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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유복식고려시대 삼재도회의 철릭을 입은 평민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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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삼재도회의 철릭을 입은 평민 남자

구성점

발립 철릭

관련자료

고려시대 고법리 박익묘의 시종
고려시대 둔마리고분의 평민 여자
고려시대 문희귀환도의 평민 여자

설명

중국의 삼재도회(三才圖會)에서 소개하고 있는 고려의 평민 남자는 몽고풍 복장을 착용한 채, 두 손을 모아 공수(拱手)자세로 서 있다. 삼재도회 속의 고려인은 몽고형 발립과도 유사한 관모를 착용하고 있는데, 고려의 초상화 속에서 보여지는 발립처럼 좁고 둥근 테가 둘러져 있기는 하나, 흔히 보이는 발립에 비해 정수리 모부가 뾰족하고 약간 높다.
삼재도회란 일종의 백과사전으로서 명나라의 왕기가 저술하였는데 1607년에 쓴 저자의 자서(自序)가 있고, 후에 그의 아들 왕사의가 이어 속집(續集)을 편찬하여 모두 106권에 이른다. 여러 서적의 도보(圖譜)를 모으고 그 그림에 의하여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에 걸쳐 사물을 설명하였다. 천문, 지리, 인물, 시령(時令), 궁실, 기용(器用), 신체, 의복, 인사(人事), 의제(儀制), 진보(珍寶), 문사(文史), 조수(鳥獸), 초목(草木)의 14부문으로 분류하였으며, 수록된 도보에는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나, 그 중에는 다소 황당무계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1259년 당시의 고려 태자(원종)가 몽골과 전투를 중지하고, 조약을 맺어 강화(講和)를 하기 위해 칭기즈칸 손자인 쿠빌라이를 찾아갔을 때, 쿠빌라이는 고려가 보여준 강력한 항전과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표방했던 점 등에 의해 고려를 고구려와 혼동하여 "고려는 만리(萬里)나 되는 큰 나라이다. 당나라 태종이 친히 원정했어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스스로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라며 기뻐하였고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 하여 몽골이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1272년 원에서 일시 강제 거주하고 귀국하던 고려 세자(충렬왕)가 몽골식 개체 변발을 하고 호복을 착용하고 돌아와 그 모습을 본 고려인들이 탄식하며 울었다 한다. 이러한 각각의 상황은 당시 고려 사회가 겪고 있던 문화적 갈등을 상징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서부터 조선시대에까지 널리 착용되었던 철릭도 원으로부터 유입된 복식이다. 고려가요 중 <정석가>에 "무쇠로 철릭을 마라나난..." 이라는 구절은 싸움에 나가는 남편을 위해 철릭을 쇠로 마름질하고 철사로 바느질한다는 뜻이다. 철릭은 의(윗부분,저고리)와 상(아랫부분,치마)을 따로 재단하여 봉제한 옷으로서 곧은 깃이며 상 부분에 주름을 잡은 것이 특징이다. 여름에는 모시로 만들어 입었다. 철릭의 허리부분에 선을 넣어 장식한 것을 요선철릭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우리옷이천년(2001) / 문화관광부(유희경 외)
한국복식문화사(1998) / 유희경,김문자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두산동아

색측정값
RGBLa*b*NCS
255/252/22993/1/40502-Y50R
애니메이션 표현 Tip

1. 여름용 철릭은 매우 고운 세모시로 만들어 입었다.
2. 요선철릭은 허리부분에 가로로 길 바탕 천을 턱(tuck)의 형태로 접어서 턱 아래 위에 두 줄을 곱게 온당침하였다.
3. 철릭의 허리 아래로 붙어있는 치마부분은 잔 주름이 잡혀있어 다소 풍성한 느낌을 준다.

착용특징

머리에 발립형 관모를 쓰고 곧은 깃의 철릭을 착용하였다.

철릭의 고름은 좌측 겨드랑이 안쪽에 주로 만든 속고름 한 개만 달려 있고 안쪽 폭에 또 하나의 끈 고름으로 여몄다.

철릭은 곧은 깃을 오른쪽으로 여몄으며, 허리에 대를 따로 매지 않았다.