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독도의 역사

독도는 신라시대 512년 우산국을 복속시킨 이후 줄곧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영토였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시대 쇄환정책을 실시한 시기부터 독도와 울릉도를 무단 도해를 일삼다가 우리의 국력이 약화되어 일본에 우리의 주권과 외교권을 빼앗긴 시기인 1905년 시마네현 소속 은기도사 소관 일본영토로 편입하고 죽도(다케시마)로 명명하였다. 해방 이후 우리의 모든 권리와 주권, 영토를 되찾게 되었지만, 여전히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주장하고 있다. 이는 독도에 대한 국제적 분생 발생시 명분을 쌓기 위한 일본의 다단계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는 독도에 관한 올바른 역사를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


내용
역사적 시기에 따라 ‘전근대 기록’과 ‘근·현대 기록’으로 구분하여 기술
독도의 명칭이 우산도에서 삼봉도, 가지도, 석도, 독도 등으로 변화한 유래에 관하여 기술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사적 자료의 해석에 관한 한·일간의 주장에 관하여 기술
서양인의 시각에 보여진 독도에 관하여 기술

전.근대 기록

신라 512년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킨 기록이 최초이다. 이후 고려 초기에는 공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중엽부터는 관원이 왕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후기에는 울릉도를 울진현의 관할로 편입하였으며, 고려말기에는 내륙인들의 왕래가 활발하였다. 대표적 기록으로는 조선초기 쇄환정책으로 공도가 된 울릉도를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 정책, 즉 쇄환정책을 시행한 것과 조선후기 어부 안용복의 도일사건이 있다. 조선시대에 지속적인 쇄환정책이 추진되어 오다가 고종때 비로소 내륙인의 왕래가 허가되었다.

근.현대 기록

대표적 사건으로는 1900년 칙령 제41호 발표, 1905년 독도의 일본영토 편입, 1951년 대일강화조약 체결 등이 있다. 1900년(광무 4) 대한제국칙령 제41호는 울릉도를 국가의 지방관제로 편입한 것과 칙령 제2조에서 울릉도의 관할구역으로 울릉전도와 함께 죽도, 석도(독도)를 규정한 것이다. 1905년 독도의 일본영토 편입은 1904년 9월 일본어부 나까이 요자부로가 ‘리앙고도(독도) 영토 편입 대하원’을 일본정부에 제출, 일본정부가 리앙고도를 시마네현 소속 은기도사 소관 일본영토로 편입하고 죽도(다께시마)로 명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독도를 죽도(다께시마)라고 명명하고 있다. 1906년 일본관리가 한국정부에 독도가 일본영토로 편입되었음을 통보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당한 상태에서 한국정부는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에 항의하지 못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연합군에 의한 대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초안 작업시 독도의 영유권에 대하여 갈등이 있었으며, 수차례의 의견교환 이후 독도에 대하여서는 분명한 언급을 하지 않고 1951년 대일강화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사적 자료의 해석에 관한 한.일간의 주장

한국의 역사적 문헌에 관한 쟁점 은주시청합기
안용복의 활동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일본내무성질의서 및 태정관지시 대한제국칙령 제41호
시마네현고시 SCAPIN 제677호 및 1033호
대일강화조약 평화선
국제사법법원제소 문제 한일기본조약
신한일어업협정 등에 관한 각국의 주장 기술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본 독도

1787년 프랑스 라페루즈 탐험대에 의하여 울릉도가 발견되어 다줄레도로 명명되어 서양에 알려졌으며, 1849년 프랑스 포경선인 리앙쿠르호에 의하여 독도가 처음으로 서양에 리앙고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이후 1854년 외교협상차 일본에 방문하였던 러시아 함대가 독도를 발견하고 서도를 ‘올리브채챠도’로, 동도를 ‘미넬라이도’라고 명명하였다. 1855년 영국의 군함 호넷호가 독도를 발견하고 호넷섬이라고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