영사에게 공문으로 보내는 것이 순서이며, 원산항에 정박중인 경비함에 영사관원들을 탑승케 하여 조사하도록 했으나 풍랑으로 조사를 하지 못하였으며, 불통상항구에서의 밀수문제는 지방관의 직권이므로 지방관이 철수하도록 지시하면 될 것으로 사료된다고 답변함.
농상무성(農商貿省) 수산국장 목박진(牧朴眞)이 조선연안을 시찰한 후에 「조선해통어조합연합회(朝鮮海通漁組合聯合會)」를 설립함.
일본정부는 「원양어업장려법」을 실시함.
출전: 「배계주승소판결문」, 『내부거래안』제12책 광무 3년 9월 22일조.
1900년대
연 대  자 료 기 타
1900년
(광무 4)
한국 5월 31일 울릉도시찰위원 우용정과 부산 주재 일본영사관보 적총정보(釜山駐在日本領事館補 赤塚正補) 등 한·일 양국의 조사단이 울릉도에 도착하여, 6월 5일까지 일본인의 비행과 재목 도벌 및 세금징수 여부에 대해 조사하고, 도내의 실정과 도세를 파악함.
6월 15일 우용정이 돌아와 보고서를 제출하고, 일본인의 조속한 철수와 울릉도 관제의 개편을 건의함.
10월 27일 칙령 제 41호(10월 25일)를 반포하여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바꿈으로써, 강원도의 27번째 군으로 지방관제(地方官制)에 편입됨. 칙령에 의하면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하고, 울도군수(鬱島郡守)의 관할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조(竹島: 댓섬), 석도(石島:독도)로 한다고 명시함.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였으므로, 현임도감 배계주(裵季周)가 초대군수가 되었으며, 울릉군을 남면과 북면으로 나눔에 따라 독도는 울릉군 남면에 속하게 됨.
출전: 우용정(禹用鼎)의 『울도기(鬱島記)』와 보고서, 『고종실록』 권40, 관보 제1716호 광무 4년 10월 27일.
독도를 석도(石島)라고 표기하였음.
일본 6월 일본정부는 일본인의 쇄환문제에 대한 논의요구에 복명서(復命書) 미제출을 이유로 지연시킴.
9월 초순에 6월 22일자 대한제국정부의 일본인쇄환요구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일본인의 울릉도재류는 귀국 도감의 종용 때문이며 도민의 불가결한 요소이고, 도감운운은 도감의 의뢰나 합의 매매이며, 일본인의 무역은 울릉도민의 희망에 따른 것이며, 장차 도감이 수출입세를 징수할 예정으로 알고 있다고 답변하였음.
출전: 『내부거래안』제13책, 광무 4년 8월 27일조.
1901년
(광무 5)
한국 2월 울릉도에 학교 설립.  
일본 12월 일본정부는 일본 경찰관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주재토록 하는 계획을 추진함
출전: 일본 외무성 기록 「鬱陵島ニ於ケル伐木關係雜件」, 「鬱陵島在留民取締ノ爲ノ警察官派遣ノ件上申」.
1902년
(광무 5)
일본 중정양삼랑(中井養三郞)이 죽도(竹島: 독도)에서 해려어업(海驢漁業)을 시작함.
3월 일본정부가 울릉도에 일본경찰주재소를 설치함. 경부(警部) 1명, 순사(巡使) 3명 주재함.
미국 New York호가 독도를 측량하여 미수로부 고시 제43호에 게재됨.
1904년
(광무 8)
한국 2월 10일 일본 러시아에 선전포고.
2월 23일 「제1차 한일의정서」 강제조인. 이로써 일본은 러일전쟁을 위해 한국영토를 임의로 점령, 사용할 수 있게 됨.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 강제조인. 일본 대한제국의 정부내에 재정과 외교고문을 설치함.
출전: 관보 호외 광무 8년 3월 8일.
2월 러일전쟁 시작.
5월 18일 러시아의 울릉도 삼림채벌권 폐기. * 일본인들은 시마네현고시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영토이던 독도를 국제법상의 형식에 맞추어 영유의사를 확인하여 공시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음.
일본 9월 1일 러시아함대의 감시를 위해 울릉도 서북부와 동남부에 설치한 망루(동남, 동북 2곳, 배원<용인 포함> 각 7명)가 준공됨(9월 2일 업무개시).
9월 24일에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는 것이 가능한지 조사하기 위해 이전에 일본군함 신고호(新高號)가 울릉도를 출발하였는데, 신고호는 독도에 대해 ‘리앙꼬루도岩은 한인은 이를 독도(獨島)라고 쓰고 본방(일본) 어부들은 양고도(리앙고도)라고 호칭’하며, 망루설치가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함.
9월 29일 일본 어민 중정양삼랑(中井養三郞)이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하고, 자신에게 빌려 달라’(리앙꼬島領土編入?貸下願)는 청원서를 외무성, 내무성, 농상무성에 제출함.
9월 30일에 울진군 죽변과 울릉도 사이의 해저전선을 완공함.
11월 13일 일해군 군령부가 대마호(對馬號)에게 리앙쿠르도가 전신소 설치에 적합한가를 조사하도록 지시함.
11월 20일 대마호가 독도에 도착함.
출전: 『극비명치37~38년해전사(極秘明治三十七八年海戰史)』, 「군함신고전시일지(軍艦新高戰時日誌)」, 『시마네현지(島根縣誌)』(1923), 『은기도지(隱岐島誌)』(1933), 「군함대마전시일지(軍艦對馬戰時日誌)」.
1905년
(광무 9)
한국 9월 5일 러일강화조약(포츠머드조약) 체결, 한국에서의 일본의 특수권익이 열강에 의해 인정됨.
11월 17일 일본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 박탈함.
황현,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에서 일본이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한 사실을 기록함.
 
일본 1월 28일 일본 각의(閣議)에서 중정양삼랑(中井養三郞)의 청원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독도는 주인없는 무인도(無主地)로서, 다케시마(竹島)라 칭하고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은기도사(隱岐島司)의 관할하에 둔다’고 결정함.
2월 15일 내무대신이 ‘독도가 시마네현 소속임을 내용으로 하는 「훈령 87호」를 시마네현에 보냄.
2월 22일 「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에서 리앙쿠르도를 죽도(다께시마: 竹島)로 명명하고 은기도사의 소관으로 한다고 명시함.
5월 17일 일본 독도를 관유지(官有地)로서 시마네현 토지대장에 등재함.
5월 30일 울릉도에 북망루를 설치하여 무선전신소를 설치하는 내용의 설비계획안을 해군대신에게 제출함.
6월 12일 교립호(橋立號)에게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는 방안을 조사하도록 지시함.
6월 13일 일본군함 교립호가 독도의 망루 설치 방법에 대해 조사하고 돌아가서 동도를 망루설치지역으로 천거함.
7월 16일 울릉도 북망루 준공(8월 16일부터 업무 개시, 배원<용인포함> 11명 재류).
8월 19일 일본 독도 망루 준공(준공일부터 업무 개시, 배원 4, 용인 2명).
10월 8일 울릉도 북망루와 독도 망루 사이에 해저전선 부설.
11월 9일 독도와 일본 시마네현 마쯔에(島根縣 松江) 사이에 해저전선 부설.
출전: 추록촌역장본(秋鹿村役場本) 「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회람용), 「교립전시일지(橋立戰時日誌)」, 『극비명치37~38년해전사』.
1906년
(광무10)
한국 2월 1일 통감부(統監府)와 통감 휘하의 이사청(理事廳)이 업무를 개시, 대한제국은 일본 통감의 지배하에 들어감.
3월 28일(음력 3월 4일) 시마네현(島根縣) 제3부장 신서유태랑(神西由太郞)과 은기도사(隱岐島司) 동문보(東文輔) 등이 울도(鬱島)를 방문하여 울도군수 심흥택(鬱島郡守 沈興澤)에게 독도가 일본영토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고 함. 이에 심흥택은 다음 날 강원도 관찰사 서리인 춘천군수 이명래(江原道觀察使署理春川郡守 李明來)에게 ‘본군소속 독도…’로 시작되는 긴급보고서를 올렸으며, 이명래는 4월 29일 이 내용을 내부와 의정부에 보고함. 이 보고에 대해 내부대신 이지용은 ‘독도를 일본속지라고 칭하는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니, 지금 이 보고한 바가 심히 아연할 일’이라 하였고,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議政府參政大臣 朴齊純)은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며,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의 동향을 다시 조사해 보라’는 지령을 보냄.
9월 24일 울도군(鬱島郡)을 강원도로부터 경상남도로 이속시킴.
출전: 『각관찰도안』 제1책, 광무 10년 4월 29일조 보고서호외, 지령 제3호, 구한국관보 3570호 부록(광무10년 9월 28일 금요일) 칙령 제4.
이 해에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 사항을 조선정부에 알렸지만,외교권을 박탈당하여 이렇다할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음.
일본 5월 17일 독도를 일본의 토지대장에 등재함.
6월 15일 중정양삼랑(中井養三郞) 등 3인에게 해려(海驢) 포획을 허가함.
4월 30일 시마네현 지사(知事)가 죽도(독도)의 장기 차용과 지선수면(地先水面)의 전용면허를 신청함.
1907년
(융희 1)
한국 울릉도 및 독도의 관할권을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이관함.  
일본 8월 17일 독도는 시마네현으로부터 해군기지로 인계됨.
1908년
(융희 2)
일본 8월 군함 송강호(松江號)가 독도를 실측함.  
1909년
(융희 3)
일본 은기(隱岐)에 독도를 관할하는 도청(島廳)을 둔다는 칙령을 반포함.  
1910년 한국 8월 27일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방함.  
1920년 한국 상해임시정부 초대의장 석오(石吾) 이동녕은 이해 3·1절 기념식에서 ‘1905년 일본이 강제로 독도를 빼앗아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시킨 조치는 부당한 처사’라고 천명.  
1926년 일본 독도의 관할이 은기도사(隱岐島司)에서 시마네현(島根縣) 은기청(隱岐廳)으로 이전됨.  
1936년 일본 일본 참모본부가 「육지측량부발행지도구역일람도(陸地測量部發行地圖區域一覽圖)」를 작성함. 이 지도는 중일전쟁 직전까지 점령한 지역을 구역별로 나누어 파악한 것으로, 지도에서 독도는 원래 조선의 영토로서 명치집권 후 일본이 강제점령한 지역이 되었다고 하였음.
출전: 「육지측량부발행지도구역일람도」(1936, 육지측량부 제작).
 
1945년 한국 9월 6일 미국정부는 연합국최고사령부에 속한 미군정의 일본통치정책의 원칙으로 「항복후 미국의 초기 대일본정책」을 발표. 그 훈령의 영토조항 부분은 ‘일본의 주권은 본주, 북해도, 구주(九州), 사국(四國)과 카이로선언 및 미국이 이미 참가하였고, 또 장래에 참가하는 기타 협정에 의해 결정되는 주변의 제소도(諸小島:minor outlying island)에 국한된다’고 규정함. 이 훈령은 9월 22일 연합국최고사령부에 전달됨.
9월 27일 미 5함대 사령관의 「각서 제80호」로 일본의 어로제한선을 설정하였는데, 독도는 어로제한선 밖의 한국령에 귀속되는 것으로 하였음.
10월 13일 연합국최고사령부 공시 제42호로 일본인의 어업구역 한계선을 설정, 이 선은 독도 동쪽 12해리상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음.
11월 1일 「일본의 점령 관리를 위한 연합국최고사령부에 대한 항복 후 초기의 기본지령」의 일본영토에 관한 규정이 발표됨. 일본영토를 ‘4개 본도 및 대마도를 포함한 약 1천개의 더욱 작은 인접 섬들(smaller adjacent islands)’로 규정.
12월 19일 맥아더가 「연합국의 일본 점령 기본 목적과 연합국에 의한 그 달성의 방법에 관한 맥아더 원수의 관하 부대에 보내는 훈령」을 발함. 여기서 ‘일본의 주권은 4개 본도와 대마도를 포함한 약 1천개의 인접 작은 섬들에 국한된다’고 규정.
 
1946년 한국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지령(SCAPIN) 677호, 즉 「약간의 주변지역을 정치상 행정상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관한 각서」(연합국최고사령부는 이것을 일본의 정의라고 표현)를 일본정부에 전달하고, 일본에서 제외시킬 영토를 결정하였는데, 3조 a항에 Utsryo(Ulleung) Island, Liancourt Rocks(Take Island) and Quelpart(Saishu or Cheju Island)라 하여, 독도를 Liancourt Rocks(Take Island)로 표기하고, 울릉도, 제주도와 함께 일본영토에서 분리되는 땅으로 명시하였음. 또한 4조에는 한국(Korea)이 역시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지역으로 명시되어 있음. 한편, 같은 해 발표된 「연합국최고사령부 행정지역 일본과 남한(ADMINISTRATIVE AREAS JAPAN AND SOUTH KOREA)」의 부도(付圖)에서 위의 3섬은 일본과 구분되어 남한의 영토에 포함되는 땅으로 선을 그어 명확히 표시하였음. SCAPIN 677호는 1952년 연합국최고사령부가 해체될 때 까지 수정 혹은 폐지되지 않았음.
6월 22일 연합국최고사령부가 「SCAPIN 1033호」, 즉 「'일본의 어업 및 포경업의 허가구역에 관한 각서」를 통해 일본인의 어업과 포경업 구역을 제한하였는데(소위 맥아더라인), 그 3조 b항에 ‘일본인 선박과 선원은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3분에 위치한 리앙쿠르岩의 12마일 이내에 들어오지 못하며, 또한 이 섬에 어떠한 접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독도가 허가구역 밖에 있음을 분명하게 명시하였음.
다만 지령 677호에서 ‘이 지령의 어떤 부분도 포츠담선언 제8조에서 언급된 소도서들의 최종적인 결정에 관한 연합국의 정책을 표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여 여기서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였다고 천명하는 것이 최종적인 조치가 아님을 밝혔음.
1947년 한국 미국 3월 20일자로 연합국의 대일본강화조약 초안(제1차 초안)을 작성. 영토조항 1조 ‘일본의 영토 한정은 제2, 3조에서 한정되는 바와 같이 1894년 1월 1일 현재의 것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한정은 본주, 구주, 사국, 북해도의 4개 기본 섬과 주변의 모든 작은 섬들을 포함할 것이다. 쿠릴 열도는 제외되지만, 유구(流球)열도는 포함된다.’ 4조 ‘일본은 이에 한국과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를 포함한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대한 모든 권리와 권원을 포기한다.’
한편, 이 초안에는 연합국의 「구일본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AGREEMENT RESPECTING THE DISPOSITION OF FORMER JAPANESE TERRITORIES)」가 첨부되어 있음. 이 문서의 제3항 일본이 한국에 반환할 영토에는 한반도 본토와 주변의 모든 섬(all offshore Korean islands)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표적 예로 든 도서로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Liancourt Rocks: Takeshima 로 표기해 넣음으로써, 이 섬이 한국의 영토임을 명확히 하였음. 이 합의서에는 일자가 없으나 대일본강화조약 1947년 1차 초안부터 1949년 5차 초안까지 서류철에 모두 복사되어 철해져 있음.
6월 19일 연합국 극동위원회가 ‘일본의 주권은 본주, 북해도, 구주, 사국의 제도(諸島)와 금후 결정될 수 있는 주위의 제소도(諸小島)에 한정될 것’이라는 「일본 항복 후 대일기본정책」을 발표함. 일본은 독도를 반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 하에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여론을 일으킴.
8월 5일 연합국의 대일본강화조약 초안(2차 초안)이 미국에 의해 작성됨. 내용은 1차 초안과 대동소이함.
8월 16일-25일 한국산악회 주최로 제1차 학술조사단이 파견되어 약 2주일간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를 실시 함.
과도정부 입법의원 허간룡(許侃龍)이 대마도 반환 요구 결의 제안.
 
1948년 한국 1월 2일 연합국의 대일본강화조약 미국초안(제3차 초안)이 작성됨. 내용은 1, 2차 초안과 대동소이 함.
6월 8일 미공군기의 폭격연습으로 독도에 출어 중이던 한국어민 30여명이 피해를 입고, 어선 10척이 침몰되는 사건 발생. 배상액의 규모가 부분적으로 알려졌는데, 울진군 죽변 어업조합의 경우 520만원의 피해를 입은 어민에게 68만원 정도가 지급된 것으로 알려짐.
 
1949년 한국 11월 2일 연합국의 대일본강화조약 미국초안(제5차 초안)이 작성됨. 6조에 1-4차 초안의 4조와 같은 내용이 들어있음.
11월 14일 도쿄 맥아더 사령부 정치고문국 고문 시볼드(연합국최고사령부 외교국장)가 5차 초안을 검토하고 맥아더와 상의한 후 워싱턴의 일본문제 담당 버터워스 국무부 차관보에게 독도귀속 수정(남한이 아닌 일본으로)을 전문(電文)으로 건의함(‘제6조 리앙쿠르岩(다케시마)의 재고를 권고한다. 이들 섬에 대한 일본의 주권은 오래됐으며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안전보장의 고려가 이 섬에 기상 및 레이더 관측소를 상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월 19일 도쿄의 시볼드가 미국무장관 앞으로 서면 의견서를 발송. 「11월 2일 조약초안에 관한 상세한 코멘트(DETAILED COMMENT ON NOVEMBER 2DRAFTTREATY)」에서 ‘한국방면에서 일본이 일찍이 영유하고 있던 도서들의 처분에 관하여 리앙쿠르암(다케시마)이 우리가 제안한 제3조에서 일본에 속하는 것으로 명기될 것을 제안한다.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영토 주장은 오래됐고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것을 한국 바다의 섬이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한 미국의 이해와 관계되는 문제로서 안전보장의 고려에서 이 섬에 기상 및 레이더 관측소를 설치하는 것이 고려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언급함.
12월 12일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이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에 한국의 참여 여부에 대해 ‘한국에 대한 협정국적 지위 혹은 자문국적 지위의 공식적 참가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 이 의견서는 강화조약 준비 관련국과 관련자들이 모두 열람한 것으로 되어 있음.
12월 29일 미국 대일강화조약 6차 초안에서 3조 일본영토 규정조항에 처음으로 독도를 Takeshima(竹島, Liancourt)라는 호칭으로 일본영토에 포함시키고, 일본이 포기하는 한국영토 조항인 6조에서는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만 남기고 독도를 제외시킴.
대일본강화조약 미국초안(제6차 초안)에서 시볼트가 주장한 것처럼 북방 4개 도서와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명기함.
1950년 한국 연합국 1949~1950년 「구일본령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 당시 1951년으로 예정되었던 대일본 강화조약을 준비.
제3조 한국에 반환해야 할 영토에서 ‘연합국은 한국 본토와 모든 주변의 한국 섬들에 대한 권리와 권원을 대한민국의 주권에 이양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 섬들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獨島(Liancourt Rocks, Takeshima)와 모든 다른 섬들을 포함한다.’라고 언급함. 그리고 부속지도도를 작성하여 첨부하였음.
6월 8일 당시 경상북도지사 조재천(曺在千)의 참석 하에 독도폭격사건으로 사망한 어민들을 위해서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동도 서쪽 몽돌해변에 건립함.
8월 7일 대일강화조약 제7차 미국초안 작성됨. 일본과 한국의 영토조항을 삭제하고 중국과 소련에 반환되는 섬 이름만 언급하는데 그침.
9월 11일 대일강화조약 제8차 미국초안 작성됨. 영토조항이 더욱 간략하게 되어 제4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한국과의 관계는 유엔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의거한 관계를 갖는다고만 규정. 부수한 각서에도 한국에 대해서는 독립 인정 이외에는 언급하지 않았음.
7월 대일강화조약 제6차 미국초안에 대한 주석.
‘독도(Takeshima)는 한국과 일본의 등거리 중간 지점에 있는데, 명백하게 1905년에 일본이 영토편입을 주장하여 시마네현 은기도사의 관리 하에 두었다. 또한 독도는 바다사자의 서식지인데, 일본 어부들은 특정 계절에 독도에 이동 거주해 온 것이 장기간이 되었다. 울릉도와 달리 다케시마는 한국 명칭이 없으며, 한국 영토라고 주장된 바도 없다. 독도는 미군점령기에 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사용된 바 있으며, 기상 및 레이더 관측소 부지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 일본이 1905년 시마네현의 고시와 삼정양삼랑(三井養三郞) 등에게 내주었던 어로 허가 등 모든 자료를 제시하면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한 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이렇다 할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측의 입장을 수용한 것으로 보임.
1951년 한국 2월 28일 「대일강화조약 1차 영국초안」 작성됨. 미국측이 7차 미국초안부터 영토처리를 불분명하게 하자 영국이 독자초안을 작성하기 시작. 영토문제에 대해서는 선을 그어서 일본 근해의 섬들을 일본의 주권 하에 포함시키겠다고 하면서 한국방향으로는 울릉도와 제주도를 일본 영토권 안에 포함시킴. 이 잘못은 3월 2차 초안에서 바로 수정됨.
3월 23일 「대일강화조약 제9차 미국초안」작성됨. 일본 영토 조항을 설정하지 않고 제3장의 영토조항 제3항에 일본은 한국에 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고만 명시하고 구체적인 섬의 명칭들은 언급하지 않음.
3월 「대일강화조약 2차 영국초안」 작성됨. 한국과 관련해서 제1항에서 제주도와 복강도(福江島) 사이, 한반도와 대마도 사이, 독도(Takeshima)와 은기도(隱岐島) 사이를 연결하는 선을 그음으로써 제주도와 독도를 한국영토에 포함시키고, 대마도와 은기도를 일본영토에 포함시켜 원래 연합국이 합의했던 대로 복원시킴.
5월 2일 「대일강화조약을 위한 영미토론」. 워싱턴에서 이날 오전 10시 30분에 개최된 제7차 영, 미 양국 실문자 토론회의 자료. 1-6차 토론 내용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며, 이 7차 토론회의 내용도 요약기록(summary record)이라 하여 결론만 남겨 놓았으므로 토론과정은 알 수 없음. 이 토론요약에서는 일본이 주권을 포기하는 영토만을 특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미국 초안 3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의 3개섬을 끼워 넣자는 의견에 합의했다고 하였음. 일본영토의 규정을 빼버림으로써 독도의 귀속처가 애매모호하게 됨.
5월 3일 「제1차 영미합동초안」 작성. 영토를 다룬 장의 제2항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하고, 괄호 안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다는 문구를 넣음.
6월 1일 「영미합동초안(5월 3일자)에 대한 연합국 토론」. 뉴질랜드가 5월 3일자 영미합동초안에 대해서 반대함. 3차 영국초안처럼 1조에 경위선(經緯線)을 정확히 표시하여 일본영토를 정확히 한정시켜 일본 주변에 있는 어떠한 섬에 대해서도 주권분쟁의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하자고 주장. 이에 대해 미국은 ‘그렇게 하는 경우 일본에게 울타리를 친 것 같이 보여서 심리적으로 일본에게 불이익을 줄 것 같아 영국초안을 사용하지 않기로 미, 영간에 합의했다. 동경에서 영국초안을 토론할 때 일본인들이 영국초안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 안을 폐기했으며, 한국영토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시키는 미국초안을 가지고 영국측을 설득했다’라고 답함. 이로써 미국이 전후 독도 귀속 문제의 처리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에 각기 다른 즉, 불평등한 입장으로 대처했다는 것이 드러났음.
6월 14일 「영미합동개정초안」 작성. 제2장 영토부분, 제2조 a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문장으로 처리하고, 일본의 영토에 대한 설명은 생략함으로써 독도는 한국영토표시에서 누락되었고, 일본영토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일본영토 표시조항 자체가 생략됨으로써 추후 영토분쟁의 여지를 남김.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본강화조약」이 체결됨. 2조 a항에 ‘일본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함으로써 1946년 「SCAPIN 677호」의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로 변경되었음.
6월 8일 경북도지사 조재천 참석 하에 미군기연습에 의한 독도조난어민의 위령비를 건립함.
 
1952년 한국 1월 18일 한국전쟁발발 후 일본어선의 맥아더 라인의 침범이 잦아짐에 따라 한국정부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국무원 고시 제14호)을 공포 함(일명 평화선, 혹은 李라인). 그 범위는 북위 38도 동경 132도 50분까지로 독도를 기점으로 하는 것임.
1월 28일 독도에 관한 영유권 주장(각서).
2월 12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의 1월 28일자 구술서를 반박하고 독도영유권을 재천명하는 구술서를 일본정부에 보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발효.
9월 17일~1953년 2월 8일 한국산악회 제9차 국토규명사업으로 울릉도·독도를 학술 조사함.
10월 9일 제2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보고 강연회 개최.
11월 10일 한국정부 미대사관에 폭격사건의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냄.
12월 4일 미대사관 한국정부에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장 보냄.
6월 10일 미국 지리학회에서 제작한 「표준세계지도」에서 독도를 TAKESIMA로 표기하지 않고 CHUDO(竹島)로 표기함.
일본 1월 28일 일본정부 평화선 선포에 항의함과 동시에 독도에 대한 한국 영유권을 부정하는 외교문서(구술서)를 보내 옴. 이로써 한일간 독도영유권 논쟁이 본격적으로 촉발됨.
4월 25일 맥아더라인 폐기됨. 일본정부, 한국정부에 2월 12일자 한국정부의 구술서를 반박하는 구술서를 보냄.
7월 26일 미일합동위원회 미일행정협정 2조에 따라 독도 및 주변해역을 주일 미군의 해상훈련구역으로 지정(일본은 외무성 고시 34호로 이를 공시).
9월 15일 미군 독도에 2차 폭격훈련을 감행함.
1953년 한국 2월 27일 한국정부가 독도 영유권에 관한 성명을 발표함. 한국정부의 항의에 따라 미국은 미공군의 연습지역에서 독도 제외 결정을 함.
6월 26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의 6월 22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일본정부에 보냄. 그 내용은 독도가 한국영토의 일부임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의문의 여지없이 명백하고, 따라서 한국정부는 한국인들이 한국 영해에서 어로작업에 종사하는 것은 매우 합법적이고 적절한 것이라고 평가하며,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항의서를 제출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요지였음.
7월 변영태 외무부장관이 ‘독도는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자였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우리의 품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모든 한국인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위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영예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를 탈취하려는 것은 한국의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
7월 8일 대한민국 국회 일본의 독도침범에 대해 결의문을 채택함. 그 요재는 ‘대한민국의 주권과 해양주권선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여 금후 독도에 대한 한국어민의 출로(出撈)를 충분히 보장할 것. 일본관헌이 건립한 표식을 철거할 뿐 아니라 금후 이와 같은 불법침해가 재발되지 않도록 일본정부에 엄중 항의할 것.’ 등임.
7월 10일 경상북도의회는 일본이 6월 25일, 27일, 28일 3번에 걸쳐 미국기를 달고 독도에 침범, 어로작업 중인 한국인을 축출하고, 한국의 영토표식과 위령비를 파괴하고, 그들의 게시판을 설치한데 대해 중앙정부가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건의함.
7월 일 한국국회에서 독도수비대 파견을 결정함. 홍순칠을 대장으로 독도 사수 특수의용대를 결성하여 독도 경비를 함.
7월 12일 독도수비대가 독도에 침범한 일본 보안청 선박에 발포.
7월 23일 새벽 5시, 일본순시선 독도 접근.
8월 4일 주일대표부 일본의 독도침범에 항의함. 한국측 구술서에서 일본 관헌의 표식 건립에 항의함.
8월 22일 한국측 구술서에서 일본 공선(公船)의 한국 영해 침범에 항의함.
9월 9일 한국측 구술서에서 「한국정부견해」를 보냄(한국정부견해1).
9월 10일 재일거류민단, 해양주권선언과 독도문제에 대해단결을 강조함.
9월 26일 한국측 구술서에서 일본 공선의 영해침범에 항의함.
10월 12일 평화선을 지키기 위하여 해안경비대 창설함.
10월 24일 주일대표부, 평화선 불침약속하면 억류된 일본 선박을 석방할 것이라고 발표.
 
일본 4월 25일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내용의 항의 외교문서를 보내옴.
5월 28일 시마네현 어업시험장의 시험선 시마네호가 독도에 침입.
6월 22일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시마네호가 동년 5월 28일 11시경 해산물 실험조사를 위해 독도부근에 들어가 보았더니 약 30명의 한국인들이 독도와 그 수역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일본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법침입으로 이에 엄중 항의하며 이를 방지해 달라는 요지의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6월 25일 오후 4시 30분 경 미국기를 단 일본 수산시험청 소속 선박이 독도에 침입. 승무원 9명이 독도에 상륙, 머물고 있던 한국인 6명에게 체류이유를 따지고 사진을 찍었으며, 우리 정부가 건립한 표지판의 사진도 찍은 후 오후 7시 경 돌아 감.
6월 27일 오전 10시 경 미국기를 단 일본선박이 독도에 침입. 8명의 일본인이 독도에 상륙, 6월 25일 한 행동과 동일한 행동을 하고 오후 3시 경 돌아감.
6월 28일 오전 8시 경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오키호와 구주류호가 독도에 침입. 약 30여 명의 일본 관리들과 경찰관들이 독도에 상륙하여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 라고 쓴 2개의 경계표와 2개의 게시판을 설치함. 게시판의 하나는 ‘일본 국민 및 상륙을 위해 합법적 절차를 밟은 외국인을 제외하고, 일본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는 모든 사람의 출입을 금함’이라는 요지의 글. 일본인 관리들은 6명의 한국 어부들을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독도는 일본영토이므로 떠나라고 요구한 후 오전 10시 경 독도를 떠남.
7월12일 일본에서 관리 30명을 독도에 파견함.
7월 13일 일본정부 7월 12일의 독도수비대 발포사건에 항의함. 일본측 구술서에서 「일본정부견해」를 보내옴(일본정부견해 1).
7월 30일 일본정부, 평화선 철폐를 연합군 사령부에 요청함.
8월 8일 일본측 구술서에서 8월 4일자 한국측 구술서 반박함.
9월 17일 오전 9시 30분경 일본 수산시험청 소속 선박 1척 독도수역 침입, 12시 30분경 어업시험관을 포함한 일본관리들이 독도에 상륙함.
10월 3일 일본측 구술서에서 일본정부견해를 다시 전달할 것을 통보함.
1954년 한국 1월 18일 해안경비대, 독도에 영토표식 설치함.
3월 27일 평화선 침범한 일본 어선을 어족보호법에 의거하여 처벌함.
5월 1일 독도에 민간경비원 20명 파견함.
5월 18일 한국정부, 관리들과 석공을 파견하여 일본관리들이 만든 표지판을 철거하고, 독도 남동쪽 암벽에 '韓國領'과 태극기를 세겨 넣음.
6월 11일 한국정부 독도에 해안경비대 파견함.
6월 14일 한국정부, 일본에 일본공선 영해침범과 5월 23일의 일본 순시선 츠루가호의 독도침입, 5월 28일 또 다른 선박 1척의 독도침입 및 승무원의 상륙, 한국측 표지물의 사진촬영 사실에 대해 항의 구술서 보냄.
8월 15일 독도 동도 정상에 무인등대 설치.
8월 24일 경북도에서 제작한 독도영토표지석을 동도 서쪽 해변 옛 독도조난어민위령비 근처에 설치.
8월 30일 한국, 일본 공선의 영해침범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일본 정부에 보냄.
9월 1일 한국은 일본측 8월 27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과 함께, 연이은 일본 순시선의 영해 침입에 강경 항의.
9월 2일 독도무장수비대 결성함.
9월 15일 3종의 독도 도안 우표 발행함(일본은 이 우표가 첨부된 한국의 우편물을 반송하려 하였으나, 반송이 어렵게 되자 우표에 먹칠을 한 채 배송하였음). 같은 날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 등대를 설치한 사실을 통고함.
10월 28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의 '독도문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제의를 거부함. ‘한국이 독도영유권을 갖고 있음은 논란의 여지도 없는 것. 일본정부는 마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가진 것처럼 전제하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독도영토분쟁을 만들어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한국과 대등한 입지에 서려고 하는 것’이라고 반박함.
12월 5일 김용식 주일공사, 일본외무성에 평화선 문제에 대한 회담을 함.
12월 8일 조정환 외무부장관서리, 평화선의 목적은 어업자원보호라고 재천명함.
12월 13일 한국정부, 독도의 무장과 우표발행의 합법성을 천명. ‘독도는 한국영토의 일부, 독도를 그린 우표의 발행은 대한민국정부의 통치권내의 일이므로 일본정부는 이에 항의할 위치에 있지 않다’라고 밝힘.
12월 30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에 일본어선의 영해침범을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냄.
 
일본 2월 10일 일본정부, 「일본정부견해2」를 수록한 구술서를 보내옴.
2월 26일 일본 자국민에게 독도지역에 대한 인광석(燐鑛石) 채굴권을 허가하고 광구세를 징수하기 시작함.
5월 23일 일본정부, 해상보안청 순시선 츠루가호를 독도에 파견하여 한국령과 태극기가 새겨져 있음을 확인.
6월 14일 일본, 한국선박 영해침범과 한국정부의 암벽 조각물 및 한국어부들의 어로활동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6월 16일 일본, 순시선 츠루가호를 독도에 파견.
7월 28일 일본, 순시선 나가라호와 쿠주류호를 파견, 한국 어부들의 어로작업과 한축측이 세운 영토표지판 및 태극기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음.
8월 23일 일본, 순시선 오키호 독도에 파견. 오키호는 서도 북서쪽 해안에 접근하다가 서도 해안의 독도의용수비대로부터 약 10분간 600발의 경고사격을 받음.
8월 24일 일본, 순시선 오키호를 파견, 섬 주위를 선회하다가 한국정부가 건립한 등대를 발견하고 철거를 요구해 옴.
8월 26일 일본은 일본순시선 피격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8월 27일 일본, 독도에의 한국기 게양과 등대 건립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9월 24일 일본, 등대설치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9월 25일 일본정부, 등대설치에 대한 항의와 함께, 한국정부에 대해 한일간의 독도문제는 국제법의 기본적 원리 해석을 포함한 영유권 분쟁으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최종결정을 위임하자고 제의해 옴.
10월 2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오키호와 나가라호가 동도 1.5마일내로 접근, 한국 독도의용수비대원 7명이 대포(나무 대포)의 덮개를 벗기고 순시선을 향해 사격태세를 갖추자 철수함.
10월 21일 일본, 독도에 대포가 설치된 것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11월 19일 일본정부는 독도도안우표가 붙은 한국 우편물을 반송하기로 의결함.
11월 21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오키호와 헤쿠라호를 독도에 파견. 헤쿠라호가 동도로부터 1,500야드 떨어진 해안에 접근하자 한국의 독도의용수비대가 연기신호를 이용, 철수할 것을 명령. 순시선이 이를 무시하고 더욱 접근하므로 의용수비대가 오전 6시 58분부터 7시 사이 5발의 포탄으로 경고사격 함.
11월 29일 일본, 한국정부에 독도우표발행에 대해 독도를 한국영토로 세계에 알리려는 선전활동이라고 항의해 옴.
11월 30일 일본정부, 일본 순시선 피격에 대해 항의해 옴.
1955년 한국 7월 8일 한국정부, 독도에 새로운 등대 건립.
8월 8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에 신등대 설치를 통보.
8월 31일 한국정부, 일본정부에 등대 설치 등에 대한 합법성을 재천명하는 구술서를 보냄.
 
일본 3월 14일 구산일랑(鳩山一郞) 일본 수상이 독도의 한일분쟁에 대한 제3국의 조정을 희망한다고 밝힘.
8월 16일 일본정부, 한국의 등대, 창고 설치에 항의해 옴.
8월 24일 일본정부, 한국의 등대설치통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구술서를 보내옴.
1956년 한국 12월 한국경찰, 독도경비차 상륙. 독도의용수비대 해산.  
일본 9월 20일. 일본정부, 「1954년 9월 25일 한국정부견해(2)」를 반박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또한 25일 독도가 일본영토임을 주장하는 장문의 구술서 「일본정부견해(3)」을 보내옴.
1957년 한국 6월 4일 한국정부, 일본의 구술서를 반박하고 츠가루호의 독도수역 침범에 강력히 항의하는 구술서를 일본정부에 보냄.  
일본 4월 19일 일본정부, 순시선 츠가루호를 독도에 파견, 독도의 시설물들을 관찰.
5월 8일 일본정부, 독도에 한국 관민(官民)의 상주와 등대의 상존(常存)에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내 옴.
6월 일본 수상이 독도 해양경비대 파견은 무력침략이라고 항의함.
8월 11일 일본정부, 순시선을 파견하여 독도를 관측함.
10월 6일 일본정부, 다시 한국관민의 상주와 등대의 상존에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내 옴.
10월 20일 일본정부, 순시선을 파견하여 독도를 관측함.
12월 25일 일본정부, 또다시 한국 관민의 상주와 등대 상존에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내 옴.
1958년 한국 2월 1일 한국정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부 300명을 제1차로 석방함.
2월 9일 한미일이 독도문제를 국제해양법회의의 의제로 하는 데 합의함.
2월 26일 한국정부, 평화선 침범한 일본 어부 200명을 제2차로 석방함.
 
일본 1월 7일 일본정부, 독도의 한국 관민의 상주와 등대의 상존에 대한 항의구술서를 보내옴.
5월 7일 일본 순시선을 파견, 독도를 관찰.
9월 10일 일본 순시선을 파견하여 독도를 관찰함.
10월 6일 일본정부, 독도의 한국官民상주와 등대 상존에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959년 한국 1월 7일 「한국정부견해(3)」를 일본정부에 보냄.
9월 5일 주일대표부, 부산에 억류중인 일본 어부 122명의 명단을 일본 외무성에 전달함.
9월 18일 일본순시선 영해침범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일본정부에 보냄.
12월 13일 한국정부, 일본순시선의 영해침범에 항의하고, 9월 23일자 일본 구술서를 반박함.
 
일본 9월 15일 일본 순시선 헤쿠라호 독도 해역 침범.
9월 23일 일본정부, 한국정부의 9월 18일자 구술서를 반박. ‘다케시마(竹島-독도)는 일본영토이므로 한국정부는 항의할 위치에 있지 않다’라고 반박함.
12월 8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독도에 파견함.
1960년 일본 안신개(岸信介) 일본 수상이 독도에 한국해안경비대 파견은 무력침략이라고 항의함.
12월 22일 일본정부, 독도에 등대를 비롯한 건조물이 상존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항의구술서 보내옴.
 
1961년 한국 1월 5일 한국정부, 1960년 12월 22일자 일본의 항의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냄.
12월 27일 한국정부, 12월 25일자 일본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냄. ‘일본정부의 그러한 요구는 내정간섭임을 지적하며 강력히 반박, 헤쿠라호는 독도 동쪽 한국영해 500미터 지점까지 침입했다가 물러갔는데 다시는 이러한 침입이 재발하지 않도록 적절한 대책을 세우기를 일본에 강력히 촉구’한다라고 천명함.
 
일본 12월 3일 일본정부, 순시선 헤쿠라호를 독도에 파견.
12월 25일 일본정부, 독도에서의 한국인 철수와 시설물 철거를 요구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962년 한국 2월 3, 4일자 한국일보에서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회원 5명과 한국일보 기자 2명이 한국해군이 제공한 선박을 타고 2월 2일 독도에 상륙하여 7일간 독도에 머물면서,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메시지를 외국과 교신하기로’ 보도함.
김종필, 딘러스크 미국무부장관에게 독도 폭파를 제의함.
 
일본 2월 10일 일본정부,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회원들의 독도에서의 활동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7월 13일 죽도에 관한 1959년 1월 7일부 한국정부의 견해에 대한 「일본정부견해(4)」를 수록한 일본측 구술서가 전달됨.
12월 22일 일본 순시선 오키호가 독도를 선회 관찰함.
1963년 한국 1월 8일 경상북도 울릉경찰서 소속 순시선 화랑호가 폭풍으로 시마네현에 표류함.
2월 25일 한국정부, 일본의 2월 5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구술서 보냄. ‘일본당국이 화랑호를 구조해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독도가 한국영토이므로 일본정부는 항의할 위치에 있지 않으며, 한일회담이 개최되어 국교정상화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일본 순시선 오키호가 독도수역을 침입한 것은 우호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천명함.
 
일본 2월 5일 일본정부가 한국경비정이 독도에 무기를 반입하는 것에 대해 항의구술서를 보내옴.
1964년 한국 3월 18일 한국정부, 일본의 3월 3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냄.
11월 2일 한국정부, 일본 외무성 발간 「오늘의 일본」 내용 중 독도 부분(죽도는 일본영토인데 한국이 불법점령하고 있다)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냄.
 
일본 1월 31일 일본정부, 해상보안청 순시선 헤쿠라호를 독도에 파견.
3월 3일 일본정부, 독도에서의 한국경찰 즉시 퇴거를 요구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1월 12일 일본정부, 한국의 11월 2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내옴(죽도는 일본영토의 불가분의 일부이므로 한국측의 항의를 접수하지 않는다).
1965년 한국 2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조인됨.
3월 울릉군 주민 최종덕(崔鍾德)씨 도동어촌계 1종 공동어장 수산물 채취를 위해 독도에 들어가 거주하면서 어로활동 시작함.
4월 3일 한일어업협정 체결
5월 6일 한국정부, 4월 10일자 일본정부의 구술서에 대한 반박구술서를 보냄.
6월 22일 한일 기본협정 체결. 「한일 양국간 분쟁의 평화적 처리에 관한 교환공문」작성됨. 일본은 교환공문의 ‘양국간 분쟁 해결에 관한 합의조건에 따라 독도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은 일본측의 제안에 따를 의무가 있다’고 주장함. 이에 우리 정부는 ‘이 교환공문은 한일협정에서 발생하는 양국간의 분쟁해결에 한정하는 합의조건이므로, 한국의 영토임이 분명한 독도문제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반박함.
한일어업협정 체결, 평화선 철폐.
12월 17일 한국정부 「일본정부견해(4)」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냄. 여기서 ‘과거 여러 차례 논란의 여지없이 명백히 밝혀진 바와 같이 독도는 대한민국영토의 불가분의 일부이고, 한국의 합법적 영토권 행사 밑에 있다. 독도영유권에 관련하여 일본정부가 제기한 어떠한 주장도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천명함.
12월 한일어업협정 발표.
 
일본 2월 13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오키호가 독도를 관찰.
4월 10일 일본정부, 독도에서의 한국경찰의 즉시 퇴거를 요구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966년 한국 홍순칠, 대원과 함께 훈장을 받음. 미국지리학회에서 간행한 「표준세계지도」에서 공식적으로 TAKESIMA를 없애고 영문으로 DOKDO로 표기함.
1968년 한국 5월 최종덕(崔鍾德)씨 독도에 시설물 건립 착수.
11월 25일 한국정부, 일본순시선의 영해침범에 대해 항의함.
12월 18일 한일어업협정 발효됨.
 
일본 8월 15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헤쿠라호가 독도를 관찰함.
10월 28일 일본정부, 독도에서의 한국경찰의 즉시 퇴거를 요구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969년 한국 11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이 주한일본공사에게 독도는 한국영토임을 주장함.
11월 25일 한국정부, 일본순시선의 영해침범에 대해 항의함.
 
1970년 한국 11월 24일 한국정부, 일본순시선의 영해침범에 대한 항의 구술서를 보냄.  
일본 9월 13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헤쿠라호 독도를 관찰.
11월 13일 일본정부, 한국의 불법점유에 대해 항의하며, 한국인의 철수와 시설물의 철거를 요구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971년 한국 10월 12일 한국정부, 일본의 9월 6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냄.
 
일본 7월 1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나가라호가 독도를 관찰.
9월 6일 일본정부, 한국의 불법점유에 대한 항의와 한국인의 철수와 시설물의 철거를 요구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972년 한국 5월 15일 한국정부, 일본의 4월 1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냄. ‘한국영토인 독도에 대한 정당한 주권행사에 일본측이 간섭함은 유감’이라고 밝힘. 독도에 반영구적인 등대 설치.
12월 11일 한국정부, 일본의 10월 26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냄.
 
일본 4월 1일 일본측구술서(NO. 30/ASN). 한국의 반항구적 등대(태양열) 설치계획에 항의.
‘한국정부가 독도의 등대를 태양열을 사용하는 반영구적 등대로 교체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음을 확인했는데, 이것은 한국정부가 앞으로도 장기간 독도를 불법점유 할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밝힘.
8월 22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헤쿠라호가 독도를 관찰.
10월 26일 일본정부, ‘독도에 대한 한국의 불법점유에 항의하며, 한국인의 철수와 시설물의 철거를 요구’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973년 한국 5월 7일 한국정부, 일본의 4월 25일자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냄. ‘독도수역어업개발조사계획은 한국정부의 정당한 영토주권의 행사.’라고 밝힘.  
일본 4월 25일 일본정부, 독도개발계획 보도에 항의 구술서를 보내옴. ‘ 한국정부가 독도수역어업개발조사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만일 다케시마(독도)의 3마일 이내 영해를 포함한 것이라면 일본의 영해를 침범한 것이고, 12마일 이내의 수역을 포함한 것이라면 일본의 전관수역을 침범하는 것이다.’라고 밝힘.
1974년 한국 6월 한국경비정, 독시마네해를 침범한 일본어선을 검문하자, 일본이 또 다시 영유권 주장함.  
일본 3월 일본 대평외상(大平外相) 독도 영유권 협상 모색 방침 천명함.
1975년 한국 11월 24일 한국정부, 11월 19일자 일본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냄.  
일본 9월 9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헤쿠라호 독도를 관찰.
11월 19일 일본정부, 독도에서의 한국관리의 즉시퇴거 및 건물철거를 요구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976년 한국 8월 제2차 울릉도 독도에 대한 종합학술조사(한국자연보호협회 주관) 실시, <자연과 보존> 제22, 23호에 결과 발표.
9월 13일 한국정부, 9월 8일 일본정부의 각서를 반박하는 외교문서를 보냄.
12월 2일 한국정부, 10월 25일자 일본정부 구술서에 대한 반박 구술서를 보냄.
 
일본 9월 8일 일본정부, 독도에서의 아마추어 이동무선국 설치와 학술조사 활동에 대한 항의 각서를 보내옴. 조선일보 8월 4일자에 한국햄연맹 독도원정대가 한국정부의 해양경비정편으로 7월 27일 독도에 도착해서 아마추어 이동무선국을 설치했다는 보도와, 중앙일보 8월 20일자에 한국의 학술조사단이 한국정부의 해양경비정으로 7월 27일 독도에 도착했다는 보도가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정부는 한국의 아마추어 무선가들 및 학술조사단이 일본영토인 다케시마(독도)에 불법상륙했을 뿐 아니라, 한국정부의 공선(公船)인 해양경비정이 이들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독도분쟁을 더욱 악화시키는 도발적 행위로서 유감을 표시한다’는 내용임.
10월 25일 일본정부, 독도에서의 한국관리의 즉시 퇴거 및 시설물의 철거를 요구하는 구술서를 보내옴.
1977년 한국 9월 제3차 울릉도 독도에 대한 종합학술조사(경북대학교 주관)실시, 『울릉도 독도 답사기요』 발표. 이 해에 12해리 선포함.
일본 2월 19일 일본 복강(福岡) 매일방송 소속 헬리콥터가 독도 영공을 침범함.
8월 일본순시선 PM82호가 독도 동남쪽 200미터 해상 침범, 우리 경비대가 신호탄을 발사하자 퇴각함.
후쿠다 다케오 총리와 아베 신타로 외상, 영유권 망언.
1979년 한국 울릉군 남면을 울릉읍으로 승격시킴. 이에 따라 독도는 울릉군 남면에서 울릉읍에 속하게 됨.  
1981년 한국 9월 제4차 울릉도 독도에 대한 종합학술조사(한국자연보호협회 주관) 실시, 『울릉도 및 독도 종합학술조사보고서』를 발표함.
10월 14일 울릉군 주민인 최종덕(崔鍾德)씨가 최초로 독도에 주민등록을 이전 함(울릉읍 도동리 산67번지).
 
1982년 한국 11월 16일 독도일원을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해조류(海鳥類) 번식지」로 지정함.
12월 10일 유엔해양법협약이 채택됨.
 
1987년 한국 7월 8일 최종덕씨의 사위 조준기(趙俊紀)씨 내외가 최종덕씨와 같은 주소(산67번지)로 주민등록을 이전함. 조준기씨 내외는 1991년 2월 9일 산63번지로 이전하였고, 1994년 3월 31일자로 독도에서 전출하였음.
9월 23일 최초의 독도 주민 최종덕씨 사망함.
 
1991년 한국 11월 17일 김성도(金成道)씨 부부 1세대 2명이 독도로 주소지를 옮김(울릉읍 도동리 산63번지). 이들은 현재 어로활동에 종사하며 독도의 유일한 주민으로 현지에 거주하고 있음. 한편, 2000년 4월 7일 독도리 신설로 이들의 주소지는 울릉읍 독도리 산20번지로 변경되었음.
12월 울릉도 독도 간 전화 케이블 설치.
 
1993년 일본 무토가분 외상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일본 영토’라고 주장함 .  
1994년 한국 11월 16일 1982년 12월 10일 채택되었던 유엔해양법협약이 발효됨.  
1996년 한국 1월 19일 한국, 유엔해양법협약 비준서를 유엔사무총장에게 기탁(85번째)함.
5월 9~10일 제1차 한일어업실무자 회담이 동경에서 열림.
9월 10일 한국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법 제정, 발효.
 
일본 7월 20일 일본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법 제정, 발효(독도 포함).
일 문부성 검정 중.고교 지도 5종, 독도 자국영토 표기.
일 시마네현 의회 독도 일본영유권 확립 요구 특별결의 채택.
10월 하시모토 류타로 독도 영유권 주장.
1997년 한국 8월 4일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존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이 국회에 제출됨.
8월 8일 울릉도에 독도박물관 개관됨.
10월 10일 제6차 한일어업실무자 회담이 동경에서 열림.
11월 6일 서동도 접안시설 축조공사 준공기념식이 울릉도에서 열림.
11월 7일 서동도 접안시설 축조공사 준공기념비 제막식이 독도(동도)에서 열림.
11월 24일 서동도 접안시설 축조공사 준공됨(준공검사원 제출).
12월 31일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 보존에 관한 특별법」(법률 제 5447호) 제정.
 
일본 11월 일본, 한국 독도접안시설 공사 중단 요구.
1998년 한국 12월 1954년 8월 초점등한 독도무인등대를 유인등대로 승격(3명).  
일본 9월, 한일 양국 어업협정 협상 타결.
1999년 한국 1월 22일 한일양국간 비준서 교환으로 한일간에 유효기간 3년의 신한일어업협정이 발효됨. 새로운 어업협정에 따라 독도와 주변 12해리가 한일간 '중간수역' 안에 위치하게 됨.
3월 독도 유인등대 정식 가동.
6월 1일 문화재청 고시 제 1999-1호로 문화재 보호법 제16조 규정에 의한 국가지정 문화재 관리 단체지정 및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관리지침 고시.
12월 10일 문화재청 고시 제 1999-25호로 독도의 문화재 명칭이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해조류 번식지」에서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천연보호구역」으로 변경됨.
 
2000년대
연 대  자 료 기 타
2000년 한국 4월 7일 울릉군조례 제1395호로 독도리가 신설됨에 따라 독도의 행정구역이 종전의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42-76번지에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37번지로 변경 됨.
9월 1997년 12월 31일 제정된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 보존에 관한특별법」(법률 제 5447호)에 의해, 독도 등 48개 도서가 특정도서로 지정 됨.
 
일본 모리 요시로 총리, ‘독도는 우리땅’ 망언.
2001년 일본 스미타 노부요시 시마네현 지사가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거했다’고 망언함.  
2003년 한국 1월 1일 독도에 우편번호(799-805) 부여 됨.  
2005년 일본 2월 23일 시마네현 의회,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조례안 상정.
다카노 도시유키 주한 일본대사 ‘독도는 명백한 일본땅이다’라고 망언함.
3월 8일 일본 아사히신문 소속 경비행기, 독도상공 진입 시도.
3월 10일 시마네현 의회 상임위 총무위원회,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 본회의 상정.
3월 16일 조례안 본회의 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